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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현호색이란 낯선 이름의 야생화가 눈길을 끈다. 꽃 이름을 검색해 보니 라틴어 학명 코리달리스(corydalis)는 종달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왜 종달새를 닮았다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됐다. 꿀주머니 끝부분이 새의 얼굴이고, 벌어진 꽃잎은 꽁지 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영락없는 종달새 모양이었다. 어린 새가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 같기도 하고, 봄날 청보리밭 위로 날아다니는 종달새 합창단이 지지배배 노래하고 있는 듯했다.
계곡 끝에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우화루(雨花樓)가 나타난다. 강원 고성에 있는 금강산 화암사는 벼 화(禾) 자를 쓴 ‘화암사(禾巖寺)’다. 절 뒷산에 벼를 베어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모양의 바위(禾巖)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완주 화암사는 꽃바위(花巖)가 있나 보다. 화암사 정문에 서 있는 우화루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이 우화(꽃비)처럼 내렸다는 불경 말씀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우화루 2층 누각에는 창문이 나 있는데, 마침 비가 내려 창밖 나무에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다.
우화루 포토존.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화암사 극락전에는 새벽에 저절로 울려 스님을 깨운다는 전설의 동종이 있고, 우화루에는 왕방울만 한 눈을 가진 목어가 달려 있다. 우화루 옆 작은 문에 달린 연꽃은 입소문 난 포토존이다. 역광이 들어오는 실루엣을 활용하면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 내 사랑’이라는 시에서 ‘잘 늙은 절 한 채’라고 화암사를 표현했다. 적묵당(寂默堂) 마루에 앉아 네모진 마당을 바라보며 이 절이 늙어간 세월을 헤아려 본다. 안 시인은 마지막 구절에서는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로 끝맺었다. 어딘가에 숨겨두고 나 혼자만 가끔 찾아오고 싶은 절이란 뜻이리라.
●역사와 문화가 만나는 길
우석대 ‘W-SKY 23 문화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호남평야의 노을.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완주 삼례읍에 있는 우석대에는 23층 대학본부 건물이 있다. 도심에서야 별거 아니지만 사방이 평야인데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존재감이 대단하다. 25일 이 건물 옥상에 ‘W-SKY 23 문화전망대’가 문을 열 예정이다.
루프톱에 올라가 보니 실제 360도 방향으로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완주 만경강 유역뿐 아니라 전주와 익산 도심 풍경, 정읍 갈재와 부안 내변산, 새만금 일원까지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완주 마한 유적과 익산 왕궁리 유적, 동학 삼례광장 같은 역사 유적지도 펼쳐진다.
지역마다 랜드마크 전망대를 세우는 게 유행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펼쳐진 지평선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창가에는 경치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중앙무대 계단식 좌석에서는 100명이 둘러앉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완주군은 수백억 원을 들여 랜드마크를 짓는 대신 이미 국내 대학 건물로는 최고 높이인 우석대 대학본부 옥상을 전망 시설로 변신시켰다.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이 관광을 위해 협력한 좋은 사례다.
전망대에서 봤던 모악산을 찾아가 봤다. 완주 전주 김제의 경계를 이루는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모악(母岳)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모악산 아래 전북도립미술관.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모악산 치마폭에 살포시 안겨 있는 전북도립미술관은 앞으로는 드넓은 구이 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현재 이 미술관에서는 세계 예술가들이 지구 환경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Nothing to Waste(버릴 것 없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모악산 자락에 있는 구이면 안덕건강힐링체험마을에서는 한방 진료와 쑥뜸 치료, 24시간 운영되는 황토 한증막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증막 주변 산책로에는 ‘옛 금광굴’이 있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특별한 피서지로 꼽힌다.
소양면 오성한옥마을은 50가구 집 23채가 한옥과 고택(古宅)으로 이뤄져 있다. 아원고택과 오성제 저수지 소나무 등은 방탄소년단(BTS)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해 외국인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주 한옥마을이 지나치게 상업화된 반면, 오성한옥마을은 주변 산세와 돌담, 정원이 잘 어우러져 좀 더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이 마을 한옥들은 대부분 철거 위기에 있는 100∼150년 된 고택을 옮겨 와서 조성했다.
오성한옥마을 소양고택.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소양고택 플리커책방.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이 마을 소양고택은 전북 고창과 전남 무안, 경북 포항에 있던 180년 된 고택 3채를 해체해 옮겨 지은 한옥이다. 소양고택 플리커책방은 한옥의 고즈넉함이 살아 있는 서점이다. 서점 한 바깥벽에 쓰인 ‘집은 책으로 가득 채우고,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우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레몬꽃 향기 속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칠리아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오페라 도입부에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합창곡이 나온다.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종달새는 숲속에서 노래한다/오, 빛나는 눈동자의 소녀들아/새들도 짝을 찾아 날아가듯/우리도 그대들에게로 날아간다.’
레몬꽃.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레몬농장 카페 ‘본앤하이리’의 빵과 레모네이드.오렌지꽃 향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제주도에서 귤꽃 향기도 맡아보지 못한 도시인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완주 용진읍 하이리(下二里)에 있는 레몬농장 카페 ‘본앤하이리(Born & Hillee)’에 있는 약 1650㎡(약 500평) 규모 레몬 온실에 들어서는 순간, 오렌지는 아니지만 바람에 날리는 레몬꽃 향기를 맡아 버렸다. 아, 이것이 바로 레몬꽃 향기로구나! 달콤하고, 고소하고, 상큼한 향기가 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본앤하이리는 완주에서 3대째 농사를 짓는 모자(母子)와 지역 청년 5명이 함께 운영하는 농장이다. 하이리에서 나고(Born) 자란 농부가 만든 완주 로컬푸드라는 의미에서 붙인 브랜드. 단호박 농사를 짓다가 5년 전부터 제주에서 들여온 레몬, 한라봉 같은 만감류(晩柑類) 농사를 짓고 있다.
사무장을 맡고 있는 아들 황인재 씨(26)는 레몬 농사와 밀 농사를 지으며 직접 수확한 밀로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빵을 굽고 레몬청을 만든다. 카페에서 빵과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면 밀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2층이나 레몬꽃 향기가 물씬한 온실 내부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다.
완주 로컬푸드로 차린 뷔페 음식.완주에는 이렇듯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로컬푸드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로컬푸드 직매장은 2012년 처음 문을 연 이후 현재 12곳으로 늘었다. 용진농협 로컬푸드 직매장 2층에는 로컬푸드를 활용한 한식 뷔페 식당 ‘황금연못’이 있다. 그날 오전에 딴 삼례딸기, 부드러운 흰살 생선으로 만든 생선가스, 밭에서 금방 따온 싱싱한 야채 쌈으로 먹는 수육, 다채로운 연근 요리까지 정갈하고 싱싱한 음식이 입맛을 돋운다.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