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18,21-35
사람이 미워진다면 우선 감사일기 쓰고 십일조 내고 자선부터 실천하라
영화 ‘레인 맨(Rain Man)’에서 돈만 아는 이기적인 찰리 배빗은 자폐증이 있는 그의 형
레이먼드와의 동행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찰리는 빚에 허덕이면서 파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받으려면 형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이먼드를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 형이 자기를 구하려다 오히려 부모님에 의해 시설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는 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레이먼드와 함께 다니며 모험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 형과 정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시설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형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유산을 포기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은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관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반대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용서에 관한 내용이지만, 비유 말씀은 돈을 주제로 하십니다.
곧 일만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하루 일당을, 곧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이라치면 6조 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액수를 탕감받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꾸어간 돈 100데나리온, 곧 천만 원을 갚지 않는 것에 더 화를 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6조 원을 받은 기쁨이 천만 원 잃은 고통보다 당연히 더 커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는 내가 받은 용서의 기쁨이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크지 못하게 느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해의식’이 막습니다. 피해의식이란 내가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커서 나이가 들어서도 생존에 필요한 재물을 잃는 고통을 남들보다 몇 배나 크게 느낍니다.
그래도 6조 원의 기쁨보다 천만 원의 고통이 더 큰 것은 문제입니다.
미움은 교만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 교만은 또한 육욕과 탐욕을 자아냅니다.
가장 이기기 쉬운 것이 탐욕이고 그다음이 육욕이고 마지막이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우선 탐욕을 먼저 없애야 나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에 대한 원한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탐욕을 없애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나에게 돈을 안 갚는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가정을 위해 내어주라는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만 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사람이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갔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때는 당연히 미운 인간들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오래 못 살게 되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 것을 넘어서서 줄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잃은 재물은 오히려 좋은 일에 쓰였다고 하며 미워지던 사람이 고마워질 수도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 한 군데의 상처 때문에 건강한 다른 많은 지체들의 행복을 잊어버립니다.
오직 그 상처에만 집중하고 그 상처에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더해질라치면 기겁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 상처를 건드리면 용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재물이나 명예, 인기나 혹은 내가 가진 무엇으로도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미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나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옵니다.
그 욕망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이웃 사랑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8,21-35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복음서는 온통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무거운 죄와 악습, 치명적인 실수와 허물이 떠올라 괴로울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즉시 복음서를 펼쳐 드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와 관련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공동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였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출신 성분이며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히 충돌할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삐그덕거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던 베드로는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미운 마음이 드는 사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심호흡도 한 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 사도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습관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틈만 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둘 때, 우리 영혼과 육신에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한두 번, 일곱 여덟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수시로, 숨쉬듯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충만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차곡차곡 쌓아둠을 통해 혹독한 고통 속에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강론>
(2024. 3. 5. 화)(마태 18,21-35)
<매정한 종의 비유>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4-30).”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매정한 종의 비유’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
너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라.”
그런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큰 자비는 막연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실감나지도 않는데,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많은 경우에, 이웃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셨다는 자비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일에 진짜로 큰 죄를 지은 경우라면, 회개하면서 하느님의 큰 자비를 체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큰 자비를 체험한 적이 없다면,
머리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도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먼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또 그 큰 자비를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를 묵상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만 탈렌트를 빚진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가 백 데나리온을 나에게 빚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그것은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그 빚을 탕감 받은 일과 같다.”고 설명하면 될까?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라는 말부터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만 탈렌트를 탕감 받았다는 말은
더욱더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 없으니 큰 자비와 큰 용서를 받을 일도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전해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본래 마음이 따뜻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과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처를
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괴로워합니다,
사실 그게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첫 번째 종이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둔 다음에 임금에게 가서는 만 탈렌트를 탕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면 임금은 “너는 네 동료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염치로 나에게 와서 큰 빚을 탕감해 달라고 청하느냐?” 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 앞에 가서 용서를 간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는 이웃을 용서하지 않았으면서 어찌 감히 나에게 용서를 청하느냐?”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테니까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 응답으로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나중에 취소하게 될 일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한 번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이미 주신 은총을 온전히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만 탈렌트라는 엄청난 거액은 하느님의 큰 은총을 상징하고, 백 데나리온이라는 일상적으로 취급하는 소액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잘못들과 실수들을 상징합니다.
돈의 액수에 초점을 맞춰서, 이 이야기를 ‘백 데나리온이라는 소액을 투자해서 만 탈렌트라는 거액을 벌어들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백 원을 투자해서 일억 원을 얻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신앙생활이 무슨 투자는 아니지만, 나중에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씨를 뿌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뜻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