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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어본 이들에게 유비, 관우, 장비의 두터운 우애만큼 유명한 것이 조조의 관우 짝사랑이죠. 조조의 관우 짝사랑은 국경을 초월해서 정말 순수하기 짝이 없는 사랑입니다. 유비의 부하임에도 불구하고, 군신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군인이며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적임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관우에게 끝없는 러브 메시지를 던집니다.
여기서 한가지, 조조는 어째서 관우를 이리도 총애하는가?
분명 관우가 군주들 사이에서 예쁨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장수인건 아주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중국 대륙 전체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덕망, 여포와도 비교할 수 있는 일기당천의 무예, 춘추좌씨전을 통달하고 지혜에도 밝은 장수를 수하에 두기 싫어할 군주는 없겠죠.
하지만 조조의 그것은 조금 더 달랐습니다. 물론 유비의 것과는 조금 다르죠. 유비는 의형제로써 맺어진 두터운 신뢰가 그것이고 조조의 것은 좀 더 심리학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래 삼국지 관련글이 자주 올라와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관우와 조조의 관계를 한번 써보고자 합니다.
1. 조조의 배경
조조는 내시 집안 출신이며 아버지는 내시의 양자입니다.
할아버지인 조등은 4대 황제를 섬기며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던 내시였고, 원래 본 성이 하후였던 조조의 아버지 숭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 조숭이 됩니다. 후에 할아버지인 조등의 어마어마한 재물을 이용하여 태위, 당시 사공, 승상과 함께 삼공이라고 불려지던 - 우리나라로 따지면 우의정 정도 - 의 벼슬을 사드립니다.
이쯤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닥 깨끗한 뒷배경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겠죠. 어렸을 적엔 원소, 장막과 죽마고우로 지냈고 내시인 할아버지, 벼슬을 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남 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남 부럽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죠.
조조가 서서히 세상에 모습을 들어낼 때는 모두 알다시피 황건적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러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건의 난은 애초에 십상시들의 횡포와 무능한 황제의 무시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당시 중국 대륙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죠.
그렇게 조조가 자라며 보고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더러운 짓을 일삼는 부패 정치인들에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며 종교로 나타났지만 결국은 도적무리로 전락한 황건적들등 온갖 쓰레기들을 보며 자랍니다.
이렇게 자라온 조조의 마음 속엔 '멋진 남자'에 대한 로망이 싹튼 것이었습니다.
조조는 삼국지 연의에서만큼 악랄하고 권모술수만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의롭고 백성을 사랑하는 인물이었죠.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논밭을 지나는데 가을 추수철이라 벼가 노랗게 자라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병사들을 두려워하여 밖으로 나오지 못하자 조조는 논밭을 망치는 자는 군령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라고 합니다. 이때 바닥에서 새가 날아올라 조조의 말이 놀라 이리저리 뛰며 벼를 망쳐놓았습니다. 조조는 아연실색하여 칼을 빼들어 자신의 목을 치려고 하죠. 옆에서 장수들이 제지하자 조조는 "내가 내린 군령을 내가 어길 수는 없는 법이다."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버립니다. 그러자 병사들도 아무도 군령을 어기지 아니했고 조조의 일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죠.
이것말고도 둔전제를 펼쳐 후한의 정치에 피폐한 백성의 마음을 달랬고 백성을 기초로 한 정치를 폈습니다. 온갖 비리와 무능한 황제의 무식과 환관들의 썩은 정치로 황폐해진 한나라가 과연 그 명색을 계속 이어갔어야 했는가? 그것은 단지 유비가 걸어 올린 의라는 이름의 변명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죠.
2. 관우의 성격
관우는 흔히 오만한 성격으로 오해받기 쉬운데, 심리학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관우의 성격은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정말 건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현재 이런 사람은 같이 있으면 별로 재미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죠.
말이 별로 없고 사람을 신뢰할 줄 알며 아랫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며 윗사람에게 자신의 할말을 할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히려 이런 관우의 성격을 망친 사람은 제갈량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관우의 우직하고 선한 성격은 삼국지 중후반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의형제가 된 후 유비는 허구헌 날 술과 여자를 끼고 살며 방탕한 생활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침실에서 조조가 동탁 토벌의 격문을 보낸 것들 중 하나를 숨겨놓은 것을 발견합니다. 장비는 노발대발해서 단숨에 유비를 찾아가서 따지려고 하죠. 그러자 관우가 얘기합니다.
