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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해몽하는 다니엘
단 4:19-27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단 4:19-27 / [꿈을 해몽하는 다니엘] 벨드사살이라고도 불리는 다니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왕이 `벨드사살아, 이 꿈 때문에 너무 놀라지 말아라. 또 해몽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너무 놀라지도 말아라.'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다니엘이 입을 떼었다. `임금님, 놀라지 마십시오. 이 꿈은 임금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임금님의 원수들에게 말씀하시는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원수들에게 적용될 꿈이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20) 임금님께서 꿈에 보신 그 나무가 너무나도 커서 하늘 끝까지 닿았고 그래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바라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21) 또 그 나뭇잎은 너무도 아름다울 뿐아니라 그 열매가 어찌나 많은지 세상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이라고 하셨지요. 또 들짐승도 그 나무 아래에서 편히 쉬기도 하였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날짐승도 그 가지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셨지요. 22) 임금님, 임금님이 바로 그 나무입니다. 임금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제국이 점점 힘이 세어져 그 끝이 하늘까지 닿을만큼 엄청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그 나무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임금님이 다스리시는 이 제국의 힘이 온 세상에 미칠 것이라는 뜻인 줄로 압니다. 23) 또한 임금님께서 보신 그 거룩한 파수꾼이 땅으로 내려와 `그 나무를 베어 버려라. 찍어 없애 버려라. 그러나 뿌리가 붙어 있는 그루터기는 그냥 놔두어라. 쇠줄과 놋쇠줄로 그 그루터기를 꽁꽁 묶어 두어라. 그렇게 하늘 이슬에 젖게 놔두어라. 들짐승과 함께 지내게 하여라. 그 풀밭에 그렇게 놔두어라. 일곱해 동안 그렇게 지내게 하여라'라고, 외쳤다고 하셨지요. 24) 임금님, 그 뜻은 이렇습니다. 그 환상은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께서 임금님께 내리시는 판결입니다. 25) 송구스럽습니다만 임금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사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곱해 동안 소처럼 풀을 뜯으며 하늘 이슬이 내리는 들판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때가 되어서야 임금님께서는 세상 만사를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그분이 관할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또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뽑은 사람에게 세상 나라도 맡기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26) 파수꾼이 `그 나무 그루터기는 그냥 놔두어라' 하고 명령을 내린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란 사실을 임금님께서 깨달으신 후에야 비로소 임금님께서 이 제국을 다스리실 수 있게 하신다는 뜻이지요. 27) 그러하오니 임금님, 소인이 이르는 말씀을 따르십시오. 이제는 그만 죄지으십시오. 정의를 실천하셔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 서러움 당하는 이들을 돌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임금님이 다스리시는 이 제국이 죽죽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임금님도 평안하실 것입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고 꿈에 담긴 불변의 진리를 느부갓네살 왕에게 말합니다.
다니엘의 번민(19) 왕의 꿈을 들었을 때 다니엘의 반응은 놀라움과 번민(19, 히. 베할)입니다. 왕에게 즉시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번민(5, 히. 베할)을 함께 느꼈습니다. 다니엘은 신하이기 전에 친구로서 왕을 진심으로 염려했습니다. 진리 전파의 근본적인 모티브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20-22) 다니엘은 꿈의 내용을 반복해서 말한 후 곧바로 핵심을 말합니다.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것이 비밀의 열쇠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듣고 한 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했지만, 결국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진리를 말하기가 힘들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국 진리를 가감 없이 말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해석(23-26) 이어서 다니엘은 왕에게 불길한 내용을 해석해 줍니다. 나무의 베임은 곧 왕의 권력 상실을 예고하며, 그루터기가 들 풀 가운데서 하늘 이슬에 젖고 들짐승들과 더불어 지내는 것은 왕이 짐승처럼 일곱 때를 지낸다는 것을 예고한다고 다니엘은 해석하였습니다. 이어서 다니엘은 이 꿈에 내재된 불변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신다”(25)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다니엘서의 주제이자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왕을 그루터기로 남겨 두신 목적이 바로 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다니엘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니엘의 권면(27) 다니엘은 왕의 회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먼저 이 꿈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공의를 행함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라고 권합니다. 이 권면의 정신은 분명합니다. 이제부터 왕 위에 계신 분을 의식하며 선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용: 이 꿈에 담긴 불변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미국 어느 대학의 교수가 볼티모어에 있는 빈민가로 가서 청소년 200명을 만나 미래에 대한 평가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25년 후 다른 사회학 교수가 그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였는데 놀랍게도 176명이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빈민가 아이들이 성공적 삶을 살도록 이끈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녀의 답변은 교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비결은 정말 간단합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 설 교 >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딘 4:19-27
1. 꿈 해석
•“다니엘이…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v.19)-다니엘은 왕의 꿈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에 이미 그 꿈의 해석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러 올 매우 괴이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다니엘은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고 고민이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에게 이루어질 그 꿈의 내용이 왕의 원수에게 성취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다니엘은 그가 비록 포로로 잡혀와 이방 나라 왕의 신하로 있었지만, 그 왕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이 원수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말은 어떤 악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하나의 동양적인 예의라고 볼 수 있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v.22)-그 크고 웅장한 나무는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2절에서 그 나무에 대하여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당시 바벨론 왕의 권세와 영향력이 그 주변 모든 국가들에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바벨론 국가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왕은 그러한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졌을 것이다.
