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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창세기 제 1장부터 11장까지는 보통 원역사(Urgeschichte)라 불려진다(여기에 대해서는 Claus Westermann의 Genesis, Biblischer Kommentar.; Translated by John J. Scullion S. J. A Continental Commentary, Fortress Press/ Minneapolis를 참조할 것).
그런데 창세기 전반부는 창조주 하나님의 성경 계시 신앙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사실 그리 간단치 않다. 수천 년 동안 성경을 믿고 읽으며 연구해 온 다양한 신앙과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조차 그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시대를 맞아 그 혼란은 증폭된 감이 없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도 창세기 1장 창조 기사는 어떻게 우리 인류에게 전해진 것인지 의문의 정점에 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전해진 첫 언어는 무엇이었으며 창세기 1장 이전 히브리어가 없었을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 이 계시가 우리 인류에게 전달되어 온 것일까?
그리고 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로서의 언어 계시가 최초 전해진 당시 (에덴동산) 문화와 주변 상황 속에서의 계시 그대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16세기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시작되기 전 수 천년 동안 과학적 방법론 없이 해석되어 온 창세기 전반부(1-11장)를 오늘날의 자연 과학적 시각으로 수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를 성경은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탁월한 국내 최고의 고대 근동학자 장국원 박사도 성경은 진화론적 언어 발달설이 아닌 인간 창조와 함께 이미 언어는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탁월한 역사 속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신대 구약학 교수를 지낸 문희석(文熹錫)도 근본적으로 자연과학과 대결하는 도중에 교회는 '창조주와 창조' 이해를 잘못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그릇된 이해를 철저히 바로 잡아 놓은 적이 없었다고 탄식하며 올바른 창조 이해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고 했다.
또한 인류는 창세기 1장 해석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세 가지 사건을 역사 속에서 겪는다.
먼저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 사건에 따른 우주적 붕괴(죽음과 저주로 대표되는 우주적 재앙)이 일어났다.
둘째는 지구촌 생태환경의 일대 대 격변을 초래한 창세기 대홍수 사건이다(창 6-9장 참조). 이 재앙으로 에덴동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탑에서의 인류 언어 혼잡 사건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의 초월 사건을 내재의 언어로 계시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에 초월-내재적 요소가 혼합된 위의 세 가지 사건은 창세기 1장의 바른 해석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3 가지 사건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창세기 1장 해석의 결정적 방해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니 3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바른 해석을 기대하는 것은 암담함 그 자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호기심이라 불리는 생득적(innate) 체질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해석의 원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바른 해석을 향해 몸부림치면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실마리를 푸는 추적을 위한 기초 탐구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즉 본고는 창세기 1장의 직해(直解) 시도(주: 창세기 1장에 대한 주요한 주석들은 널려있으니 참조할 것)가 아니라 해석의 틀을 제공하려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바른 해석의 골격을 제공하는 작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성경(창세기 1장)이 기록되기 전 무슨 일들이 있었나?
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
창세기 1장은 사실 현대 과학의 복잡한 우주 기원론이나 생명기원론 등 고차원의 과학과 기술의 언어가 동원된 계시가 아니다. 평이한 단어들로 서술된 총 31절에 불과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시이다. 그런데 단순 용이하게 묘사된 창세기 1장이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부딪히는 딜레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온갖 창조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엄청난 신학적 이론이 난무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파생된 기독교 이외의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 유대교, 이슬람까지 포함하면 창조 계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이 “딜레마”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딜레마는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일까? 그 근원적 요소들부터 살펴보자.
1. 히브리 성경 이전의 계시 언어는 무엇이었을까?(성경 창세기 1장 계시 이전에 어떤 문제는 없는 가)
<최초의 언어는?>
언어는 어디서 왔을까? 성경은 에덴 동산에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계시된 언어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성경 토라의 언어(히브리어) 이전에도 문자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 인류가 지금까지 확인한 가장 오래된 문자와 언어로는 히브리어 이전 수메르의 설형문자(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세계 최초의 문자 발명 증거가 노출된 곳은 고대 수메르 도시 우륵(현재의 Warka; 성경에서는 Erech, 창 10:10)이었다.
