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910
■ 3부 일통 천하 (23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5장 하나가 되는 천하 (9)
- 일통천하(一統天下).
천하가 하나로 합해졌다는 뜻이다.이는 곧 지난 550년간의 기나긴 난세의 세월을
종식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끝난 것이다.
그랬다.이제부터는 새로운 시대였다.
천하를 하나로 이룬 주인공 진왕 정(政)은 무척 뿌듯했을 것이다.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 첫 소감을 진왕 정(政)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군사를 일으켜 어지러운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았기 때문이다.자신이 천하 통일을 이룬 것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상의 돌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었다.이는 단순히 겸양(謙讓)의 말이 아니다.
실제로 진왕 정(政)이 천하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이전에 이미
통합의 기반이 완전히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멀리로는 진목공 대의 재상 백리해(百里奚)가
진나라를 중원의 한 나라로 자리매김하였고, 가까이로는 상앙, 장의, 범수로 이어지는
명재상들이 진나라를 초강대국으로 이끌어 올렸다.
이들 대(代)에 이미 진(秦)나라는 패업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진왕 정(政)은 다 그려진 그림에 점을 찍어댄 것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진왕 정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그렇다고 진왕 정(政)의 활약이 미미했다는 뜻은 아니다.
진왕 정은 여러면에서 기나긴 난세(亂世)를 종식시킬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중 가장 큰 원동력은 역시 어쩔 수 없이 그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광기(狂氣)' 가 아니었을까.
그 광기는 때로는 격정(激情)과 잔인한 행동으로 분출되었고, 또 때로는 냉철한 통제력과
끈기있는 기다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여불위(呂不韋)의 제거는 그 광기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진왕 정(政)의 가장 큰 적은 전국육웅(戰國六雄)이 아니라 바로 진왕 정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런 내면의 적을 이겨내고 천하(天下)를 하나로 통합한 그는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긍심은 이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또 하나의 '광기(狂氣)' 로 이어졌다.
진왕 정(政)은 이어서 명했다.육국(六國)이 멸망한 이때, 내가 그들과 똑같이 왕호(王號)를 사용한다면,
나의 공업(功業)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아울러 후세에 전할 수도 없다.
나의 칭호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라.
그때까지 진(秦)나라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호(王號)를 사용했다.
그런데 나머지 여섯 나라는 모두 자신의 손에 의해 멸망했다.이를 그대로 두면 천하(天下)를
하나로 통합한 자신도 왕이요, 자신의 손에 의해 멸망당한 육국(六國)의 왕들도 왕인 것이다.
'어찌 같은 반열(班列)에 놓을 수가 있겠는가.'이것이 바로 진왕 정(政)의 생각이었다.
같을 수는 없다. 아니, 같아서는 안 된다.
방법은 두 가지다.멸망당한 육국(六國)의 왕호(王號)를 깎아내리든가, 아니면 자신의 칭호를 바꾸든가.
진왕 정(政)은 그 중 한 방법을 명확히 선택했다.- 나의 칭호(稱號)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라.
바로 그것이었다.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앞으로 자신에 대한 칭호(稱號)를 달리함으로써
멸망당한 육국의 왕들과 구별하겠다는, 일통천하(一統天下)의 주인공다운 발상이었다.
이 문제로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고심했다.그리하여 올린 안이 '태황(泰皇)' 이다.
"사람들은 옛날 임금 중 가장 공적인 세 임금을 삼황(三皇)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신농이라고도 함)이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서도 태황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통일 진나라의 왕을 태황(泰皇)이라 호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진왕 정(政)은 태황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궁리하는 중에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좋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이 사용했던 칭호는 쓰지 않겠다. 첫자는 삼황이란 글자 중
'황(皇)' 자를 취하고, 그다음은 오제(五帝) 라는 글자 중 '제(帝)' 자를 취하여 '황제(皇帝)' 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진시황, 혹은 시황제라는 칭호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시황제(始皇帝) -'황제의 시작' 이라는 뜻이다.대단한 포부였다.
이제부터는 여기서도 진왕 정(政)을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911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911
■ 3부 일통 천하 (234)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5장 하나가 되는 천하 (10)
진시황(秦始皇)은 자신의 아버지인 진장양왕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한 후 말했다.
- 황제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 이라 하리라.이후로는 황제 외에 짐이라는 말을 쓰지 말도록 하라.
'짐(朕)' 이란 원래 '나' 라는 뜻으로, 1인칭 지시대명사다.
그때까지는 일반 백성들도 자신을 가리킬 때 '짐' 이나 '과인(寡人)' 이라 칭하였다. 모두 겸양의 말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이 선언 이후에는 황제만이 '짐(朕)' 이라는 말을 썼을 뿐, 다른 사람은 일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이 제도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갔고, 황제보다 아래인 왕(王)은
'짐' 이라는 말 대신 '과인(寡人)' 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秦始皇)은 많은 것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 천하(天下)가 하나가 되었는데 제도가 어찌 여러 개일 수 있겠는가.황제(皇帝)의 권위에 대한
절대화일 수도 있겠으나, 달리 생각하면 효율적인 국가통치체제의 확립 선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먼저 군현제의 정착이다.
군현제(郡縣制)란 나라의 땅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그 책임자를 임명, 파견하는 제도였다.
지금까지 모든 지위와 재산을 세습했던 봉건제(封建制)와는 정반대로 가장 큰 특징은 세습 불허다.
이는 곧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縣)을 두어 다스렸다.진시황(秦始皇)은 또 각 지역마다 서체가 달랐던 상형문자를
하나의 글씨체로 통일했고, 지역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던 도량형(度量衡)과 수레바퀴의 폭도 통일했다.
6국 통합과 제도 확립의 공으로 이사(李斯)는 승상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한명의 주역이었던 위요(尉繚)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은퇴한 것만은 분명하나 그가 어디로 가 어떤 여생을 보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위요(尉繚)는 진시황의 일통천하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온 신의 마지막 선물인가.
천하통일을 이룬 진(秦)나라는 겨우 15년밖에 존속하지 못한다.
BC 221년에 통일하여 진황제 2세 때인 BC 207년에 유방과 항우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 동안 진시황(秦始皇)은 참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그는 건축광이었음에 틀림없다. 먼저 6국의 궁실을 모방한 여섯 개의 이궁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6개의 이궁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역사상 최대 규모의
궁을 지었다.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방궁(阿房宮)' 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남긴 것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진시황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 분서갱유(焚書坑儒).그랬다.진시황(秦始皇)은 사상의 통일까지도 꾀했던 모양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자들을 산 채로 구덩이 속에 파묻어 버리고, 법가와 실용서 이외의
모든 책들은 불질러버렸다.이렇듯 진시황(秦始皇)은 모든 것을 하나로 이루려 했다.
그는 서양의 나폴레옹처럼 불가능이란 없다고 믿었던 것일까?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과연 진시황(秦始皇)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했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아직 하나로 통일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까.그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었으니 말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런 면에서 그는 신(神)의 세계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91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