•“한 순찰자”의 명령(v.23)-왕이 꿈 이야기를 할 때에, 한 번은 ‘단수’로 사용하고 한 번은 ‘복수’로 사용했던 단어를 다니엘은 ‘단수’로 사용하고 있다. 그 순찰자로부터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위세가 당당하던 나무가 베이고 꺾이게 되는 것은 자만하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위세가 허물어지고 그 권력이 꺾일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그 권세가 일단 끝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v.23)-나무를 뿌리 채 죽이지 않고 남겨 둔다는 것은, 그 운명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고 언젠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희망의 여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일시적으로 왕권을 상실할 것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왕위를 회복하고 그 권세를 찾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징계와 형벌을 예언할 때에도 사용되던 비유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거룩한 씨’는 우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전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남아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곱 때를 지내리라”(v.23)-이미 설명되었듯이 ‘때’라는 말은 ‘해’ ‘년’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일곱 때’는 7년을 가리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처럼 변하여 들에 머물면서 7년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다니엘 4장의 이야기는 이 7년의 기간이 끝난 후에 지나간 일을 기록한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해석 요약-느부갓네살이 이미 하나님의 권세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깨달은 바 있으나, 그가 다시 교만하여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의 기별을 보내셨다. 그가 잠시 후에, 짐승처럼 되어 7년간 들에서 살게 될 것이고, 그 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권세와 그분의 통치하심을 깨닫고 왕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명정(命定)하신 것으므로 반드시 그 일이 왕에게 성취될 것이다.
•“그런즉 왕이여”-꿈을 해석한 후에 다니엘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27절). 다니엘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한 종이었으므로, 그가 비록 “혹시”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하였으나, 왕이 만약 진심으로 회개하고 겸비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를 행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잘 보살피기 시작했더라면 그 꿈의 성취가 비켜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2. 교훈
•죽음에 이르는 병:교만-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책망하신다. 다음의 몇 성경절들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에게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호소하고 계심을 교훈하고 있다.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시 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잠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의 결말이 멸망과 죽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사람이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이다. 루스벨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이 땅에 죄와 죽음을 가져왔고, 예수님은 그의 겸손과 희생을 통하여 용서와 생명을 가져왔다. 모든 인생은 교만이 죽음을 자초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약에 나오는 헤롯 왕도 그 교만이 극에 달하여 자신이 하나님처럼 행세하다가 갑작스럽고 기이한 죽음을 당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1-23).
•짐승이 된 사람-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무시하고 살다가 짐승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매우 중대한 교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 짐승의 중간 수준으로 창조된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두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든지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든지 둘 중의 한 길로 가게 된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결말은 그 정신 상태나 삶의 유형이 짐승을 닮아 간다. 일하고 먹고 자식 낳아 교육하고 집 짓고 사는 일은 짐승도 하고 있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짐승이 갖고 있지 않은 고유한 영역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치(주파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짐승과 비슷하게 살게 된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8,19).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하나님이 저희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은 짐승(원숭이)이 자기들의 조상이라 우겨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0~23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원리를 매우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인간들의 삶의 형태가 짐승을 닮고 있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만한 일이다. 부도덕하고 문란한 삶의 모습, 황폐해진 인간의 정신 세계, 허물어진 가치관,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인생의 불행이다.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길목에 두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이고 ‘삶’이고 ‘사랑’이고 ‘생명’이고 ‘영생’이다.