물론 이 학문적 성과가 곧바로 최초의 언어를 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수고하고 추적해 발견해 낸 현재의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의 언어는?>
하지만 노아와 그 가족이 쓰던 언어와 글의 원형이 무엇이고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증거는 성경을 포함하여 오늘날 전혀 추적이 가능하지 않다. 바벨탑 언어 혼잡 사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모세 이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요 이스마엘 후손들의 조상도 되는 아브라함이 히브리어를 창시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을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창세기 대홍수 이후 바벨론에서 언어가 혼잡 된 이래 진정한 언어적 세계 통일은 쉽지 않게 되었다(창 11:9).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온 땅의 인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분명 히브리어가 아닌 자신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통용되던 언어에 능숙했을 것이다. 그곳은 바로 '쐐기문자(cunéiform)'가 통용되던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주전 3000~4000년 사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계곡에 도시들을 구축하면서 이 문자를 창안했다고 알려진다.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그곳의 문화와 우상에 젖어 바로 이 최초 문자의 영역 속에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 학생들이 기억해야 하는 문자는 600 여개였고 단어와 음절, 한정사를 모두 포함하면 166-188개의 글자에 달하였다.
모세 이전 창조 계시가 없었다고 볼 수 없기에, 알파벳 이전 이 쐐기문자의 한계와 우상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은 창조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손 모세와 그 백성들이 400여 년간 하층 생활을 영위하던 이집트의 상형 문자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익혀야 하는 상형문자가 100여 개밖에 되지 않을 만큼 어휘가 풍부한 문자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언어의 부침을 겪었다.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는 분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설형문자보다 풍부한 어휘를 가진 문자는 아니었다. 즉 언어의 엔트로피는 오히려 아브라함 후손들 속에서 증가하였다.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아브라함 후손들이 처한 환경과 문화 속에서 점점 더 그 명료함을 상실해 갔을 것이다.
<창조 계시 보존의 험난한 과정>
이렇게 아브라함 이후 야곱의 후손들은 그들 선조들의 본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보다 언어적으로 더 낙후된 환경 속에서 종교와 문화적 향유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는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계시를 보존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즉 창조 계시는 “아담과 하와의 언어”-> “노아 언어”-> 홍수 이후 “바벨탑 혼잡 언어” 속 보존-> 인류 최초 등장한 비 알파벳 문자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의 쐐기문자(일명 설형문자) 아래 다른 신들(우상들, 수 24:2)을 섬기던 아브라함 조상(아버지 데라 등) 속의 계시 보존(?)->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대하 20:7)의 언어 환경(수메르어?) 속 보존(?)-> 야곱 후손들의 이집트 상형 문자와 언어 속 보존(?)-> 출애굽한 “모세 집단”의 언어(히브리어의 잉태 시기?) 속 보존-> 알파벳 셈족어에서 파생된 초기 히브리 언어 등장(“토라 생성 시기”)-> 현대 히브리어에 보존-> 성경 원본 상실 -> 다양한 사본(寫本) 속 보존 -> “다양한 역본(譯本)들 속의 보존”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생각보다 단순 명료한 창조 계시(창세기 1-11장)가 지난(至難)한 과정을 겪어온 셈이다.
<첫 알파벳의 등장>
설형 문자와 상형 문자를 거쳐 역사적으로 흔적이 나타나는 확실한 첫 번째 알파벳은 주전 14세기 나타난 우가리트 알파벳이었다. 현재의 시리아에서 발굴된 이 가나안 셈어군은 문자 모양은 쐐기형이었으나 모양만 닮았을 뿐 모음과 자음의 음가를 가진 알파벳 글자의 원형(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우가리트 알파벳이 수메르-아카디아 철자들에서 파생되어 출현한 알파벳인 반면 비슷한 시기 이집트 상형 문자로부터 비롯된 알파벳이 시나이반도에 나타났다.
