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스님
한밤중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끝없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도를 방해하는 것은 졸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루 종일 어느 때나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면서 흐리지 말고,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아 있거나 눕거나 간에
조용히 속으로 살펴보아라.
한평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두고두고 한이 될 것이다.
덧없는 세월은 찰나와 같으니 나날이 놀랍고 두려우며,
목숨은 잠깐이라 잠시도 보증할 수 없다.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졸음 뱀에 구름 끼니 마음 달 흐려
수행자가 여기 와서 갈 바를 모른다.
이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빼어 들면
구름은 간데없고 달빛만 환하리.
-야운 비구(野雲 比丘)의 《자경문(自警文)》-
10여 년 전 다시 산으로 돌아올 그 무렵,
할 일이 많은데 어째서 산으로 들어가려느냐고 묻는
친지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산으로 들어가 잠이나 실컷 자려고 그러네.
사실 도시 주변의 절간에 머무는 6, 7년 동안
나는 늘 잠이 모자랐다.
이 일 저 일에 상관하느라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니 숙면이 될 턱이 없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절 앞길로 질주하는 차 소리 때문에도 깊이 잠들 수가 없다.
그러나 막상 산에 돌아와 살게 되니 잠만 잘 수가 없다.
산에서는 산에서대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손수 끓여 먹고
도량이라도 가꾸자면 푹 쉴 여가가 없다.
가끔 혼자서 하는 푸념이 있다.
어디 가서 더도 말고 한 댓새 해놓은 밥 좀 얻어먹으면서,
날마다 더운물에 목욕하면서
푹 좀 쉬었으면 좋겠네라고
내 복에 어디 그럴 수 있으랴 싶어
그것은 한낱 희망 사항으로 남을 뿐이다.
피로를 푸는 일이 잠이 제일임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한잠 푹 자고 나면 다시 생기를 돌이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잠이라는 게 습관이 되고 보면
잘 수록 더 졸음이 오고 곤하게 된다.
잠자리에 오래 누워만 있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더 피로가 쌓인다.
모든 일은 길들이기 탓이다.
어떤 스님들은 하루 두세 시간밖에 안 자고도 말짱하다.
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해서,
아예 바닥에 눕지 않고 앉은 채 정진하면서 잠깐 졸뿐이다.
그러고도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에 육신이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우리들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령스런 영체(靈體)라는 것.
이 몸은 그 영체에 소속된 그림자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한 생애의
3분의 1을 순전히 잠으로 보내고 있다.
60년이 한 생애라면 20년을 잠으로 보낸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24시간뿐이다.
이것만은 아주 공평하다.
그러니 살아있는 시간을 좀 더 가지려면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인류사에 빛을 남기면서 사람답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길거나 짧거나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잘사는 사람은 그 시간을 귀하게 여기면서
잘 쓸 줄 아는 사람이고 잘 못사는 사람은
모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임에도
그걸 모르고 함부로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가는 것이지 오는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한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과 조류는 결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돈이나 물건은 아까워하면서도
시간은 아까워할 줄을 모른다.
시간이란 곧 우리들 목숨의 한 도막 아닌가.
이 시간에 대한 관념은 특히 절에서 희박하다.
정해진 시간 약속을 어기기 일쑤다.
이 시간에 대한 관념은 게으름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어떤 신도들은 일없이 절에 와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일없는 스님들과 어울려 노닥거리는 일이 많다.
무엇 때문에 절에 다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이 남아 주체할 수 없어
절에 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볼일이 끝났으면 절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스님들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유용하게 쓸 게 아닌가.
공부할 시간을 자신이 빼앗고 있으면서도,
공부를 하니 안 하니, 실력이 있으니 없느니 불평만 한다.
도시 주변에 있는 포교당 같은 데 가보면
시간을 깔아뭉개면서
탕진하고 있는 광경을 자주 대하게 되는데,
불자라면 다 같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나그네가 한나절의 한가로움을 얻을 때
주인은 한나절의 한가로움을 잃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데에 마음을 쓰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간을 선용하는 데에 마음을 쓴다.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도 귀한 줄 알고
잘 쓰면 거듭거듭 창조와 향상의 삶을 이룰 수 있고,
시간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소모요,
낭비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자기 시간도 소중하게 쓸 줄 알아야 하겠지만,
남의 시간을 함부로 빼앗는 일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훔치는 사람이야말로 큰 도둑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숨의 한 도막을 빼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친구란 함께 있는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고
나쁜 친구란 함께하는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소모했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흔히들 말하기를, 새털같이 많은 날을 두고
뭐 그리 서두르냐고 한다.
이런 말은 시간과 목숨에 대한 모독이다.
누가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살아 있다고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보장한단 말인가.
그러니 무슨 일이건 미루지 말고 마음 내켰을 때 곧 착수해야 한다.
임제 선사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바로 지금이지 따로 시간은 없다.
(卽時現今 更無時節)”라고
이다음으로 미루면 현재는 소멸되고 만다.
사람은 현재에 사는 것,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지,
과거나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이라고 할 때 이미 석양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아침에 행하라는 것이 옛 어른들의 교훈이다.
원효 스님은 그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이 끝이 없는 데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이 끝이 없는데 착한 일 하는 날은 많지 못하며,
금년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이 다하지 않는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구나.”
‘오늘’, ‘내일’ 하면서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핑계로 한평생을
이다음으로 미루면서 살려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런 버릇을 고치는 일이 신앙생활이다.
생활에 개선이 없으면 삶은 탄력을 잃고 침체되기 쉽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인생을 개선해가면서 살아갈 뿐이다.
《발심수행장》은 이런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쌓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어지면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허송했으며,
그 많은 날을 헛되이 살아왔으면서 어째서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내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닌가.”
시간은 가는 것이지 오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헤아려보라.
어찌 마음 놓고 잠에 빠질 수 있겠는가.
출처: 물소리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