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경태의 문학산책] 한국 성리학의 초석을 다진 역동 우탁(易東 禹倬)
금강일보 기사 입력 2025.08.11. 13:00, 수정 2025.08.11. 16:35
글 : 방경태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요즘처럼 가마솥더위가 지속될 때면 푸른 강이 굽이쳐 흐르고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충북 단양으로 피서를 떠나고 싶다. 그 단양에 가면 더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저속노화를 이미 칠백 년 전에 탄로가를 쓰면서 고민했던 역동 우탁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고려말 선비의 기상을 실천한 문신, 대학자, 시인이며, 한국 성리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역동 우탁의 생애와 문학적 활동을 산책하고자 한다.
◆역동 우탁의 생애와 학문
우탁의 본관은 단양이고, 본명은 탁이며, 자는 천장 또는 탁부이고,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며, 역학에 정통하여 세칭 역동이라고 부른다. 그는 1262년(고려 원종 3)에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향공진사를 지내다 남성전서 문하시중으로 추증된 우천규의 아들로서 사관이 계속 이어진 명문 선정의 후예이다.
그는 안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7세에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29세의 나이로 지공거 정가신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그가 과거 급제 후 처음으로 얻은 직책은 영해군의 사록이었다. 이때 영해군에는 팔령이라는 귀신을 숭배하는 미신이 있었는데, 우탁은 영해의 사록으로 부임하자마자 그 팔령이라는 귀신을 제사 지내는 신사를 부수어 바닷속에 넣어 버렸고, 미신 숭배를 근절시켰다.
우탁은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40세 이후에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직책인 감찰규정에 제수된 바 있으며, 벼슬을 사임하고 단양에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성균관 제주를 제수받게 되어 정주성리학을 강명하여 여말의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감찰규정 재직시 그가 충선왕에게 지부상소를 올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그는 성균관 관주 자리를 끝으로 늙음을 핑계로 물러나, 지금은 댐의 건설로 수몰된 안동시 와룡면 선양동으로 내려와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면서도, 조정에 있는 것과 똑같이 스스로 모든 행동을 흐트러짐 없이 법도에 맞게 했다.
후에 사람들은 우탁이 은거했던 마을을 지삼의, 또는 지삼리라고 불렀다. 도학과 충의와 절조의 세 가지 덕을 갖춘 우탁이 만년을 보낸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안동에는 지금도 역동사원, 영호루, 구계서원, 역동묘 등 역동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우탁은 1342년 2월 7일(고려 충혜왕 3)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도학과 문행이 뛰어난 점이 높이 평가되어 문희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역동은 일찍이 당대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회현 안향의 문하에서 수업받았는데, 역동의 스승이었던 회현은 항상 말하기를 “문하에 수업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고 있으나 그 도를 깨닫고 이어받는 선비로는 오직 역동을 비롯하여 덕암 신천, 상당 백이정, 국재 권보 등 네 사람뿐이다.”라고 했다. 또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탁을 나와 똑같은 스승으로 섬기라"라고 당부할 정도로 역동의 학문적 깊이와 그의 학문적 위상은 대단했다.
역동은 고려말 충렬왕에서 충혜왕까지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간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권세에 휘둘리지 않는 청렴한 지식인이었다. 당시 불교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학문과 이념으로 유학의 도통을 부흥시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그의 제자들이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동방사문연원록』에서는 신라대의 도학 연원과 도통 관계를 ‘설총 → 최충 → 김양감 → 안향 → 우탁 → 정몽주, 이색’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만큼 역동의 학문과 선비적 학행을 높이 인정했다. 퇴계 이황도 친필로 쓴 역동서원 봉안문에서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강학의 밝고 진퇴의 정당함이 뛰어나니 후학의 귀감으로 백 세의 묘향을 받을 분”이라며 역동의 학문적 업적과 인품을 높이 찬양했다. 이처럼 역동은 단순한 학자를 넘어, 고려 말 혼란스러운 시대에 새로운 사상적 길을 제시하고,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반을 다진 위대한 스승이었다.