"장비, 의제의 노여움은 알겠으나 일단 형님에게 물어보고 형님의 뜻을 판단해도 늦지 않네."
"유비 형님이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거면 어쩔 거유?"
"그땐 깨달을 수 있도록 해드려야지."
이러한 관우의 유비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신뢰가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이건 장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포 토벌전 이후 조조에게 몸을 의탁한 유비가 백날 농사만 짓고 있자 장비가 천불이 나서 술집에서 술을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이때도 관우는 "너 여기서 뭐하냐?" "또 술이냐?" 이런 말이 아닌, "동생의 노여움이 어떤지 한번 들어보세." 라는 말을 합니다.
관우가 중국에서 군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싸움을 잘해서? 관우 정도의 무예는 동시대에 장비, 여포 등도 있고 초한지로 가면 항우, 영포 등도 있고 전국시대에도 널리고 널렸습니다. 관우의 인기는 무예도 무예지만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선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밑바탕이 된 충성심이 있습니다.
관우가 조조에게 귀순했을 때, 조조의 휘하에는 조조와 생사를 넘나들며 군신의 정을 초월한 장수들이 여러 있었습니다. 하후돈, 하후연, 장료, 서황, 우금, 조인, 악진 등 충분히 관우를 시기하고 질투할 장수들이 많았다는 거죠. 하지만 관우는 하후돈을 제외하곤 장료와도 대단한 우애를 보여줬고 서황과도 많이 친했습니다. 관우가 그만큼 장수들과 친화력이 나쁘지 않았고 사람 됨됨이가 좋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관우가 정말 오만한 사람이었다면 원소와의 전투에서 귀순한 허유처럼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후에 번성전투에서 서황을 만났을 때도 이 순수한 사람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죠. 전장에서 서황을 만난 관우는 서황과 나름 인사를 나누며 반가워합니다. 그러고 갑자기 서황이 돌변하죠.
"누구든 관우를 잡는 자는 천금을 내리겠다!"
순수한 관우는 갑자기 돌변한 서황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허둥지둥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만큼 관우는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이었고 이런 믿음은 절대 오만한 성격에서 나올 수 없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관우의 성격은 제갈량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를 맞게 됩니다.
관우는 절대 거짓말도 안 하고 궤변을 일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직언을 하고 절대 실언을 하지 않는 사람인거죠. 아마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은 알고 계실 겁니다. 허나 형주 수비군이 된 후 관우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일을 경험하죠. 애초에 형주는 제갈양이 손권에게 '유표의 아들 유기의 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얻은 땅입니다. 게다가 어쩔 줄 몰라하는 노숙에게 형주 남부 일부를 주기로 약속까지 하죠. 관우에게 있어 약속은 곧 생명입니다.
젊었을 적엔 다른 이의 원수를 죽여줘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다니고, 헌제와 나간 사냥에서 조조의 오만함에 화가 난 관우는 자신의 목숨이 달렸음에도 조조를 죽이려고 했고, 유비와의 약속을 위해 천리를 달려 부인들을 잘 모셔서 결국엔 그들을 만나는 관우에게 있어 제갈량의 궤변은 그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노숙이 성도에 오자 제갈량은 관우에게 가면 그가 형주남부를 줄 것이다라고 알려줍니다. 그와 동시에 관우에게 형주 남부를 넘겨주지 말라는 서신도 같이 보내죠. 평소 사람에 대한 인의가 깊은 관우는 정말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이것은 후에 노숙이 관우를 암살하려고 했던 술자리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노숙이 도수부 100명을 정자 밑에 숨기고 관우를 초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합니다. 관우는 호기롭게도 주창만 대동하고 나타납니다. 술자리가 진행되자 노숙이 넌지시 형주 남부에 대해서 얘기하죠.
"장군, 형주 남부는 언제 넘겨주시는 겁니까?"
"노숙공, 그런 것은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닌 듯 싶소."
평생을 직언하고 대답을 회피하지 않던 관우가 대답을 회피하는 거죠. 관우의 일종의 반항(?)은 오호대장직이 내려졌을 때도 나타납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후 관우를 필두로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으로 칭합니다. 마량이 유비의 칙령을 가지고 관우에게 오자 관우가 얘기합니다.
"조운이야 공로가 꽤 많으니 그렇다치고, 마초같은 애송이와 황충 같은 늙은이가 함께하는 직함이라니 너무하지 않소?"
