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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꾸었던 꿈
단 4:10-18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13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14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8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단 4:10-18 / 내가 잠자리에 들어 꿈속에서 본 환상은 이러한 것이었다. 땅 한가운데에 크나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크던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11) 그 나무는 점점 더 커지더니 급기야는 하늘까지 맞닿을만큼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어 하늘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 나무를 볼 수 있었다. 12) 그 나무 잎사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먹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열려 있었다. 그뿐 아니라 들짐승도 그 나무 그늘 아래서 편히 쉬기도 하였으며 하늘에 날아다니는 날짐승도 그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열매를 따먹고 살았다. 13) `그래, 내가 본 환상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거룩한 순찰자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았다. 14) 그런데 그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 나무를 베어 버려라. 가지를 찍고 잎사귀를 훑어 버려라. 그 열매를 모두 다 따버려라.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들짐승도 모두 다 쫓아버려라.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날짐승도 모두 다 쫓아 버려라. 15) 그러나 그 그루터기는 그대로 두어라. 그 그루터기는 쇠줄과 놋쇠줄로 꽁꽁 묶어 그대로 두어라. 그렇게 풀밭에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게 그냥 두어라. 짐승과 어울려 지내게 놔두어라. 식물과 함께 지내게 그냥 두어라. 16) 그 마음이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고 오히려 짐승같은 마음을 지니게 하여라. 일곱해 동안 그렇게 지내게 하여라. 17) 바로 이 결정은 거룩한 분들의 결정이다. 조심성 있고 늘 정신 바짝차리고 있는 순찰자들의 명령이다. 사람들이 다스리는 천하 모든 나라가 모두 다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 그분의 관할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이 사신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여 당신 뜻대로 그 누구에게라도 나라를 맡기실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라도 그분은 세상 나라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18) 이상이 바로 내가 꾼 꿈이다. 벨드사살아, 그러니 이제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말해 보아라. 이 나라의 그 어떤 현인도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내게 말해 주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대는 내게 말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대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휘감고 있는 사람 아니냐! 그러니 어서 내게 말해 주어라.'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한 나무를 보는데 이 나무가 그의 미래를 예고합니다.
한 나무(10-12)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것은 거대한 나무입니다. 성경에서 나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시 1:3; 렘 17:8; 겔 31:3). 이 나무는 땅의 중앙에 있는데 이는 느부갓네살 왕이 당시 세상의 주관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나무가 어찌나 높든지 땅 끝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느부갓네살 왕의 영향력이 폭넓고 대단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 나무는 높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풍성합니다. 이 나무는 쉴 수 있는 그늘과 먹을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제공합니다. 이는 바벨론 제국의 태평성대를 보여줍니다.
베임 당하는 나무(13-16) 꿈속에서 순찰자가 등장합니다. 이 순찰자, 곧 거룩한 자는 천사입니다. 천사의 등장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크고 아름답던 나무가 베임을 당하고 짐승들과 새들이 떠납니다. 이는 느부갓네살 왕의 영향력의 중지를 예고합니다. 이 나무가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남은 그루터기는 쇠와 놋줄에 묶입니다. 이는 정신이상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부갓네살 왕의 무기력한 상태를 예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일곱 때는 칠 년으로 해석됩니다. 왕은 7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상실한 채 짐승의 마음으로 지낼 것입니다.
이 꿈의 목적(17-18) 이 꿈의 목적을 기술합니다. 국가 간의 전쟁을 신들의 전쟁이라고 믿었던 느부갓네살 왕은 많은 승리를 통해 바벨론의 신들이 가장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성전 기물을 가져옴으로써 왕의 교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꿈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미신과 교만은 박살납니다. 이 꿈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세우셨고 자신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일 뿐이며, 역사의 주인은 바벨론의 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복자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포로인 다니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도 인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적용: 당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텔마 톰슨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한 육군 장교와 결혼했지만 외로움과 고독함을 홀로 버텨야 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그만 창문이 달린 감옥에 두 남자가 있었단다. 한 사람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고, 다른 사람은 감옥의 먼지와 바퀴벌레를 보며 불평과 원망으로 하루하루 살았단다.' 감옥에 있던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설 교 >
두 번째 경고의 꿈
단 4:10-18
꿈은 미신이 아니다. 오늘의 운세도 아니다. 꿈은 하나님의 동영상이다. 샌포드(John A. Sanford)는 "꿈은 하나님의 잊혀진 언어다"라고 했고, 몰튼 캘시(Morton Kelsey)는 "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이라 했다. 이처럼 꿈은 우리의 불행을 예고해 주고, 가야할 길을 알려 주는 동영상이다.
