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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4일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인간은 각자의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굶주리고 목마르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주제로 이끄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내어주셔 교회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너지가 떨어져 지쳐감을 의미합니다.
언제 사람이 지칠까요? 불안할 때입니다.
안 좋은 감정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처지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면 사람이 지치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공포를 피하기 위한 피신처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함’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고 더는 작가로서 좋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 KBS 아나운서인 이혜성 씨는 똑똑하고 예쁘면서도 ‘인정중독’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배가 고파서 폭식증에 시달렸습니다.
먹으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정받음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진주를 들고 시장에서 그것을 팔려고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렇게 귀한 물건을 들고 다닐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에게 그 진주를 준 부모만이 그 진지의 가치를 압니다.
우리 각자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라는 진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 봉헌한다는 말은 그분만이 그것을 5천 명을 먹이실 만큼의 가치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 곧 의미 치료를 한국에 소개한 책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 공동 저자 박상미 교수는 24세 때 수돗물이 얼 정도로 단열이 안 되는 옥탑방에서 인생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자친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몰래 사귀고 있었으며 가난은 그녀를 더는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이틀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깼을 때 그녀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자기 죽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죽기를 원했던 그녀는 “살려주세요!”를 연발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주어진 은총이라고 믿으니 그 삶을 주신 분이 왜 자신을 창조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처럼 심리적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의미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였고 그것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 살과 피는 내 빵과 물고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창조자로 믿고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뜻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저도 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며 불만에 싸여있을 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제야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더는 신학교 생활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이유는 나를 바쳐 목숨을 걸고 수행할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찾지 못한 이유는 나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줄 존재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바로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이 우리가 당신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알려주는 창조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4일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성찰 없는 성공이 곧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사무실에 직원이 없는 관계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과 애환을 120퍼센트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대체로 안 그러시지만, 일단 내려 까고 시작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주방에서, 분리수거장에서, 들판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있노라면, 일단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도 느낍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척결하고 극복해야할 측면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 요식 업소 종사자들, 그 얼마나 소중한 일에
종사하고 계시는데, 보다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직종에 상관없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과 내면, 영혼과 본질을 우선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럴싸한 말과
결과에만 몰두합니다.
그 끝은 언제나 실망과 허탈함과 좌절감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강론>
(2024. 8. 4.)(요한 6,24-35)
<물도 밥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1) 여기서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기적의 빵’을 먹었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생각만 하면서 나를 찾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의 신원을 보증해 주셨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기적만은 아니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계시하신) 표징이었는데, 사람들은 배불리 먹은 것만 생각하느라고, 그 일이 표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2)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앞의 4장의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요한 4,11)”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배가 고플 때 밥을 찾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생존하려면 물도 마셔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무엇’이 더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습니다.
그 상황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고, 여자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그 여자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갈증과 허기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신 것은 단순히 ‘몸의 갈증’ 때문이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갈증과 허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하느님의 생명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없는데, 아마도 분명히 그 여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 덕분에 인생의 갈증과 허기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배불리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허망하게 끝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과 생명수’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3) ‘기적의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과(요한 6,15)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일은, 비록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대부분 정말로 먹고살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즉 날마다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예수님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로 배고픔의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들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또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잘 모르면서 함부로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사도로 인정하면서 사도단이 특별히 바오로 사도에게 당부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9-10).”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당장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이고...
언제나 항상 ‘사랑’이 먼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