이집트 사람들은 한 문자가 한 단일 자음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글자가 한 자음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알파벳의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귀족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알파벳 체계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한글을 창안 한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복잡한 한문을 선호하던 것과 유사하다. 반면, 원시나이어(원셈어) 알파벳으로 불리는 이 알파벳이 바로 가나안, 페니키아, 아람, 그리스 문자들과 고대 히브리어로 발전된 원시 문자였으니 이 알파벳에서 라틴어와 에트루리아어를 거쳐 현재 유럽의 알파벳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셈어의 원형은 시나이반도에서 파생되었다.
<히브리 알파벳의 원형을 가진 창세기와 토라의 탄생>
이렇게 문자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면 알파벳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자를 융합하면서 시나이반도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모세(애굽 탈출 시대)와 다윗 시대(가나안 입성 시대) 사이에 히브리인들은 자신들만의 히브리어를 구축해 가면서 원셈어와 여기서 파생된 다른 셈어 문자들의 단어에 담긴 우상 문화 코드들을 구분, 정리하고 히브리 민족에게 계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기술할 필요가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오늘날 인류가 접하는 창세기 1장과 토라가 탄생했다. 이것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온 원시 히브리어 속 보존된 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를 만들었다. 즉 딜레마의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죄악에 물든 인간의 문제였다.
2. 초기 성경들의 문제
성경 고고학자들은 유대교,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 프로테스탄트, 이슬람 등 다양한 신앙적인 배경을 가진다. 따라서 이들 학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고고학적 발견 그리고 토라의 히브리어 사이에서 서로 간에 해석의 단절 현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의 경우 바로 필자가 지적한 에덴동산 추방과 창세기 대홍수사건과 바벨탑 언어 혼잡이라는 3 가지 결정적 사건 이외에도 창세기 1장이 가지는 창조라는 초월적 대 사건에 대해 비교적 단순하고 용이한 서술 방식이 창세기 1장 해석의 모호성을 가지게 만든다.
창세기 1장을 포함한 11장까지를 서론에서 “원역사”라 불려 진다고 했으나 창세기를 포함하여 오경 전체 역사가 하나님이 구속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처음 11장의 역사를 원역사보다는 태고사(太古史)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신학의 주장도 있다. 개신교 신학의 주된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토라가 개신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MIT 박사 출신의 물리학 교수요 이스라엘의 핵심 학교들인 와이즈만 연구소, 히브리대학, 볼카니 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랍비 교육까지 필한 제럴드 슈뢰더(Gerald L. Schroeder)의 해석학적 제언에서 잘 드러난다.
슈뢰더의 명성은 1923년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옥스퍼드를 나와 킬 대학(20년), 옥스퍼드, 에버딘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와 여러 직책을 맡으며 50년 동안 무신론 철학자로 악명(?)을 떨치던 안토니 플루(Antony Flew) 교수가 슈뢰더의 『The Hidden Face of God』(번역 명 “신의 숨겨진 얼굴”)을 읽고 회심하였다는 고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슈뢰더는 중세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의 글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성경 사이의 갈등은 과학적 지식의 결핍과 성경에 대한 완전치 못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The Science of God, New York: Free Press, 1997, 3). 이것이 지속적인 불협화음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성경들(히브리어 다양한 사본들, 아람어 탈굼, 불가타역, 칠십인역 성경, KJV, 각 나라 역본 등)을 가지고 창세기 1장 1절의 해석부터 어긋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런 관점에서 슈뢰더는 우리 기독교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번역한 것 자체가 진정한 히브리어 성경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슈뢰더는 기독교의 중요한 세 가지 번역(헬라어, 라틴, 영어) 성경에서 찾는다. 먼저 4세기경의 제롬의 라틴 불가타 성경(Latin Vulgate)과 오경을 제외하면 주로 주전 2-3 세기에 번역된 것으로 알려진 헬라어 70인 역(Septuagint) 그리고 70인 역을 기본으로 1611년 간행된 킹 제임스 흠정역(KJV)이라고 지적한다. 히브리어를 제외하면 오늘날 기독교가 중요시하는 핵심적인 헬라어, 라틴어, 영어 역본 모두를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슈뢰더는 “태초에”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베레쉬트(Bereshit)”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태초에”라는 의미가 아니고 ‘---의 시작에’라고 했다. 그리고 ‘---의’ 목적어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슈뢰더는 창세기를 아람어로 번역한 2100년 전 아람어 역본은 “베레쉬트”를 복합단어로 보고 접두사 “베”는 “더불어(with)”, "레쉬트"는 “최초의 지혜”(first wisdom)로 풀이하였다. 즉 창세기 1장의 첫 단어 “태초에”는 아람어 역으로 보면 ‘최초의 지혜와 더불어’이다. 즉 정통 기독교의 “태초” 해석과 첫 단추부터 전혀 달라진다. 그렇다면 아람어의 창세기 1장 번역은 “지혜와 더불어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된다.