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장래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예고하는 꿈이 있고,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경고의 꿈도 있다. 또한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를 점검해서, 변화를 촉구하는 꿈도 있다. 이와 달리 사탄이 주는 꿈도 있고,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꿈도 있다.
그렇기에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면, 냉철한 분별력이 요구되며, 해석의 위험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중심을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두고, 주님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데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을 통하여 계시를 주셨다. 2장에서 신상의 꿈을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세계 역사를 보여 주신 예고적인 꿈이다.
4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두 번째 꾼 꿈인데, 이 꿈은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에게 내려지는 심판의 경고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교만하게 굴다가 거꾸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미리 보여 주신 말씀이다.
1. 중앙에 있는 한 나무(10-12).
느부갓네살 왕은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다"고 하며, 다니엘에게 자기가 꾼 꿈을 설명하는데,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신이 자기에게 주는 "이상", 계시라고 하였다(10).
신이 자기에게 장래 일을 계시하였다. 그 꿈은 이렇다.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고가 높은 나무, 거목을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한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을 나무로 상징한다.
암2:9을 보면, 아모리 사람을 가리켜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다고 표현했다. 또 삿9장을 보면,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다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때 간신히 살아남았던 요담이, 비유를 들어서 말을 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했지만, 그 나무들은 되지 않으려 했는데, 가시나무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이처럼 나무는 사람을 상징한다. 따라서 땅의 중앙에 서 있는 큰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자라나 견고해졌다. 크고 강해졌다. 그 높이가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였다. 느부갓네살 왕의 권세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주변의 국가들을 다 정복했다.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을 정도로, 권세가 땅 끝까지 미쳤다.
그래서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많아서, 만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들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12).
나무는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번창했다. 평안했다. 자기를 찾아오는 자에게 피난처와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느부갓네살 왕은 온 세상의 생명이, 마치 자기에게 달린 듯이 착각하고 교만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권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겸손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다. 오히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만들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지혜와 방법(박수, 술객, 점쟁이)을 더 의지했다.
그래서 결국 교만하게 굴다가,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말았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죄는, 자기 보좌를 높이려고 교만 떨다가 타락했다(사14:13).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유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때문이다.
바벨탑을 하늘까지 높이 쌓아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 때문에 인류는 분열되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잘못된 욕망과 교만이 있다.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끝까지 높아지려고 하다가 망했다.
1.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다.
여러 죄악들이 바로 교만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다른 모든 죄악은, 교만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 즉 교만이 질투를 낳고, 분노를 낳고, 탐심을 낳는다.
교만은 거짓과 비난, 또 정죄함과 참지 못함을 낳고, 용서하지 못하며 강퍅한 마음과, 듣기 싫어하는 의식, 자기 연민을 낳는다. 셀 수 없이 많은 죄악이, 여기서 다 나온다.
2. 교만은 이웃과의 관계에, 담을 쌓는 죄악이다.
교만은 자신과 자기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찾아오는 질병이다. 교만은 자신이 중심될 때, 찾아오는 죄악이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행하라고 하면서, 자신의 방식만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비난하고 멸시하기에, 결국 스스로 담에 갇히고 만다. 교만은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뿌리치고, 한 손으로는 이웃을 뿌리치고, 홀로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파국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3. 가장 무서운 죄악이다.
교만이 앞장서면, 꼭 넘어지게 되고, 패망이 뒤따라온다. 그래서 잠언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낮추신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하나님께서 그래도 봐주신다. 그러므로 높아지려고 애쓰지 말고, 도리어 낮아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가 되시기 바란다.
2. 순찰자의 외침(13-16)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장면은, 전혀 두렵게 없었다. 나무가 점점 자라나서, 잎사귀가 견고해지고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열리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 순찰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 장면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두려워 깊은 번민에 빠지게 되었다.