•깨달음과 남은 자-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언제나 남아 있었다. 그들도 역시 연약하고 죄된 속성을 가진 인간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내시는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살았을 때 ‘남은 자’들이 된 것이다. 다니엘 4장 26절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그러한 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삶은 견고하다.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비록 그 꿈을 통해서 왕의 운명이 예언되었지만, 왕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그러나 왕은 다니엘의 권고를 무시하였고, 왕의 삶은 잠시 짐승처럼 변하여 7년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꿈 해석
단 4:19-27
사람들은 너 나 할 것없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만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원하는 성공은 여러 가지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크고 잘되는 번창하는 성공이 있습니다. 또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성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효도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에 대한 성공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 자녀가 장성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를 맞이하는 성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이 들어서 늙었을 때는 이제 성공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소위 곱게 늙어 가는 성공이 있고, 또 죽을 때 병으로 고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 힘들게 하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죽음에 대한 성공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성공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고 잘되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내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결국 성공을 기대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이 나에게서부터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내 자식이고 내 가정이지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느냐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내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는 기도를 섣불리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소원과 내 인생을 조금씩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맡겨갈 때 그것이 곧 신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무기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다는 다 알고 계시니까 처음부터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없다는 것으로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에 대한 절망이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란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쓰면서 결국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며 동시에 그 절망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세상의 관심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자신이 발견한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세상 영광을 다 버리시고 오히려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신자들이 할 일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우리가 보여줘야 할 신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잘 되가지고 '저 사람은 교회 잘 다니고 십일조 잘하더니 복받아서 저렇게 잘됐다'는 칭송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한 자기 자랑이고 자기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고 모든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믿음도, 인생도, 성공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의 영광과는 상관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성공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진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는 편하게 죽는 그런 모습까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성공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우는 자가 곧 신자요, 이것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들은 십자가 아닌 것을 십자가로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 버리고, 헌금 많이 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버리고, 교회 부흥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버립니다. 십자가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돈으로, 성공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강한 힘을 소유하고자 하지만 정작 성경은 믿음은 오히려 강한 힘을 버리고 약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강한 힘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돌아가시는 약한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힘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의 힘이 나를 통해서 보여질 수 있도록 나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원하십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곧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다니엘 세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은 발견했지만 그 권능을 자기 인생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조건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의도대로 자기가 만들어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꿈에서 큰 나무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상상할 때 느부갓네살과 같이 큰 나무로 만들어 가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님을 느부갓네살과 같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는 신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네 인생은 나에게 달렸지 네 마음대로 너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느부갓네살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 느부갓네살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곧 나에 대한 책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계획이 많습니다. 자식을 보면서도 과학자를 만들까, 검사를 만들까 하면서 자신만의 계획을 수없이 세워갑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속마음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달라는 욕심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냥 공부시키면서 자식의 재능에 따라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공부가 십자가가 아니니까 하나님만 잘 믿는 자식으로 키워가겠다는 소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걱정과 염려가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일 일, 장래 일은 모두 여호와의 손에 달렸으니까 네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느부갓네살에게 인생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꿈을 꾸게 합니다. 그 꿈은 땅 한가운데 견고하고 큰 나무가 있는데 순찰자가 와서 그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꿈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바로 자기가 원하고 계획하던 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인지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꿈을 해석할 자는 느부갓네살과 반대의 생각을 가진 자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니엘이 등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올 때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서 있기를 소원했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이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나무를 잘라버리십니다. 즉 우리 스스로 계획하고 소원하는, 우리가 원하는 성공을 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잘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실 때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성공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그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되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도 힘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힘이고, 모든 것을 자기 함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는데 힘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자가 받는 수모과 멸시를 알고 있기 때문에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것을 잘라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잘라지는 것이 곧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나무를 자르시되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인생도 모두 그 분의 손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잘라진 그루터기가 다시 소생하는 것, 이것이 곧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의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자가 성공자입니까? 나사로가 성공자입니까? 분명히 나사로가 성공자입니다. 세상 편에서 볼 때는 실패자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분명 성공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세상 편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봐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라면 결국 우리가 기대해야 할 성공의 모습도 당연합니다. 내 성공을 앞세울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성공하신 분이라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동행하는 것이 곧 성공하는 삶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들
다니엘 4:19-27
