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의 정점에서
김보라
새빨갛게 익은 폭죽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나
이불에 누워 냉장고를 쳐다본다
해바라기가 갑자기 말해도 놀라지 마
어차피 지구는 멸망할 거야
인간이 말한 거니까
아마도 이뤄질 거야
냉장고가 시끄럽다
수박은 언제까지 썩지 않고
익을 수 있을까
여전히 새들은 날아다니고
폭포는 아래로 쏟아지고
무리에는 사랑이 있는데
빙하는 잘못이 없고
잘 녹는다
아이들은 계속 태권도 학원에 다닌다
앉아 있을 미래를 위해
아이들은 미리 많이 뛰어두고
가방 안에서 녹아 붙어버린 사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로는 녹아 흐르고
공사장마다 불꽃이 튄다
사막은 아득하게 늘어나고
수박을 갈라보자
터져버리기 전에
지구가 터지기 전에
여름으로 예행 연습하듯이
마치
계단 올라가는 소리에
잠이 깨는 아이가 없는 낮
새가 날지 않고
마른 수박씨가 깨지고
풍경이 없는 날
폭풍 전야에 터트리는
빨간 폭죽같이
지구 최후의 날
수박을 두드려봐
작은북 소리가 나면 좋잖아
반으로 갈라지는 상상
어서 오세요
새로운 세상에
인사하는 상상
깨끗한 도마와 칼
그리고 수박이 있다
아직은 지구가 있다
김보라 필명 한요나
2018년 독립문예지 《베개》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시집 『연한 블루의 해변』
[심사평]
당선자의 시는 균일한 작품성을 보인다는 장점 외에도 요즘 시류에 편승하려는 기색보다는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발 디딘 공간, 스스로 사유하고 움직이는 생활의 보폭을 맞춰 가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처음에는 「기도손」에 눈이 갔다. “자살과 예배를 동시에 생각했다”라는 섬뜩한 문장을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촘촘한 ‘기승전’이 필요한지 알기에 이 작품이 가진 건축미에 마음을 주게 됐다. 그러다가 「수박의 정점」에서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새빨갛게 익은 폭죽을 / 어떻게 보관해야 하나”라는 구절부터 시작해 지금 이 시대 인류의 가장 숙명적인 난제를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탄탄하게,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뜨개질해 나가는 점이 믿음직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로 툭 던지지만 그 속에는 어마한 순수와 진정성이 느껴지되 경쾌한 리듬마저 담겼다. “깨끗한 도마와 칼 / 그리고 수박”. 이 폭염의 계절을 건너기에 더없이 시의적절한 문장이 아닐까.
- 심사위원 김안녕(시인)
예심을 통과한 20편의 작품을 앞에 두고 5명의 심사위원들이 얼굴을 맞대었다. 인상 깊게 읽은 작품들과 중복되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대상 범위를 좁혀가는 중, 외부 기류에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색깔을 지켜가는 응모자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였다.
한 편, 한 편을 내려놓는 고심 끝에 마지막까지 논의된 후보 작품은 (1)「어느 저녁의 무게」 외 8편과 (2)「오리 수집가의 꿈」 외 6편이었다. 「오리 수집가의 꿈」 외 6편은 의인화된 대상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점과, 규격화된 대상을 새로운 이미지로 펼쳐 보이는 장점이 돋보였지만, 작품 간의 편차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세심하면서도 발랄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준 「어느 저녁의 무게」외 8편은 미학적으로 높은 완성도와 고른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중, 「수박의 정점에서」는 식탁 위의 수박에서, 행성과 인류로 나아가는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과 부드럽고 단단한 힘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의견 일치로「수박의 정점에서」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말의 무게를 아는 수상자가, 자신만의 오롯한 세계를 구축 해가기를 기원하며 축하를 보낸다. 아울러 제27회 수주문학상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준 모든 응모자 분들께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유미애(시인)
등단과 미등단 상관없이 투고작을 대상으로 심사하는 수주문학상의 전통은 올해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꺼번에 100명 응모자의 시 700편을 읽는 일이 전혀 즐겁지 않고 괴로웠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시가 운문이며 압축과 정제(整齊)의 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고려한 시가 아주 드물었습니다. 거의 대다수 현역 시인 혹은 예비 시인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다듬어 쓰지 않고 그냥 주저리주저리 혹은 횡설수설 독백체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시인의 의도가 파악되면 소통이 이뤄지므로 안도할 수 있었지만, 이 시를 쓴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가 태반이었고, 이것이 한국 현대 시의 기류라면 큰일이라고 걱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제가 없는 시, 별 내용이 없는 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이런 중얼거림이, 주절댐이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주어진 100명 중에는 「금이 간 곳에서」 외 6편을 투고한 분의 시를 가장 좋은 작품으로 천거했지만, 다른 네 분의 동의를 얻지 못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습니다. 생태 환경문제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끈질긴 탐색에 주목했습니다. 심사위원이 주목한 작품 중에 「오리 수집가의 꿈」 외 6편을 쓴 분이 있습니다. 언어 구사가 아주 재치 있고 세련되어 있어 시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말이 많고 말을 잘하는 분인데 주제가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시가 때로는 이 세상에 대한 발언일진대 대체로 독백에 가까웠습니다.