순찰자(잠든 사람을 깨우다, 감시하다)는 잠자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행동들을 주목해서 보는 신적인 존재라는 바벨론 용어다. 이 순찰자는 소리질러 외쳐( , 하늘의 군대와 함께) 이르기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외치고 있다. 이 순찰자는 하늘의 군대들에게 외쳤다.
1. 무엇을 외쳤나요?(14).
6가지를 외쳤다. (1) 견고한 그 나무를 베라. (2) 무수한 가지를 찍어내라. (3) 아름다운 잎사귀를 떨어버려라. (4) 많은 열매를 다 헤치고 (5)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6)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좋지 않은 꿈임을 알 수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더 이상 영향력 있는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됨을 말한다.
과거에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하들이, 왕 밑에서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져서 다 떠나 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15)라고 했다.
비록 징계를 받아 권좌에서 쫓겨나지만, 생명은 남겨두었다가,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가 남아있으면, 생명력이 남아 있기에, 다시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나무는 자라게 된다. 이처럼 언젠가는 다시, 그의 나라가 회복된다는 말이다.
2. 언제 회복되나요?(26)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겸손하게 되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축복은, 겸손히 회개할 때다. 나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가장 좋은 겸손이다.
나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께서 귀하게 쓰신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받아들임이 겸손이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고통이 따르게 된다.
3. 어떤 고통이 따르게 되나요?(15)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정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정신병원에 가면, 심한 환자들은 쇠줄로 묶어놓는다. 짐승같이 난폭하게 되기 때문이다(16). 왕이 다른 사람을 해칠까봐 묶어 둠이 아니라, 왕으로 다시 회복될 것이기에, 병사들을 시켜서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주변에서 지키고 보호해 준다는 의미다.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이나가, 왕궁에 거하지 못하고, 들의 풀 가운데 거하는 가련한 모습이 되어,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다. 정신이 나가도 왕이 먹는 좋은 음식을 먹고살아야 하는데,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산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16)라고 했다. 마음이 짐승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어지고, 자신이 소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풀을 뜯어먹으며 짐승처럼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기간은 일곱 때를 지나리라고 했다. 여기서 때( )는, 어떤 기간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7년으로 해석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다 지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뜻이다.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지나갔을 때, 그루터기에서 다시 움이 돋고 나무가 자란 것처럼, 느부갓네살 왕도 다시 회복하게 된다.
3.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꿈을 주셨을까?(17-18) - 알게 하려 함이라.
1. 하나님의 경고를 알게 하려 함이라.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신상의 꿈을 꾸었다. 꿈에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박살내버렸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내 위에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
3장에서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는다고, 일곱 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 속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구해주셨다. 이때라도 하나님 앞에 항복하며, 회개했어야 하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잊지 아니하신다. 사49:15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고 원망한다.
하나님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여, 축복된 길로 나가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해 주신 목적은, "…곧 인생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17)고 하였다.
인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와 같은 꿈을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셨다.
2.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알게 하였나요?
①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
느부갓네살 왕의 권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주인 되시어 다스리신다. 우리도 언제나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위에 계심을 기억하기 위해, 머리에 모자 같은 키파를 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위에 계심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이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위에 계셔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나의 모두를 살피고 계신다, 또 하나님께서 내 위에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심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②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느부갓네살 왕이 잘나서, 바벨론 왕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③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지극히 낮은 자라도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음을 알라는 말이다.
요셉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정말 천하고 낮은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셨기에, 이방 나라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가운데, 제일 막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성군이 되었다.
나는 부족하고 힘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더 귀하게 사용해주신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기가 잘나서 큰 업적을 세운 것으로 착각했다. 교만했기에, 하나님께서 치셨다.
결론이다.
고전 10:11에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말씀하였다. 왜 실패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망한다.
멧돼지는 도토리를 참 좋아한다고 한다. 도토리를 보면 사족을 못쓴다. 그런데 멧돼지는 머리가 참 나쁘다. 도토리를 먹다가 도토리가 없으면, 도토리가 땅에서 나는 줄 알고, 자꾸 땅을 파헤친다. 먹을 것이 위에서 떨어져도, 위를 보지 못하고, 자꾸 아래의 땅만 판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우리는 멧돼지가 아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교만하면 망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은 바로 감사다. 늘 감사하며 살면, 교만함을 이기게 된다.