대개 사람들은 별 문제없이 지내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 나갈 때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가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잘 나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이걸 깨닫지 못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시며, 나를 언제나 선하게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사람이나 세상 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잊어버릴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낮추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있음을 깨닫게 될 때,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면, 그가 처음에는 아주 교만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감독관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죽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결국 살인까지 감행한 그를 우리는 아주 교만한 사람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후,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 12:3)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인격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말한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고 하셨는데, 모세야말로 완전을 이룬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격의 완성을 이룬 사람은 아주 겸손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지극히 겸손한 사람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옛 글(장자)에 보면, "聖人無名"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이 된 사람은 이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인은 결코 자기 이름을 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자아(제나)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내가 ∼한다. 나는 ∼이다"라는 생각을 떨쳐 버린 사람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겸손히 꿇어 엎드려 주의 뜻을 묻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 즉 교만하게 행하는 것은 '자아'(ego)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완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을 낮출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말씀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고, 사람이 가지면 얼마나 가졌습니까!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동양화(東洋畵)를 볼 때마다 자연을 거대하게 그리고, 그에 비해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작게 묘사한 우리 선조(先祖)들의 겸손한 마음을 읽곤 합니다. 대자연(大自然) 앞에 서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인간이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잘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멋있게 출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교만하게 되었고, 그의 생애는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행해야 합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일곱 가지를 열거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교만한 눈"(잠언 6:17)입니다. 눈을 내리 깔고 거만을 떠는 모습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잠언 22:10에 보면,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고 했다. 21:24에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고 한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장자』를 쓴 장주는 관청에서 직영하는 옻나무 농장 관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장주의 정신생활은 화려하고 풍요했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신비가 야콥 붸메(Jacob Boehme)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께 어쩌면 그렇게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거기 대해 그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가장 작고 가장 무가치한 피조물을 찾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다 보셨는데, 나를 보셨으며, 나를 취하여 사용하셨다고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교만의 극치에 이르렀다가 망할 뻔했던 한 사람의 경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입니다. 그가 어떻게 겸손해 져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당시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정말 그의 시대는 황금시대였으며, 국경은 든든했고, 그의 나라는 번영했습니다. 그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모든 것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고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흉몽(凶夢)을 꾼 것입니다. 그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바벨론 안에 있는 모든 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해몽하라고 해 보았지만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왕에게 불려왔고, 이제 다니엘이 꿈의 자세한 내용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 그 꿈의 내용을 들은 후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단 4:19). 그리고 나서 그는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22절)고 말하고 나서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문제가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까지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달라져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계시해 준 것이라고 다니엘은 보았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바뀌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왕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왕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단 4:25). 이것은 신하된 자로서 목숨을 내 걸고 왕에게 진언한 것입니다. 왕은 지존(至尊)입니다. 왕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왕에게 다니엘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따로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하나님은 당신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하신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임금님이 깨달으신 다음에야 임금님의 나라가 굳게 선다"(단 4:26)라고 말했습니다. 또 33절에 보면,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천하를 호령하고, 영광스럽게 호위를 받던 왕이, 이제 이렇게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느부갓네살은 어떻게 처신을 했을까요? 우리가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1.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34절).
34절에 보면,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러러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자기 왕궁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후궁들과 자식들, 그리고 자기가 가진 보물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당한 그에게 그런 것들이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원을 향한 갈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 존재입니다. 시편 25:1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늘 주님을 우러러 봄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 7:7절에 보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찾지 못할 때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나의 소리를 들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멍하니 쳐다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께 간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총명을 주셨습니다. 즉, 다시 정신을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명예와 위엄과 나라의 영화를 회복시켜 주셨으며, 그의 고문관들과 대신들이 그를 찾아오고 그가 이전보다 더 큰 영예를 받으면서 왕위를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복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5에 보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임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면,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 것과, 예수님께서 또 거기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바라보며 살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롭게 회복되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4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이 교만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하트마(聖人, 씻어난 이) 간디는 1946년 7월 6일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좋을 때만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나 진실한 신자는 일이 잘못될 때도 하나님을 찬송한다." 역경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 그가 참다운 성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성도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전 10:31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의 손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셨을 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열방(列邦)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 22:50). 또, 시편 146:2에서 시인은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면, "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고 높이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과연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참되며, 그의 모든 길은 공의로우니, 그는 교만한 이를 낮추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최고인 줄 자부하며 살던 그가 매우 겸손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느부갓네살처럼 이런 고백을 하며 사십시다. 무엇보다도 늘 겸손히 행하십시다. 그 때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높여주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하게 이루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하늘의 권세를 잊으면 땅의 권세를 잃습니다
단 4:19-27
나무가 '점점 자라서 튼튼해지고, 그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서, 땅 끝 어디에서나 그 나무를 볼 수 있고'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20절)
하나님은 작정하신 심판을 미리 계시해 그분 뜻이 성취됨을 알게 하십니다. 왕의 말을 들은 다니엘은 꿈이 의미하는 바를 간파하고 한동안 놀라고 번민합니다. 그 꿈이 왕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과 느부갓네살왕의 신하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다니엘은 지혜롭게 처신합니다(19절). 다니엘의 모습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다니엘은 왕이 꿈에서 본 하늘까지 닿은 나무가 왕 자신임을 밝힙니다. 이것은 당시 느부갓네살왕의 권세가 땅끝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그에게 제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의 문제는 권력의 욕망에 취해 더 높은 하늘의 권세를 잊은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욕망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바벨론이 앗수르와 이집트를 누리고 세계를 제패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나라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셨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강력한 나라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운데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여러차례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 손 안에 달려있음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은 이렇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앞에 잠깐 영광을 돌리다가 다시 자신이 높아지려는 욕망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꿈을 통한 계시보다 더 강도높은 삶의 고난을 통하여 그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낮아져 섬기는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높여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하실 것입니다.