이 대사는 그 전에 관우가 보여준 얘기와는 상당히 모순됩니다. 장로 토벌전에서 마초가 군을 이끌고 오자 관우가 형주에서 서신을 보냅니다. "마초와 같은 호걸과 한번 싸워보고 싶으니 장비와 자리를 바꿀 순 없겠습니까"라고 말이죠. 이미 관우는 마초를 인정했습니다. 황충은 말할 것도 없이 장사 점령전에서 힘을 겨뤄봤고 늙은 나이에도 호걸이었던 황충을 인정해 관우는 황충에게 말을 바꿔 타고 나오라고까지 합니다. 장비는 유비와 함께 있지만 두 형제와 떨어져 형주에 홀로 남겨진 관우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왜 오나라랑 외교를 하지 않고 번성 전투를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목숨을 잃었느냐? 라는 질문은 어떻게 보면 멍청한 질문입니다.
관우가 왜 오나라와 위나라를 둘 다 적으로 만들고 싸웠습니까? 답은 이미 위에 쓴 글에 나와있습니다. 결국은 제갈량의 계략에 외교는 무너진 것이죠. 애초에 제갈량은 오나라와는 친하고 위나라와는 적대하라고 관우에게 일러두고 성도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굳이 형주남부를 주지않고 오나라와의 외교상태를 흔든 것은 왜일까요? 손권이 관우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했다고 하나 관우의 마음은 이미 꽤나 혼란스러워져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관우는 그 혼란스러웠던 중국 대륙에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남자"의 전형이었습니다. 형주성이 함락된 후 부랴부랴 달려간 관우 부자, 강릉성에서 여몽의 계략으로 가족들을 찾아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관평이 병사들에게 호통치며 어디를 가느냐고 하지만 관우는 그저 "가족들을 찾아가니 그대로 두라"고 얘기합니다. 오만하기만 한 사람이 이렇게 병사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3. 조조의 관우 사랑
조조의 관우 사랑은 이렇듯 관우의 뛰어난 인품과 남자다움에 이끌려서 시작됐습니다. 내시였던 할아버지, 돈으로 벼슬을 샀던 아버지, 혼란스러웠던 세상, 이런 세상에서 관우는 조조가 그토록 열망하던 멋진 남자의 전형이었을 겁니다.
조조는 그토록 많은 인재를 가지고도 관우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인재를 열망하던 조조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부처에 가까운 사람을 찾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탁 토벌을 위해 모인 제후들. 사수관으로 병사를 이끌고 나온 화웅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제후들은 다들 꽁무니를 빼고 나몰라라합니다. 공손찬이 나섰으나 당하고 돌아왔고 손견도 원술 때문에 병력만 잃고 돌아오고 도겸은 애초에 인성이 쓰레기인 제후이며 나머지 제후들 역시 제 밥그릇 챙기기 바뻤죠.
그런 상황에 꼴랑 마궁수에 불과한 남자 한명이 호기롭게 나타나 자신이 나가겠다고 합니다. 수많은 제후들이 모인 자리에, 선봉 싸움에서 전군의 예기가 꺾여버릴 지도 모르는 중요한 전투에, 대장, 중장, 소장들 모여있고 제일 낮은 직급이 대령인 자리에서 병장 한명이 호기롭게 나타난 거죠. 그리고 나아가 화웅을 베어 그 능력을 보여줍니다. 조조가 첫눈에 반할 수 밖에 없는 남자였던 거죠.
하비성에서 끌려나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산속에 숨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항복을 하라고 찾아온 장료에게 관우가 세 가지 조건을 얘기합니다. 첫째, 자신은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요, 둘째, 하비성의 유비의 두 부인에게 절대 해가 가지 않아야 하며, 셋째, 유비의 생사가 확인되면 자신은 그 직후 유비에게 떠나겠다라고 합니다.
온갖 재물과 큰 집과 미녀와 파격적인 관심에도 그것을 일체 손대지 않고 자신은 몸도 움직이기 힘든 문지기 집에서 생활하며 유비의 부인들을 주군의 예로서 보필하고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생활하는 그 모습, 어떤 사람이 봐도 반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언제나 뛰어난 인재를 갈망하던, 완벽한 남자를 갈망하던 조조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관우가 빛나는 별로 보였을 겁니다.