겸손한 사람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받는다.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겸손했다가, 돈 좀 벌고,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 하는 일이 잘되면 교만해진다.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신다. 은혜를 받았더라도, 교만하기 시작하면, 은혜가 소멸된다.
그동안 받았던 은혜가 소멸되어, 누리고 있던 복도 다 잃을 수밖에 없다.
사울 왕이 그랬고, 솔로몬 왕이 그랬다. 그러므로 겸손함을 끝까지 유지하자.
교만을 버리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이 은혜가 넘쳐나기 바란다.
누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인가?
단 4:10-18 / 다니엘
우리는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공(승리)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앙의 지조를 지킬 것인가?를 1, 2, 3장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역사의 주인이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이국만리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도전과 핍박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고, 신앙의 절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학입니다. 대표적인 묵시문학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미티안과 네로가 역사의 주인 같이 보여지는 시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의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에게 찢기기도 했고, 불에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한번쯤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사도 요한은 환상을 보고 기록하게 되는데, 그 환상의 주요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인이 당하는 핍박과 고통은 하나님이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아니 그 엄청난 박해들까지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역사의 마지막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작과 마지막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대표적 묵시문학서인 다니엘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은 망했습니다. 성전은 허물어졌습니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생존이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다니엘서는 그것에 답을 주는데, 그 답 가운데 하나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느부갓네살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국 만리에서도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장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여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3절 느부갓네살의 찬양, 4-9절 다니엘이 등장하게 된 동기, 10-18절 느부갓네살이 꾼 꿈의 내용, 19-27절은 그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 28-33절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 꿈이 이루어지는 모습, 34-37절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결론이 무엇일까요?
결론은 느부갓네살의 찬양에 있습니다. 4장은 느부갓네살의 찬양에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런 구조를 문법에서 '수미쌍관형식'의 구조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통치를 반복적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누구입니까?
그는 무력으로 세계를 통일한 왕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권세가 느부갓네살에게 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왕중 왕입니다.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통치자요, 영원한 권세자이시다.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장 마지막 절, 37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마지막 고백이 결론입니다.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교만하게 행하는 자가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세상의 주인처럼 생각했던 것이 교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서 그리고 그 꿈의 해석과 그 꿈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 왕이 주인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다. 이 세상은 그분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4장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표현입니다. 2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17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24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25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32절 "지극히 높으신 이…", 34절 "지극히 높으신 이…". 이 표현이 모두 여섯 번 나왔습니다.
이 땅에 왕권이 가장 높지 않습니다. 왕권보다도 더 높고 위대한 권세가 있는데, 그것은 하늘의 권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요, 다스리심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슬픔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시대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의심받는 시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을 보십시오. 인간들이 만든 과학문명, 생명공학, 유전공학, 우주개발, 정보통신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마치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며 인간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일입니다.
인간이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고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낙태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함부로 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 이제는 복제인간까지도 만들 수 있는 수준에까지 과학이 발전했습니다 - 마구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후에 초래될 엄청난 혼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70 - 80년대 우리는 산업화, 공업화를 통해서 무분별하게 개발했습니다. 산도 깎아 버리고, 강도 땜으로 막기도 했고, 구불구불하던 곳을 똑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중장비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소리가 더 높습니다. 인간이 기술적으로 할 수 있다고 다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해서는 안됩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꿈과 다니엘의 해석, 그리고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교만한 느부갓네살"을 길들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교만했느냐?