왕은 들짐승과 7년을 보내며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요?(25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하면 꺾이고 맙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심판, 회복, 권면' 순으로 해석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감시자의 명령대로 하늘까지 닿은 나무는 베어진 후에 그루터기만 남아 7년을 지낼 것입니다. 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왕의 권세를 꺾어 버리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루터기가 남은 것은 왕에게 회복의 기회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회복을 위한 결단입니다. 공의를 행하여 자신의 죄를 속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마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27절). 회개와 그에 합당한 삶은 회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선고받을 때 취할 마땅한 태도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징계는 앞을 보지 못하고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멈춰세워 바른 길로 전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선고 받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는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앞에 귀기울이는 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는 지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힘과 권세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압제하고 불의를 행하므로 그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나의 공의로 삼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임을 인정하고 속죄를 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자신 또한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 주님께서 주신 능력, 주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히 내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죄였는지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만 견고하게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앞에 겸손히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며,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선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개의 삶이 주는 은총
단 4:28-3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선 몰랐던 것들.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줄 알았던 것.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던 것.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면 좋을 줄 알았던 것. 인생이 점점 나아지고 쉬워 질 줄 알았던 것.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줄 알았던 것.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을 줄 알았던 것.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던 것.
어른이 돼서 알게 된 것들. 더 이상 어리지 않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더라는 것. 지금은 아주 멀리 떠나기 곤란하다는 것. 언제나 늘 그 지금이라는 것.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가끔 허전하다는 것. 살면 살수록 인생은 오리무중이고, 산 너머 산이더라는 것.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더라는 것.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더라는 것.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슬픔 분노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섭리이며, 오히려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그나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 할 줄 알게 되었고.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갖고, 겸손과 함께 불가능한 꿈을 꾸는 법을 알려 주었고, 그것이야 말로 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모든 시작의 끝은 있기 마련이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것. 인생은 산 너머 산이지만 아무도 대신 넘어가줄 수 없으니, 열심히 밥 먹고 힘내서, 잘 넘어야 한다는 것.
2. 왕의 꿈과 그 꿈에 대한 다니엘을 통해 해석한 하나님의 역사는 정확했습니다.
바벨론을 제 자신의 힘으로 세우고 키우고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된 느부갓네살 왕에게, 하나님은 짐승처럼 행세하는 질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 병명을 리간드로피아(lycanthropia)라는 정신질환으로 이해하는데, 결국 꿈대로 일곱 때를 왕으로써 직무를 행할 수 없도록 박탁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도 인간 권세의 유한성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을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어제 저의 41년 목회를 되돌아보며, 힘써 이루었다 생각했던 일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고백하며, 하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사는 것이 목양의 길임을 술회한바 있었습니다. 마침 저의 목회인생의 첫 번째 멘토이셨던 선배 목사님의 설교 또한 하나님을 들어내는 삶을 일깨워 주신 것이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짐승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걸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충고를 기억해 냈고, 짐승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자신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자리에서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된 역전의 삶을 시작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34절). 진정한 회개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180도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건강과 함께 권세도 회복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높이며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진실하시다고 고백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회개의 삶이 은총아래 살게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들이 희망하는 삶의 의미요 목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