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이 적막하다
정현종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한 꽃송이>(199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상징적, 비판적
◆ 특성
① 간결한 시행으로 시상을 전개함.
② 'ㅔ'로 끝나는 각운이 부분적으로 활용됨.
③ 시적 전환을 통해 생태 문제에 대한 화자의 각성이 나타남.
④ 생태시 → 환경 오염의 문제를 넘어서서 기존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시들을 일컫는다. 즉,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인간과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 등을
담고 있는 시이다.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가을 햇볕에 ~ 눈부신 것 천지인데 → 화자가 가을날 들판의 풍요로운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부분이다. 풍요롭고 찬란한 가을 들판의 모습을 주로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 그런데, ~ 메뚜기가 없다! → 시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으로, 가을 들판에 대한 화자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적막한 들판 속에서 화자는 가을 들판에 당연히 있어야 할 '메뚜기'의 부재를 발견하고 있다.
* 오 이 불길한 고요 → '고요함'이 부정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그런데 고요함을 불길하다고 표현한 것은 메뚜기의 부재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생태 문제와 심각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불안해 하는 것이다.
*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 생태계는 하나의 고리로 엮어져 있고, 모든 유기체가 '생명의 황금 고리'이다. 그런 '황금 고리' 중의 하나인 '메뚜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의 말줄임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 제재 : 메뚜기, 가을 들판
◆ 주제 : 생태계가 파괴된 현실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가을 들판에서 메뚜기의 부재를 발견함.
◆ 2연 : 생태계가 파괴된 현실을 깨달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쉽고 간결한 언어를 통해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풍요로운 가을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따스한 가을 햇볕과 상쾌한 가을 공기 속에서 가을의 정취에 빠져 있으며, 들녘에 익어가는 벼를 보며 가을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이때 화자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달리 들판이 지나치게 적막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요함은 화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고, 화자는 그 이유가 '메뚜기'의 부재 때문임을 알아낸다.
그런데 '메뚜기'는 이제까지 농사를 망치는 해충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메뚜기'의 부재는 기쁘고 반가운 일일 수도 있지만 화자는 이 고요함을 불길하다고 말한다. '메뚜기'의 부재는 생태계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생명의 황금 고리'라는 말을 통해 모든 생명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 연결 고리의 일부인 '메뚜기'가 사라졌으니 이제 그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생태계 전체가 파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시에는 '메뚜기'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단지 '메뚜기'의 부재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갖는 생태학적 의미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 때문에 '메뚜기'가 사라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은 농작물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농약을 과도하게 사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농약의 독성이 '메뚜기'를 전멸시킨 것이다. 즉, 이 시는 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의 과도한 욕심을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 시어의 대조적 이미지
이 시는 매우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생각이 여러 단계에 걸쳐 변하고 있다. 우선 화자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가을 들판의 풍경을 즐긴다. 하지만 곧 들판의 적막함을 발견하고 그 이유로 '메뚜기'의 부재를 찾아낸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즐기던 마음에서 급격하게 변화한 것이다. 시상의 전환이 뚜렷하게 나타난 부분이다. 그 다음은 '메뚜기'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데, 그것은 단순히 '메뚜기'라는 곤충의 멸종이 아니라, 생태계의 유기적인 연결 구조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화자는 가을 날의 풍경에 도취되었던 마음에서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위태로운 생명의 고리
시인은 가을 들녘에서 느끼는 '불길한 고요'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단순히 '메뚜기'의 부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다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생명의 황금 고리'가 존재의 사슬에 대한 비유라면, 존재의 사슬이 끊어짐은 곧 전체 생태계의 구성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메뚜기가 없으면 메뚜기를 먹고 사는 새들이 줄어들 것이요, 새들이 줄어들면 새를 먹이로 하는 잡식 동물이 줄어들 것이요, 새가 주식으로 하는 곤충들은 더욱 창궐할 것이요, 인간은 더 많은 농약을 사용해 해충을 죽일 것이요, 벼에 침투한 농약의 성분은 인간의 몸속에 쌓여갈 것이요, 따지고 보면 한이 없다. 그리고 이 순환의 고리가 악순환되면서 결국 인간에 대한 피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으리라. 시인은 들판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끔찍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생명의 황금 고리'에 대한 인식이 단순한 경고의 메시지를 넘어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작가소개]
정현종 : Chong Hyon-jong시인
출생 : 1939. 12. 17. 서울특별시
학력 : 연세대학교 철학과 학사
수상 : 2015년 은관문화훈장, 2015년 제19회 만해문예대상
경력 : 201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
2002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 방문교수
작품 : 도서, 기타
1939년 12월 17일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60년대 사화집』(1965), 『사계(四季)』(1966) 등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했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초기시는 전후의 허무주의, 토착적 서정시를 극복하고, 시인의 꿈과 사물의 꿈의 긴장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의 시는 고통/축제, 물/불, 무거움/가벼움, 슬픔/기쁨 등과 같이 상반되는 정서의 갈등과 불화를 노래하면서도 현실을 꿈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정신의 역동적 긴장을 탐구하였는데, 이러한 시적 탐구는 제2시집 『나는 별 아저씨』(1978), 제3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까지 지속된다.
「고통의 축제」, 「공중에 떠 있는 것들 3」, 「술잔을 들며」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제3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를 고비로 하여, 그는 현실과 꿈의 갈등보다는 생명현상과의 내적 교감, 자연의 경이감, 생명의 황홀감을 노래하면서 갈등보다는 화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관심의 변화는 제5시집 『한 꽃송이』(1992)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문명과 인공(人工)은 인간을 억압하는 반면, 자연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라는 내용의 시 「자(尺)」는 그의 시적 관심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시는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새로운 현대시의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밖에 『세상의 나무들』(1995), 『이슬』(1996), 『갈증이며 샘물인』(1999), 『견딜 수 없어』(2003), 『광휘의 속삭임』(2008)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시집 외에도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1974), 『숨과 꿈』(1982), 『프로스트 시선』(1973) 등을 비롯한 여러 산문집‧시론집‧번역서를 냈으며, 『고통의 축제』(1974)를 위시한 여러 권의 시선집이 있다.
학력사항 : 연세대학교 - 철학 학사
경력사항 : 1965년 ~ 60년대 사화집 동인 활동, 1966년 ~ 사계 동인 활동,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교수
작품목록 : 사물의 꿈, 고통의 축제,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관심과 시각,
시의 이해,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거지와 광인, 나는 별 아저씨,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생명의 황홀,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이슬
갈증이며 샘물인, 환합니다, 견딜 수 없네, 교감, 천둥을 기리는 노래
초록 기쁨, 고통의축제2
[네이버 지식백과] 정현종 [鄭玄宗]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