그것은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이 왕궁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자기 왕국을 보았습니다. 세계 각국을 정복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거기에 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절입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했습니다. 이 한 절에서 '나'라는 말이 네 번 등장합니다. 자화자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와서 튼튼한 성을 쌓았습니다. 수문을 만들어 유프라데스 강물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모는 것을 자기가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기에게 권력이 있다고 자기 맘대로 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돈이 있다고 자기 맘대로 써서되겠습니까? 어떤 분은 그럽니다. "내 돈 갖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내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내 것이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이 나라가 왕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통치자가 있는데, 그분을 인정할 때, 나라가 튼튼해진다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내 맘대로 다 했다. 이것은 내 능력이고 내 권세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31-32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누구에게 나라를 맡기고 안 맡기고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이다 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재능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하는 모든 것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주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 형들을 만났을 때,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5-8).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꾸미시고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이제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그 동안은 늙으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용서하는 척했지만, 이제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보복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정죄하고, 스스로 잘 낫다고 자랑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이 고난을 만났을 때 고백한 말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에 모자를 꼭 쓰고 다닙니다. 모자가 없는 사람은 수건이라도 써야 회당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자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머리 위에 항상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 나보다 높으신 분이 있다. 나보다 위에 있는 분이 있다.' 그런 의식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항상 나보다 높고 위대하신 분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나보다 높으신 분이 나를 보고 있다. 그분이 나를 장차 심판(판단)하실 분이시다. 나보다 높으신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느부갓네살 왕의 꿈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꿈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길조고 하나는 흉조였습니다. 그는 땅 중앙에 서 있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계속 자라서 땅 끝에서 보였습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다웠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이 먹을만했습니다. 거기에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쉬었습니다.
또 하나의 꿈은 한 순찰자에게서 시작됩니다. 그 순찰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가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나뭇잎을 떨어버리고, 열매를 헤칩니다. 거기서 짐승들을 쫓아버립니다.
이 나무는 느부갓네살 자신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는 세계를 정복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 그의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권세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25절)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계를 다스리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착각이 교정되는 순간 그의 나라가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해석하면서 왕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27절입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이 충고는 이국만리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을 핍박하던 권력자들에게 하고자 하는 충고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죄를 사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던 일을 그만 두라"는 말입니다. 하던 일을 그만 두라. 즉 악한 행실을 그만두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만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까?
포기해야할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벌렸다면, 그것은 그만두어야할 일입니다.
워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긴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에 지루하고 따분하니 사람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워치만에게 "지루한데 함께 합시다" 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워치만은 "나는 손이 없어서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니 선생님 농담도 잘 하시네요. 그 손은 무슨 손입니까? 손이 있으면서 무슨 손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워치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손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쓸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기뻐하지 않을 일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재능, 능력, 권세, 재물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
단 4:1~3, 10~18, 28~37 / 오재현 목사
1.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 “나”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을 두 자로 줄이면?” “또 나”
“그럼 석 자로 줄이면?” “역시 나”
“이번에는 넉 자로 줄이면?” “그래도 나”
“다섯 자로 줄이면?” “다시 봐도 나”
‘내가 제일이다’ 는 생각은 때로 자존감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 교만하게 비치기도 합니다. 내가 제일이니 나 혼자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줄도 모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주전 6세기에 애굽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세계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으니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만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제일이라고. 내 능력과 권세를 당할 자 나와 보라고.” 큰 소리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느부갓네살왕은 오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세계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왕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해주셨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이 꾼 두 가지 꿈이 나옵니다.
하나는, 2장에 나오는데 큰 신상이 깨어지는 꿈입니다. 큰 신상은 세상 나라를 말합니다. 이 꿈에서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꿈에 대한 해석을 다니엘로부터 듣고도 느부갓네살왕은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꿈을 꾸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꿈은 느부갓네살왕 개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왕은 스스로의 힘과 권세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루 아침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짐승처럼 행동합니다. 대제국의 왕이 짐승처럼 행동하는 정신병에 걸린 것입니다. 졸지에 왕궁에서 쫓겨나 들에서 들짐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면서 이슬에 몸을 적시며 삽니다. 7년간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정신이 돌아오게 하셨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게 해주었고 왕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4장은 느부갓네살왕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받은 충격적인 경험을 그가 다스리는 전 세계 나라들과 지방과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신앙간증문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절입니다.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부갓네살은 놀라운 능력으로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세상 나라 임금들은 일시적으로 통치하고 당대에 그 통치가 끝이 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대를 이어 다스리십니다. 왕이 짐승이 되고, 다시 왕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통하여 느부갓네살왕은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성공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2. 이제 느부갓네살왕이 꾼 꿈을 좀 더 상세히 살펴봅시다.
