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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고분 안악3호분(황해도 안악군)의 외양간과 마구간 벽화)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소를 이용한 농사 및 수레를 끌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 고려 성종때는 월령에 소사용법이 나오며,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은 소를 잘키우며, 소의 숫자가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를 기준으로 조선초기인 세종시기에 전국에는 약 3만마리의 소가 있었으며,
> 세조때는 오키나와 물소와의 교배에 성공하여, 기존 소보다 덩치가 2배, 힘도 2배로 커져, 논/밭 가는 속도가 2~4배 상승합니다.
> 병자호란때, 청군과 함께 유입된 '우역(소전염병)'으로 조선소가 거의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조선정부는 몽골소 185마리를 수입, 교배번식에 성공합니다.
> 20세기 초, 조선에는 약 110만마리의 소가 있었습니다.
※ 소의 수가 3만마리에서 110만마리로 증가했으니, 인구증가율의 수십배가 넘는 소의 증가율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품종개량으로 소의 힘도 쎄지니,
이는 조선초기 대비 무려 100배가 넘게 '우력'이 증가함으로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가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 조선의 소가죽 수출
조선의 대외 수출품중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 중에는 우피(소가죽)이 있습니다.
에도시대 일본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소를 도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피의 쓰임새는 워낙 크기 때문에, 상당량을 조선에서 수입하는데, 그 수입량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9세기 초반 조선이 대마도를 통하여 일본으로 수출한 우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연간 평균 2만119마리분량이 수출한 것으로 나옵니다.
또한, 이러한 소가죽의 무역에 뛰어든 업체 수는 대마도에만 13개 무역회사가 있었습니다.
● 조선인의 소고기 섭취량
소를 도축하면, 피, 뼈등을 제외하고 쓸수있는 살코기의 비율은 약 46~48%라고 합니다.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한우는 극동 제일의 우량종으로 키가 146~150Cm, 무게 약 330Kg"이라고 기록합니다.
앞서 언급한 승정원일기의 하루 도축량 1,000마리를 도입하면,
1,000마리 x 365일 x 330Kg x 46% = 연간 55,407톤
의 살코기가 생산되는데,
이를 조선후기 성인인구 800만명을 도입하면,
조선인 일인당 소고기 섭취량은 6.9Kg으로 추정가능합니다.
(한국인 일인당 소고기 섭취량은 14.8Kg)
게다가 조선시대 소한마리 가격은 쌀 3석입니다.
현재 쌀가격 기준으로 계산하면,
조선소 한마리 가격은 <약 108만원> 수준으로
현대의 소한마리 가격이 <약 920만원> 가량이니,
엄청 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현대의 소는 사료섭취와 사육환경등으로 무게가 훨씬 더 나갑니다)
(현대에 유전자 복원된 칡소, 흑우, 백우)
● 조선시대 소고기 문화
춘향전에는 춘향이 집에 온 이몽룡을 대접하는데, 소고기 종류만, 갈비찜, 양지머리, 차돌박이, 염통산적, 양볶이, 신선로, 전골, 포육, 편포 등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소고기요리가 있었으며,
(조선후기 화가 '성협'이 그린 '야연'-들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뜻)
조선인들은 겨울 야외에서 숯불로 익힌 소고기 파티인 '난로회'가 유행했습니다.
(조선후기 풍속화. 겨울날 야외소고기 파티인 '난로회' 모습)
조선의 물류는 수운이 대표적인데, 수운이 몰리는 조창에는 암암리에 소고기 요리가 유행했으며,
역사상 최초의 배달음식인 '효종갱'은 배추속, 콩나물, 송이버섯, 표고버섯, 소갈비, 해삼, 전복등이 들어간 해장국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한양까지 배달을 해줬다고 합니다.
(효종갱. 1800년대 등장)
모든 조선인들이 소고기를 즐겼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우리 조상님들은 잘드셨던 것 같습니다.
참고 자료
> 한국역사연구회
> 승정원일기
> 신편한국사
> 각종 소고기관련 칼럼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