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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질문 고구려 때와 발해 때의 영토차이는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걸까요?
자유로운 쏘울 추천 0 조회 1,049 07.10.04 19:08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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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04 19:38

    첫댓글 밑에 2517번 제 글을 보시3 ㅡ.ㅡ

  • 작성자 07.10.04 19:58

    알겠3

  • 작성자 07.10.04 20:00

    보고 왔는데 결론은 그냥 말갈을 정복했으니까 그런 영토를 먹은거다. .... 말갈영토가 그 정도였나...추운데까지 살았네..

  • 07.10.05 13:15

    옜날에는 그곳이 지금보다는 조금 따뜻했다고 하네요.

  • 07.10.04 20:44

    간단하게...고구려 멸망시 전국토가 "휩쓸리진" 않았어도 모든 분야가 완성되고 굴러가던, 기본토대인 국가가 망한지 얼마 되었다고 완벽하게 고토수복을 했겠습니까..사견으로는 발해가 그정도 강성했던 것도 고구려의 포스,후광이라고 생각합니다.

  • 07.10.04 21:04

    한마디로.. 당나라가 요동 평양만 집중 공략해서 딴 지역은 고구려의 행정력이나 영향력이 그대로 있었다는 걸까요.. 그 상태에서 고구려의 후계자가 재빨리 등장하자 알아서 뭉친 걸까요..??

  • 07.10.04 21:53

    그런 거점공략의 영향으로 인한 여력도 있지만 망한지 얼마 안되어서 각 분야의 제도에 익숙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군사,경제,통치체계에 혼란을 안겪는 큰 이점(단순한 효율성을 넘어 큰 파급력) 이 있었다고 할까요.말그대로 여력이 많이 남아있단 얘기였습니다.종합적인 힘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겠죠.몽골에게 일방적이고 초토화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 07.10.04 21:12

    뭐 일단 요동을 상실했으니 동쪽으로라도 확장을 하자.... 이런거 아닐까요? 고려의 문제는 조금 복잡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광종이 즉위하면서 친신라쪽의 파워가 살아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런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그래도 일단 그 발해유민 3만은 상당한 핵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발해의 문화적 하이테크의 실질적 보유자들이란 얘기입니다. 이후에 만주에 남아있던 만주족의 경우는 문화적 역량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 발해와는 달리 만주에서 자립하지 못하고 중원으로 들어가서 중국화 되었습니다. 발해가 한국역사의 카테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유가 그때문이라고 봅니다.

  • 07.10.04 22:05

    고구려가 물길을 정복한것은 물길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북조왕조와 연결까지 했기 때문에 배후 위협을 없앨려고 물길을 정복했고, 발해는 역시 흑수말갈이 트러블을 일으켜 당에 복속하고 발해와 적대적으로 된 상황에서 당과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배후의 안전을 위해, 연해주의 말갈을 정복한거죠- 흑수말갈은 정복이 늦고 일시적이었지만, 독자적 외교관계를 가진 우루, 철리, 불열말갈을 정복한것은 결국 732~735년의 전쟁 때문에고, 정복시기도 74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ㅡ.ㅡ 정통성이니 고구려뽀쓰니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죠

  • 07.10.04 23:36

    현실적인 이유로 인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선 저변에 깔려 있는,다행스럽게 비교적 빨리 회복한 고구려포스(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 정도)라는 역량이 없었으면 애시당초 불가능했으리라 봅니다.발해의 원동력에 대한 제 사견이 그렇다는거고요,질문한 분에 대한 정답은 앨런비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07.10.04 23:55

    고구려는 초토화 되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인구밀집지역인 요동과 평안도부근이 70년간 대중국항쟁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중 상당수는 돌궐, 신라, 당으로 끌려가거나 이주하죠- 그 수를 무시할 수가 없는게- 돌궐로 간 사람중에는 돌궐가한의 사위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고구려계 사람들의 수는 급감한것이죠- 발해의 중심지이자, 대조영이 초기에 정착한 동만주지역은, 말갈족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계인들이 이주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계의 인구는 적은 편이었다고 추측됩니다-

  • 07.10.04 23:58

    그래도 구-고구려령에 고구려인이 어느정도 남아있긴 했으나, 이들이 발해를 택한것만은 아닙니다- 뻥조영에서는 대조영이 요동지역의 성을 공략한 것이라고 하나, 정작 실제역사에서는 거란군이 요동을 공격하자 고구려계인들이 이를 방어해서 당의 영토로 남게 했습니다-_-;; 요동지역이 고구려 멸망전에 얼마나 중요했느냐를 생각해보면, 이게 좀 난감합니다;

  • 07.10.05 03:50

    이전에도 몇 번 얘기한 바 있지만, "국경"과 "영토/영공"의 개념이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근세 이전의 역사에서는 "영토개념"을 "선"과 "면"이 아니라 "점"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부 '낙관적'인 지도들은 고대의 영토를 표시할 때 그 나라가 최고로 멀리 진출한 지점들끼리 줄긋기 놀이를 한 후에, 그 선 내부의 면적을 곧 영토(=국력..)이라고 이해하는데, 실제로는 그 나라가 보유한 "점"의 질이 훨씬 중요하거든요.

  • 07.10.06 00:39

    ..으음.. 으음.. 이해가 될듯도 하고..-_-; 제 머리가 나쁘네요..

  • 07.10.05 11:09

    KWEASSA햏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점이 가장 중요하고, 점들 사이를 잇는 '통행로'를 장악하는 것이 근세 이전의 전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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