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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성경에도 어머니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누가 가장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하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어머니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에 어머니는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교만해 하는 부류입니다.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에게 대한 배신이기도 했지만, 먼저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용없음을 알고 십계명 판을 깨버렸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경의 어머니는 모세처럼 보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당연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곧 계명이 쓰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나아만과 같은 인물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 나병이 고쳐지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그런 시시한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나아만이 더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했을 텐데 쉽다고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를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엘리야의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켜지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진정한 성경 해석자는 성경 말씀을 본인도 지키고 다른 이들도 그대로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에게 먼저 순종할 수 있어야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자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단계입니다.
참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쪼개져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싸울 때 진짜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아기를 쪼개보라고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라면 그래야 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성경 해석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지닌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가 되는 예식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예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진짜 당신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성경을 쪼개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셨지만, 사람이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어머니가 모세이고 성경의 어머니가 가톨릭교회임을 잘 압니다.
성경 계명의 일점일획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진리가 인간의 이해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안 받아도 된다고 교회가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부분만을 잡아서 그것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면 이단에 빠집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지만,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선지해장국을 먹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 있는 해석자를 만나지 않으면 성경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성경을 줬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경화 과정’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생기고 교회가 그것을 정리하여 구약과 신약의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가장 처음 정해진 해가 서기 397년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400년이 지나서
정경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그 진리를 바로잡아주는 가장 완전한 권위의 해석자가 교회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이 아닌 교회에 의지하라 합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그 해석자는 분명 하느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신약이 27권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그렇게 정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할 완전한 권위를 가졌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성경 해석자들은 분명 성경의 일부분을 잘라버립니다.
어쩌면 십일조를 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회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 시각으로 온전히 성경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으로 그 해설자의 권위가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성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가장 마지막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계명들이 가장 충실한
교회가 진짜 성경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5,17-19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종래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인들의 특기였던 이분법적인 가르침, 과도한 흑백논리, 폐쇄성과 편 가르기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 사상에 깊이 빠져, 자신들만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원의 뜰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두드러진 특징이 개방적이요 통합적이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 단편적이거나 편향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잔뜩 사로잡힌 유다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할 것인지?
동료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피조물과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과몰입입니다.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은 뒷전이고, 오로지 율법 한자 한 획에
과몰입되고 혈안이 된다면 바로 율법 지상주의입니다.
율법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의 준수 여부를
이웃들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 지상 주의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지나친 성전 중심주의입니다.
물론 성전과 성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역시 거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좁디좁은 성전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 두목이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성대한 잔치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세리 두목의 집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루는 갈릴래아 호숫가 한적한 풀밭에 오 천명이나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미사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풀밭을 성전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에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비린내 나는 골고타 언덕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수많은 성당과 예배당 안에도 거처하시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주점에도 현존하시고, 노래방에도 현존하시고, 식당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 모든 장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물론 그곳에 비록 때 묻고 남루하지만 거룩함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3. 6. 수)(마태 5,17-19)
<율법 실천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여기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 자체의 완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 말에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라는 말은 “사랑은 늘 빚으로 남아 있다.”, 즉 사랑 실천은 아무리 많이 해도 늘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사랑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율법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없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은 율법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0-14ㄴ).”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십계명을 잘 지키고 단식도 자주 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잘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없이 겉으로만 잘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사랑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난 체 하려고 신앙생활을 흉내 내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랑’만 잔뜩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세리의 기도만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고, 바리사이의 기도는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그의 생활 자체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생활입니다.>
‘율법 실천의 완성’이라는 말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실천할 때 율법 실천이 완성됩니다.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해서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십계명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를 예수님께서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는 위선자가 아니고, 그가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말은 진실한 말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긴 한데, 마음 한구석에 재물에 대한 사랑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만, 재물도 사랑하는 것이 그의 부족한 부분입니다.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그가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서 그냥 예수님에게서 떠나갔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이란,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처럼 사랑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주 많이 부족한 것이고, 그러면 그의 십계명 실천도, 비록 진실한 실천이긴 하지만, 불완전하고 부족한 실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