◆역동 우탁의 문학과 단양 유적
역동의 고향인 단양에선 그의 발자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신원리에는 역동이 태어난 곳을 기념하는 ‘태지비’가 있고, 태지비 건너편에는 우탁의 생애와 학문적, 정치적 공헌을 상세히 기록한 ‘사적비’를 세워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단양 적성면 하진리에는 역동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단암서원의 유허지가 남아 있다.
또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은 역동의 표상과 같은 곳이다. 『단산읍지』는 “팔곡은 구곡 2리 위에 서벽정과 사선대가 서로 보이며 물이 맑고 넓은 곳으로 고려 때 역동 선생이 사인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와서 담수에 배를 띄워 놀았으므로 마을 이름을 사인암이라고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안내 게시판에는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재광이 역동을 흠모하여, 역동이 사인이라는 벼슬에 있을 때 이곳에 휴양으로 자주 찾았다 하여 사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역동의 시 중에서 「강행」은 사인암을 노래했다. “이슬맞은 단풍잎이 붉게 땅 위에 떨어지며/ 석담에 바람일어 흔들리는 푸른하늘/ 사이 숨겨진 외로운 마을 아물거리며/ 구름밖 우뚝솟은 산봉우리 연이어 있네.” 수미 양구가 빠진 이 시를 통하여 당시 역동의 심회와 사인암의 정경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인암에서 역동 우탁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바둑과 장기를 두며 소요한 흔적으로 아직도 바위에 새겨진 바둑판과 장기판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적을 기록한 ‘역동우선생기적비’가 역동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남조천이 흐르는 운선계곡에 깎아지른 절벽 사인암은 역동 우탁의 기백과 강직한 성품을 보는 듯하다.
역동 우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 사인암의 자연 속에서 풍류를 읊고 노닐다가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들이는 패륜을 저지르자, 우탁은 이에 분개해서 도끼를 들고 궁궐로 향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역동 우탁의 지부상소로 후에 같은 충청의 선비 중봉 조헌과 면암 최익현으로 이어진다.
역동은 고려말 당시 새로운 학문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정전이해』, 『초학계몽』, 『가례요정』, 『사우도수』, 『역론』, 『역설』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아쉽게도 조선 초기 화란으로 인멸되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역동에 관한 일차자료로는 5언율시 「잔월」, 7언율시 「제영호루」와 「강행」, 그리고 국문학사상 작가가 분명한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인 탄로가 등 시조 3수가 있다. 서간문인 「여혹인서」는 61자로 된 짧은 글이며, 단양 사인암벽에 역동이 친필로 새긴 '탁이불군, 확호불발'(卓爾弗群, 確乎不拔)이라는 금석문이 그의 문학적 편린을 보여준다.
①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②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져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①의 시비는 사인암 인근 청련암 삼성각 돌계단 입구와 ‘역동우선생기적비’ 입구 좌측에 있다.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서라도 젊어지고 싶은 인간의 솔직한 소망을 해학적으로 노래했다. ②의 시비는 사인암 인근 ‘역동우선생기적비’ 입구 우측에 있다. 색채와 자연을 활용한 참신한 비유적 표현으로 젊음을 되찾고 싶은 소망을 여유와 관조적 자세로 노래했다. 이렇게 우탁의 시조들은 ①② 모두 동서고금이 공감할 수 있는 늙음을 한탄하면서 저속노화하고 싶은 주제와 소재를 담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으로 인생무상을 느끼며 탄식하면서도 인생을 달관한 듯한 관조적 자세로 여유와 유머를 보여주고 있다.
◆역동 우탁의 역사문화적 의의
역동 우탁은 고려말의 정치적 혼란기에도 원칙과 도리를 지키며,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단순한 문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유학자로서의 신념과 실천을 겸비한 실사구시의 정신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권세와 물욕을 쫓지 않고,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인격의 수양에 힘쓴 참된 선비의 전형으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단양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인간과 학문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 성리학의 초석을 다진 충청의 선비요, 고려의 대학자이며, 조선 유학자의 큰 스승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삶과 문학을 고전의 지혜로 삼아 자연 속에서 깊이 사색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는 일에 매진해야겠다.
사인암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