4. 마무리
율곡 이이 선생은 심리학적으로 사회에 대한 부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신사임당의 위대함은 세상에 널리 퍼져있지만 율곡 이이의 아버지에 대해선 율곡 이이의 프로필에서 한 줄도 찾아보기 힘들죠. 심리학에서 흔히 아버지는 사회요, 어머니는 가정이라고 합니다. 파워풀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율곡 이이는 와이프 등살에 밀려 집안서 힘도 제대로 못 썼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고 그것은 이이가 사회를 나가려 할 때 이이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죠.
이것을 이이가 어떻게 극복했느냐? 율곡 이이는 장원을 무려 9번을 합니다. 별명이 구도장원공이었죠. 서울대 붙어놓곤 안 가고 하버드도 써보고 스탠포드도 써보고 옥스포드도 써보고 해서 다 합격을 한겁니다. 근데 안 가고 결국 9번을 채우고 벼슬 길에 오릅니다. 율곡 이이가 잘난척 하기 좋아하는 사디스트이냐? 그건 아닙니다. 이이는 이런 식으로 사회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한 것입니다.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자신감을 9번의 장원을 하며 극복한 것이죠.
조조는 환관의 손자입니다. 아버지는 벼슬을 산 사람입니다. 둘 다 도덕적으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보긴 힘들죠. 거기에 조조는 외모가 볼품없었다고 합니다. 키도 루저에 간신 수염, 원소 같은 명가의 자식과는 확실히 비교가 됐겠죠. 원소는 서자의 아들이었지만 그 역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잘난척으로 커버를 했고 원술은 말할 것도 없고 조조는 주위 사람들의 소문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길에 열등감이 있었을 겁니다.
조조의 위서무제기의 주석 위무고사에선 위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가 처음 효렴으로 천거되었을 때, 나이는 어렸고 숨어사는 현자 또한 아니오니, 천하에 우매한 자로 알려질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한 군의 태수로 명예를 세우고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치고자 하였다."
인중여포라는 여포를 사로 잡아 놓고도 그냥 사형, 함진영으로 유명했던 고순도 삭제, 장료도 죽이려던 것을 관우의 천거로 등용, 진궁도 미련없이 죽이고 자신의 죽마고우 장막도 압박하여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냉담하게 굴었던 그 조조는 관우에게만은 빠순이가 되었죠. 왜 일까요?
집안도 없고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뿐인 범인이 일당만의 무예에 훌륭한 인품과 덕망, 사람에 대한 신뢰까지, 모든 것을 갖춘 관우라는 그 남자에게, 어떻게든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열등감까지 느끼던 환관의 아들이란 주홍글씨를 벗겨내고자 발악하고 발버둥치던 조조는 필연적으로 끌렸던 것은 아닐지. 그렇게 관우라는 멋진 남자에게 자신을 대입하며 만족을 느끼고 그가 걸어가는 길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우의 죽음 이후 따라가기라도 하듯 죽은 조조. 평생을 그토록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어했던 장수의 목이 와있는 것을 보며 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요.
자신을 버리고 천리행을 떠나는 관우를 뒤에서 바라만 보던 조조가, 마지막까지 전포를 주며 은혜를 베풀었던 것도, 조조의 관우에 대한 사랑이 순수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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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관우도 조조도 참 매력적이네요^^
잘읽었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학교라 관련된 책은 집에가서 주석을 달겠습니다 ㅎㅎ
관우와 율곡 이이에 대한 책은 각각 "심리학자, 삼국지를 말하다"와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에서 나옵니다. 김태형 씨 책이구요. 두권 다 굉장히 흥미로우니 보시길... 아버지는 사회요 같은 경우는 제가 예전에 프로이트 공부할때 나온적이 있습니다. 어딘진 기억이 안나네요. 육아아동심리학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아버지와의 관계가 약하면 사회적으로 약한 경향이 있고 어머니와의 관계는 가정과 관계가 있단 얘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제가 공부중인 범죄심리학에서도 나오는데 부모와의 관계와 어린시절이 불우한 사람일수록 범죄와 연관된 경우가 많다고 통계가 있습니다. 요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에서도 나오는데 정조대왕 이산과 사도세자와 어머니였던 홍씨와의 관계로도 자세히 나오니 한번 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심마니 아뇨 저도 범죄심리학 공부중이지만 다른 부분 개론은 다 들어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미 문학쪽으로 넘어간 것은 알고 있습니다 ㅎㅎ 다만 부모가 사회와 가정을 칭하는 부분은 아동심리학에서도 다루는 것으로 압니다. 말씀 드린대로 위의 책에서도 상당부분 나오고 있구요. 프로이트 얘기를 꺼내서 오해를 사게 했네요 ㅎㅎ