5명의 심사위원이 2명씩 최종에 올린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는 분은 「수박의 정점에서」 외 8편을 투고한 분이었습니다. 9편 시가 다 언어의 정련과 주제 의식의 심화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최종에 올린 2명 중에 포함된 시인이라 당선 결정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시어의 선택과 배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신중한 언어 구사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이 시대에는 구습(舊習)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행 구분, 연 구분도 신경을 쓰면서 행하였고 문장 하나하나가 심사숙고의 결과임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매 편의 시가 다 메시지가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인간과 세계와의 불화를 지양, 극복하려는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기독교적인 이미지가 간혹 느껴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박의 정점에서」가 보여준 기동력과 순발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우리네 일상의 삶에서 다수인의 꿈을 길어 올리려는 끈질긴 시도가 보였습니다. 「여름 태풍의 기색」과 「모래 인간」은 인간 생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읽게 했습니다. 「어느 저녁의 무게」와 「파랑 동경」에서 시인은 문명과 자연의 공존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수주 변영로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만든 이 상의 취지에 가장 근접해 있는 분이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 심사위원 이승하(시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올해 수주문학상에 응모된 작품들은 활달한 상상력, 세련된 이미지와 문장을 구사하며, 갈수록 산문화되는 경향이 눈에 띄었습니다. 인적 사항이 제거된 응모작을 읽고, 1차 심사를 진행하였고, 5명의 심사위원은 각각 4편씩 추천하였습니다. 20명의 작품들이 2차 심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본심은 20명의 작품들을 모두 정독한 후 각자 논의할만한 작품을 2편씩 추천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으로 접수번호 221번과 423번의 응모작이었습니다. 221번의 응모작은 삶의 문제의식을 포착하고 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감각과 사유가 새로웠습니다. 기성 시단의 농후한 산문성에서 떨어져나와 말해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시적 태도가 믿음직스러웠습니다. 특히 당선작으로 선정한 <수박의 정점>은 “새빨갛게 익은 폭죽/어떻게 보관해야”하는지, 그 과정을 질문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언어 감각이 탁월했습니다. 또한 시적 대상과 미적 거리를 잘 조절하여 일상의 사소한 경험들까지 엮어내는 시적 사유에서 그 개성이 도드라졌습니다. 이 응모자의 다른 작품들, <기도손>과 <여름 태풍의 기색>도 서정적인 울림으로 읽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출렁이게 했습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손에서 놓기 아쉬웠던 작품 423번의 응모작 <가지 진료소>였습니다. 식물적인 상상력과 감각적인 시적 사유로 독특한 시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탁월하였습니다. 다른 응모작들이 이 작품을 뒷받침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앞으로 시적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과 주제 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면, 시적 완성도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시의 실패 속으로 뛰어들길 바랍니다.
시는 표현할 수 없고 표현되지 못한 것을 언어화, 감각화하는 예술입니다. 김수영식으로 말하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글쓰기입니다. 이번 수주문학상 응모자들은 저마다 감동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감동은 삶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감동 잘하는 사람이 글을 못 쓸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의 글쓰기를 통해 삶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응대할 것인가 계속해서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 심사위원 이병일(시인,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총 498명의 응모자와 4,061편의 시들이 접수된 27회 수주문학상을 심사하면서 느낀 것의 하나는 1차 심사를 거쳐 올라온 어느 작품을 뽑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작품 수준이 높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최고 득점자 1인만을 선정해야 하는 문학상의 규정상, 거기서 한 편의 시만을 고른다는 것은 심사위원 모두에게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작 선정을 위한 방법과 기준에 대한 논의를 거쳐 점차 그 대상범위를 좁혀 갔는데, 최종적으로 「가지진료소」외 9편과 「수박의 정점에서」외 9편을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이들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시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 시적 역량을 넉넉히 갖추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먼저 「가지진료소」의 경우, 시적 주체의 판단이나 개입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을 세부적으로 데생하듯 묘사해가는 사물시 또는 즉물시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또한 「수박의 정점에서」의 경우, 지구생태계 변화에 따른 기후난동과 인류 생존을 문제를 다루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얘기를 풀어가는 극적 아이러니 어법과 그에 걸맞는 적절한 비유와 침착한 사유가 단연 돋보이는 시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수박의 정점에서」를 당선작으로 하는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단적으로 그것은 「가지진료소」의 경우 그런 시적 경향이 보여주는 어쩔 수 없는 함정이랄까.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일상적인 지평에서 사유하고 있는 「수박의 정점에서」와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심사 결과에 상관없이 최종심에서 아깝게 밀려난 「가지진료소」의 응모자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동시에 이미 뛰어난 시적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제27회 수주문학상 수상자에게 격렬한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임동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