이 “지혜”를 바탕으로 슈뢰더는 디지털 세상이 온통 정보 속에 있듯이 물리학자답게 모든 미세 입자들은 단순한 미세 입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지혜와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바탕으로 창조주 하나님(여호와)의 정보가 담긴 입자(존재)라는 논리로 귀결한다. 그러면서 슈뢰더는 과학자로서 이것이 최근의 입자물리학자들의 동향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우주가 일종의 “메트릭스”나 “시뮬레이션”이나 “컴퓨터 코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토의는 이미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지 않은가(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으면서 옥스퍼드대 철학과 닉 보스트롬이 2003년 <Philosophical Quarterly>에 그 가능성을 주장한 이래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과학기술 자문위원을 지낸 메릴랜드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게이츠(S. James Gates, JR)가 우주에는 에러를 스스로 고치는 코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펴고 일론 머스크도 우주는 슈퍼컴퓨터 상의 게임 캐릭터일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논란이 확장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렇게 볼 때 첫 단어부터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또 다른 역본들(헬라어, 라틴어, 영역본 등)의 해석 자체가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다.
이레니우스(130-200)와 어거스틴(354-430)과 세 가지 중심 되는 개혁파 신앙고백서(Reformed Confession of Faith)인 벨직·하이델베르크·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모두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도 그의 『사도신경 해설』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롬 4:17)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토라를 신봉하는 일부 유대인들의 창세기 1장 1절 해석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 딜레마인 것이다.
창세기 1장, 과학기술 발달한 오늘날 시각으로 해석한다면
창세기 제 1장부터 11장까지는 보통 원역사(Urgeschichte)라 불린다(여기에 대해서는 Claus Westermann의 Genesis, Biblischer Kommentar.; Translated by John J. Scullion S. J. 《Genesis 1-11》 A Continental Commentary, Fortress Press/ Minneapolis를 참조할 것).
그런데 창세기 전반부는 창조주 하나님의 성경 계시 신앙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사실 그리 간단치 않다. 수천 년 동안 성경을 믿고 읽으며 연구해 온 다양한 신앙과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조차 그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 시대를 맞아 그 혼란은 증폭된 감이 없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도 창세기 1장 창조 기사는 어떻게 우리 인류에게 전해진 것인지 의문의 정점에 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전해진 첫 언어는 무엇이었으며, 창세기 1장 이전 히브리어가 없었을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 이 계시가 우리 인류에게 전달되어 온 것일까?
그리고 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로서의 언어 계시가 최초 전해진 당시 (에덴동산) 문화와 주변 상황 속에서의 계시 그대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16세기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시작되기 전 수천 년 동안 과학적 방법론 없이 해석되어 온 창세기 전반부(1-11장)를, 오늘날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수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를 성경은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탁월한 국내 최고의 고대 근동언어학자 장국원 박사도 성경은 진화론적 언어 발달설이 아니라, 인간 창조와 함께 이미 언어는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탁월한 역사 속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신대 구약학 교수를 지낸 문희석(文熹錫)도 근본적으로 자연과학과 대결하는 도중에 교회는 ‘창조주와 창조’ 이해를 잘못 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그릇된 이해를 철저히 바로 잡아놓은 적이 없었다고 탄식하며 올바른 창조 이해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고 했다.