@심마니 사실 제가 원래 영문학과인데 미국에서 대학웡 공부를 하면서 범죄심리학으로 넘어왔습니다 ㅎㅎ 심리학을 접한 계기 자체가 영문학에서 프로이트를 배운게 컸거든요. 그때 프로이트를 정말 재밌게 공부했다보니 아직 그게 긍정적으로 남아있나봅니다 ㅎㅎ
글 잘 봤습니다..근데 중간에 함정이ㅎㅎ다른 조조가 있네요^^
추천 100개요.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그런게 연의를 바탕으로 쓰신거 같은데 장료와 관우는 관우가 조조에게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고 인정하는 사이였으니 조조진영에서 새롭게 만나서 친해진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서황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쓰여있는데 오히려 서황의 행동으로 보아서 크게 친분이 없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조군 진영에 있을땐 친분이 있었는데 서황이 공과 사를 잘 구분했다고 한다면 관우는 그걸 잘 못했던게 있죠. 저도 정사와 연의 둘다 읽었지만 연의 얘긴 주창얘기 밖에 없는거 같은데요 ㅎㅎ
@Show Time† 화웅과 관련해서 연의를 바탕으로 쓰신거 같았습니다. 화웅에 대한것은 연의에서만 나오는 허구로 알고 있고 그 일로 인해서 조조가 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는 연의를 바탕으로 쓰신게 아닌가 생각 되서요.
@The King J 정사에서는 화웅은 손견에게 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둘다 읽은지 좀 되서 혼동이 되니...
@John Havlicek 네 저도 그래서 연의를 바탕으로 쓰신게 아닌가 라고 쓴겁니다.
@The King J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서황인데 정사를 읽은지 오래 되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상당히 훌륭한 장수여서 저런 행동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군기를 상당히 엄격하게 지켰던 장군으로 기억하네요.
@John Havlicek 저는 서황과 관우의 친분은 잘 모르는데 혹시 둘의 친분을 알수 있는 일화가 있나요? 궁금합니다.
@The King J 교우 관계는 넓지 않았으며 붕당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관우, 장료와는 친하게 지냈다. 꽤나 우정이 깊었던 모양으로, 훗날 번성에서 관우와 적으로 만났을 때도 허물없이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물론 공사의 구분은 확실하여 관우에게 '나는 오늘 위왕 조조의 명을 받고 왔소. 군후와의 교우는 사사로운 것이며 이것은 나랏일이니 감정 때문에 나랏일을 그르칠 수는 없소.'라고 일갈한 뒤 그의 군사를 격퇴했다. 출처는 엔하위키입니다.
@John Havlicek 하블리첵님 말씀대로 관우의 군대는 대부분 서황한테 당했습니다. 번성에 갇혀있던 조인을 구한 것도 서황군이죠. 연의에선 어이없게 맹달한테 이마에 화살을 맞고 죽지만 정사에선 유봉군을 상용에서 깨치고 220년쯤에서 병사할 겁니다.
@Show Time† 정사를 봤는데 서황과 관우의 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연의의 창작이 아닌가 싶고요, 그리고 서황은 227년에 사망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칭찬인가요? ㅎㅎ
근데 서주 대학살로 정의와 백성에 대한 사랑은 조조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죠.
둔전제는 지속적인 전쟁을 위한 기초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거 같고
근데 화웅은 걍 손견과의 전투중에 죽었다는 게 맞다는데요? ㅋㅋ
형주를 뺏기고 관우가죽은 책임을 제갈량에게 돌리시는건 좀 맞지않는것 같네요. 주유시대부터 오는 기본적으로 형주방어선을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였기때문에 형주방면으로 진출하는것이 필수였습니다.
제갈량과는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익양대치이후 형주일부지역을 오에 돌려주기까지 했는데요..
그리고 오와의 외교를 전담한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입니다. 유비가 있었을시 연의에서처럼 모든일을 제갈량이 다맡아서 한게 아니죠..
형주를 빼았긴것은 제갈량도 관우의 책임도 아니고 촉과 오의 상황이 그럴수 밖에 없었기 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