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기일구(當機一句)
기틀에 다다라 척 나오는 일구(一句)!
이것이 가장 소중하다. 당기일구(當機一句)가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당대(唐代)의 선지식들인 조주(趙州)ㆍ운문(雲門)ㆍ임제(臨濟)ㆍ덕산(德山) 선사 같은 분들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봉(機鋒)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글[文章], 송(頌), 염(拈), 평(評) 등은 시간을 두고 사량(思量)하여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면전(面前)에서 즉시에 하는 문답은 사량이나 조작(造作)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당기일구(當機一句)의 기틀을 갖추지 못했다면, 접인(接人)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알았다고 하는 것도 모두 망령된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고인들의 전지(田地)에는 꿈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요즈음의 선지식들이 당기(當機)에 다다라 주저하게 되는 것은 견처(見處)도, 살림살이도 다 고인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무변대도(無邊大道)의 불법 진리를 바로 알려면 고인들의 법문 하나하나를 다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고인들의 살림살이가 따로 있고 현재 우리가 공부한 살림살이가 따로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견성법(見性法)이란 항상 동일한 것이어서, 만일 서로 다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어느 한 쪽에 허물이 있는 것이다.
그간 무수한 도인들이 각자가 깨달은 경지(境地)를 기량(機量)대로 써왔다. 제아무리 약삭빠른 이라도 엿볼 수 없고 사량ㆍ분별을 붙일 수 없게끔, 무진삼매(無盡三昧)의 공안을 베풀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공안에 대하여 확연명백하지 못할 것 같으면, 크게 쉬는 땅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고, 고인들과 같은 경지를 수용할 수도 없다.
그러니 모든 참학인(參學人)은 고인의 경지에 근간(根幹)을 두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베풀어져 있는 공안(公案)의 그물을 다 뚫어 지나가야 한다.
반산 보적(盤山寶積) 스님이 남달리 발심(發心)하여 공부에 전력을 쏟던 중, 어느 해제일에 다른 처소로 가던 길이었다. 걸음걸음 화두를 놓지 않고 가는데 우연히 시장을 지나가다가 식육점 앞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와서,
"깨끗한 고기 한 근 주시오."
하니, 주인이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차수(叉手)하면서 물었다.
"어떤 것이 깨끗하지 못한 고기입니까?"
이 말이 들려오는 순간, 보적 스님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과 여러 도인께서 설해놓으신 낱낱 법문에 활발발지(活鱍鱍地)를 얻지 못하여, 또 애를 써서 공부를 지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동구 밖을 지나가다가 상여꾼들을 만나게 되었다. 상여꾼들이 노제(路祭)를 지내고 상구(喪具)를 메면서 선소리 하기를,
"청천(靑天)의 붉은 수레는 서쪽으로 기울어가건마는, 알지 못하겠구나. 금일 영혼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상주들이 일제히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哭)을 하였다. 이 곡하는 소리에 보적 스님은 확철히 깨달았다.
그 길로 마조(馬祖) 선사를 찾아가 뵙고 문답이 상통(相通)되어 마조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알겠는가?
전(前)과 후(後)의 깨달음이 각기 어떠한 경지인가?
정안(正眼)을 갖춘 이라면, 이 경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보적 선사께서 깨닫고서 대중에게 법문하시기를,
向上一路千聖不傳(향상일로천성부전)
學者勞形如猿捉影(학자노형여원착영)
향상의 일로는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하시거늘
학자들이 공연히 애씀이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지없는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법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설령 법신변사(法身邊事)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반도(半道)에 있음이니, 향상(向上)의 일로(一路)를 알아야만 당기일구(當機一句)의 기틀을 갖추어 제불(諸佛)과 더불어 동참할 수 있으리라.
필경(畢竟)에 어떠한고?
到頭霜夜月(도두상야월)
任運落前溪(임운낙전계)
마침내 늦가을 달이
집 앞 개울에 떨어져 출렁임이로다.
첫댓글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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