또한 인류는 창세기 1장 해석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세 가지 사건을 역사 속에서 겪는다.
먼저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 사건에 따른 우주적 붕괴(죽음과 저주로 대표되는 우주적 재앙)가 일어났다.
둘째는 지구촌 생태 환경의 일대 대 격변을 초래한 창세기 대홍수 사건이다(창 6-9장 참조). 이 재앙으로 에덴동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탑에서의 인류 언어 혼잡 사건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의 초월 사건을 내재의 언어로 계시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에 초월-내재적 요소가 혼합된 위의 세 가지 사건은 창세기 1장의 바른 해석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3가지 사건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창세기 1장 해석의 결정적 방해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니 3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바른 해석을 기대하는 것은 암담함 그 자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호기심이라 불리는 생득적(innate) 체질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해석의 원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바른 해석을 향해 몸부림치면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실마리를 푸는 추적을 위한 기초 탐구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즉 본고는 창세기 1장의 직해(直解) 시도(주: 창세기 1장에 대한 주요한 주석들은 널려있으니 참조할 것)가 아니라, 해석의 틀을 제공하려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바른 해석의 골격을 제공하는 작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딜레마
3. 근대 과학의 등장
인류 역사 속에 파편적인 과학적 사고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근대과학은 16세기에 본격적으로 서양에서 그 출발을 알렸다. 16 세기 유럽은 걸출한 인물과 학자들이 배출된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먼저 15C 태어나 16C 주로 활약한 종교 쪽의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마르틴 루터(1483-1546) 그리고 16C 태어나 활동한 요한 칼빈(1509-1564)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태어났고 독일에서는 천문학자 케플러(1571-1630), 16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활발히 활동한 합리주의(rationalism)자 데카르트(1596-1650)가 태어났다. 영국에서는 진정한 근대과학의 원조인 경험주의자(empiricism)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등장했다.
과학혁명의 시조 베이컨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 과학자로 과학혁명의 시조라 불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했듯이 그는 경험주의자로서 학문에 대한 굉장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 더 극찬한다면 데카르트는 유럽 대륙(합리론)을, 베이컨은 영국(경험론)을 대표하는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과학 방법의 길을 연 근대 철학과 근대 과학의 개척자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의 국새관이자 대법관인 니콜라스 베이컨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유학을 거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밑에서 국회의원, 제임스 1세 시절에 사법장관과 아버지와 같은 국새관(Lord Privy Seal)을 지낼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그는 뇌물 수뢰 혐의로 부침을 겪기도 한다.
베이컨의 경험론
본래 경험론은 앎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Theory of knowledge)의 문제로 고대의 경험론은 존재론적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통상적 경험론은 근대 이후의 인식론 차원의 경험론을 말한다. 근대 과학은 귀납을 통해 이론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고 이후 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철학이다. 한때 국내에서는 귀납적 성경 해석이 큰 유행을 탔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귀납적 경험론은 논리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장점도 가진 방법론이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오르가눔』(Organum)을 대신하고자 “학문 대혁신”을 위한 전 6부작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된 것은 3부였다. 제 1부 『학문의 진보(1605)』를 거쳐 1620년 역작인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신기관’)을 집필해 귀납법을 제시하여 경험론(empiricism) 철학의 효시가 되었다. 즉 베이컨은 이 책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경험뿐이라는 인식론을 전개한다. 베이컨은 과거의 궤변과 오류는 네 종류의 우상 탓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이 책의 1부에서 인간이 버리고 고쳐야할 우상(Idol)을 제시하고 2부에서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귀납을 제시했다.