땅의 중앙에 큰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하늘에 닿을 정도입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가 많이 열려서 세상 사람들의 식물이 되었습니다. 들짐승이 나무 그늘에 있고, 새들이 가지에 깃들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내려와서 외쳤습니다. “나무를 베어라. 가지를 찍고 잎사귀를 떨고 열매를 버리고, 짐승들과 새들을 쫓아내라. 그러나,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여매고, 들의 풀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짐승과 같이 살게 하라. 이런 고난이 일곱 때 동안 계속 될 것이다.”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주었습니다. 그 큰 나무는 느부갓네살왕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찍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지는 않고 살아있기는 하되 짐승처럼 행동합니다.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7년동안 철과 놋줄로 동여있듯이 꼼짝 못하고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풀과 같이 들에서 살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루터기를 남겨두라는 것은 느부갓네살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줄을 느부갓네살이 깨닫게 되면, 그의 나라가 다시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7절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다니엘의 충언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 재난을 겪지 않을 것이고 평안히 살게 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은 다니엘의 충언을 듣고도 하루, 이틀, 한달, 두달 그냥 지나쳐버렸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괜찮은데 뭐.” 하면서 1년이 지났습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바벨론 궁의 지붕을 거닐 때에 느부갓네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30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자기의 능력과 권세로 이 큰 왕국을 건설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이 말이 들리자 느부갓네살은 정신병이 들어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고, 발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되는 것을 우연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수많은 우연이 일어납니다. 우연히 사고가 납니다. 우연히 재난을 당합니다. 수년 전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그 지하철을 탔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우연이요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우연히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까? 왕이 짐승처럼 살게 된 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느부갓네살은 벌써 1년 동안 다니엘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지만,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짐승처럼 되었다. 단순히 보면, 우연이지만 그 과정을 잘 살펴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인간의 업적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높은 바벨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끄떡도 않을 정도로 그렇게 튼튼하던 여리고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렸듯이 인간의 자랑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빼앗아 가시면 한순간에 하던 사업, 직장 그만둘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빼앗아 가버리시면 한순간에 길바닥에 나앉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러므로 겸손합시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3.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왕을 그냥 짐승처럼 살다가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제까지 짐승처럼 땅만 내려다보고 살았던 느부갓네살, 자기 자신의 업적과 능력에만 관심을 가졌던 느부갓네살이 이제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은 곧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사람을 안드로포스(anthropos)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는 ‘위를 쳐다보는 존재’ 란 뜻입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발로 직립보행하게 했습니다. 짐승은 땅만 보고 살도록 네 발로 걸어다니게 했습니다. 땅만 보고 살면, 세상만 보고 살면 짐승같이 됩니다. 하늘을 보며 사는 경건한 사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사람,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을 사랑하여 1993년에 연변에 과학기술대학교를 설립한 김진경 박사, 그는 평양에 과기대를 설립하고자 북한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350억원을 들여 6년 전에 착공하여 올해 가을에 평양과기대를 완공할 예정에 있습니다. 그가 중국 조선족과 북한동포를 특별히 사랑하게 된 배경이 이러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러 처자식을 한반도에 놔두고 만주땅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농업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지원하였습니다. 김진경박사가 열 살 때, 아버지가 계시는 만주에 갔는데 어린나이에도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를 보게 되었답니다. 그 때 막연하나마 앞으로 이 불쌍한 동포들을 위해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후, 15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6월30일에 학도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그 당시 같이 입대한 학도병 800명 중에 17명만 살아왔답니다. 그 때 그는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답니다. 미군 군목이 전해준 요한복음이란 쪽복음을 읽으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나는 누구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가.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지금 제가 죽이고 있는 저들을 위해 평생 살겠습니다.”
이 두 사건이 김진경박사의 일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는 숭실대를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가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또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중국 연변에 과기대를 세운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람,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을 입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그의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총명이 돌아왔다는 말은 정신이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짐승에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36절을 보니까,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왕권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회복은 신앙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나와 겸손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신앙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회복되고, 사역이 회복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사업이 회복됩니다.
기도를 회복합시다. 새벽기도를 회복합시다.
말씀 묵상을 회복합시다.
열정적인 예배를 회복합시다.
잃어버린 신앙의 열정을 회복합시다.
그렇게 함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부흥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