베이컨의 귀납법
베이컨은 이런 우상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귀납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즉 이를 위해 첫째 발견 목록을 작성하는 단계가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려 하면 실험과 관찰로 그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를 목록에 쓴다. 둘째 작성한 목록을 바탕으로 제거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목록의 내용을 토대로 가설을 작성하는 일이다. 가설을 작성하는 것은 실험과 관찰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네 번째 단계는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가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반복하여 가설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오류가 나타난다면 그 가설은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베이컨은 자신의 저술에 정리한 귀납법이 올바른 과학적 방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식의 유용성과 실천적인 적용에 지나치리만큼 집착한 탓에 실제 과학 법칙이 발견되는 과정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베이컨의 결정적 약점은 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면서도 베이컨 스스로 수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수학에 탁월한 합리주의자 데카르트가 등장하기까지 경험론은 일정한 한계를 가진 방법론으로 남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는 논리학에서 귀납법의 위상을 확고히 했으며,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베이컨의 저작은 완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다방면에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 1623)에서 새로운 아틀란티스(호주 대륙의 남쪽 바다에 위치)에서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귀납적인 방법)으로 생산 증가를 꾀하고 플라톤의 정치 이념을 실행하려는 가상의 공동체를 묘사한다. 또 문명은 과학을 통해 진보하므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연 과학 단체(대학)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 구상은 훗날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로 실현되었고 이는 과학 혁명의 요람이 되었다. 즉 16세기에 이미 베이컨은 오늘날의 자연과학대학 설립 구상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
창세기 “창조” 계시와 근대 과학의 조우
이렇게 근대 과학이 시작되면서 성경 해석은 또 다른 변혁기를 맞이하게 된다. 과연 수천 년 동안 자연과학적인 방법론 없이 해석되어 왔던 창세기 “창조” 계시가 과연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 과학의 귀납법과 합리론을 가지고 창세기 “창조” 계시를 과학의 눈으로 수정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에 무지했던 베이컨 이전 성경 해석은 인류의 오점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인가? 초월을 내재의 학문인 과학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도대체 자연과학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창조” 해석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노정(露呈) 되었다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근대 과학이 점점 더 고도화 되면서 “창조”는 먼저 물리학과 천문학의 우주생성론과 우주기원론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은 알게 되었다. 일명 “코페르니쿠스적 우회” 사건은 바로 천체를 보는 시각에 있어 로마 교황청과 자연과학이 균열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윌리엄 스미스나 제임스 허튼 등을 통해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지질학은 격변과 동일과정설이라는 지질학 용어를 통해 지구의 지층과 층서에 대해 설명이 가능해지면서 창세기 창조 사건과 대홍수에 대해서도 과학적 언급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생물학과 화학은 인간과 생물의 존재와 분류가 창세기 1장의 “종류대로”의 동식물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간의 특별한 창조에 대한 설명에 과학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과학적 제사장이나 과학 선지자적인 우월감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신학을 평가 절하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조우
그 유용성을 여부를 떠나 이렇게 필연적으로 신학의 해석이 자연 과학의 해석 방식과 조우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 조우는 성경 창세기 해석의 다양성을 가져온 반면 새로운 혼돈을 야기 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접근 방식이 다른 신학과 자연 과학이라는 두 학문이 “창조”라는 초월 계시 사건의 해석을 가지고 만날 때 서로 다양한 융합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갈등, 독립, 대화, 통합, 대조, 접촉, 확증, 공명, 서로 보완, 공생 등 관련 학자들조차 일치되지 않는 다양한 조합을 제안하였다. 포스트모던 신학자 테드 피터스는 과학주의, 과학제국주의, 교회권위주의, 과학적 창조론(일명 창조과학), 두 언어 모델, 가설적 조화, 윤리적 중첩, 뉴 에이지 영성 등 8 가지 입장을 논증하기도 했다. 과학이 성경과 “창조” 해석에 뛰어들 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초월과 내재 사이를 오고가며 해석에 있어 복잡성만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다. 분명 딜레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103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