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점공략의 영향으로 인한 여력도 있지만 망한지 얼마 안되어서 각 분야의 제도에 익숙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군사,경제,통치체계에 혼란을 안겪는 큰 이점(단순한 효율성을 넘어 큰 파급력) 이 있었다고 할까요.말그대로 여력이 많이 남아있단 얘기였습니다.종합적인 힘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겠죠.몽골에게 일방적이고 초토화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뭐 일단 요동을 상실했으니 동쪽으로라도 확장을 하자.... 이런거 아닐까요? 고려의 문제는 조금 복잡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광종이 즉위하면서 친신라쪽의 파워가 살아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런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그래도 일단 그 발해유민 3만은 상당한 핵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발해의 문화적 하이테크의 실질적 보유자들이란 얘기입니다. 이후에 만주에 남아있던 만주족의 경우는 문화적 역량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 발해와는 달리 만주에서 자립하지 못하고 중원으로 들어가서 중국화 되었습니다. 발해가 한국역사의 카테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유가 그때문이라고 봅니다.
고구려가 물길을 정복한것은 물길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북조왕조와 연결까지 했기 때문에 배후 위협을 없앨려고 물길을 정복했고, 발해는 역시 흑수말갈이 트러블을 일으켜 당에 복속하고 발해와 적대적으로 된 상황에서 당과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배후의 안전을 위해, 연해주의 말갈을 정복한거죠- 흑수말갈은 정복이 늦고 일시적이었지만, 독자적 외교관계를 가진 우루, 철리, 불열말갈을 정복한것은 결국 732~735년의 전쟁 때문에고, 정복시기도 74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ㅡ.ㅡ 정통성이니 고구려뽀쓰니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죠
현실적인 이유로 인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선 저변에 깔려 있는,다행스럽게 비교적 빨리 회복한 고구려포스(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 정도)라는 역량이 없었으면 애시당초 불가능했으리라 봅니다.발해의 원동력에 대한 제 사견이 그렇다는거고요,질문한 분에 대한 정답은 앨런비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구려는 초토화 되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인구밀집지역인 요동과 평안도부근이 70년간 대중국항쟁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중 상당수는 돌궐, 신라, 당으로 끌려가거나 이주하죠- 그 수를 무시할 수가 없는게- 돌궐로 간 사람중에는 돌궐가한의 사위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고구려계 사람들의 수는 급감한것이죠- 발해의 중심지이자, 대조영이 초기에 정착한 동만주지역은, 말갈족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계인들이 이주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계의 인구는 적은 편이었다고 추측됩니다-
그래도 구-고구려령에 고구려인이 어느정도 남아있긴 했으나, 이들이 발해를 택한것만은 아닙니다- 뻥조영에서는 대조영이 요동지역의 성을 공략한 것이라고 하나, 정작 실제역사에서는 거란군이 요동을 공격하자 고구려계인들이 이를 방어해서 당의 영토로 남게 했습니다-_-;; 요동지역이 고구려 멸망전에 얼마나 중요했느냐를 생각해보면, 이게 좀 난감합니다;
이전에도 몇 번 얘기한 바 있지만, "국경"과 "영토/영공"의 개념이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근세 이전의 역사에서는 "영토개념"을 "선"과 "면"이 아니라 "점"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부 '낙관적'인 지도들은 고대의 영토를 표시할 때 그 나라가 최고로 멀리 진출한 지점들끼리 줄긋기 놀이를 한 후에, 그 선 내부의 면적을 곧 영토(=국력..)이라고 이해하는데, 실제로는 그 나라가 보유한 "점"의 질이 훨씬 중요하거든요.
첫댓글 밑에 2517번 제 글을 보시3 ㅡ.ㅡ
알겠3
보고 왔는데 결론은 그냥 말갈을 정복했으니까 그런 영토를 먹은거다. .... 말갈영토가 그 정도였나...추운데까지 살았네..
옜날에는 그곳이 지금보다는 조금 따뜻했다고 하네요.
간단하게...고구려 멸망시 전국토가 "휩쓸리진" 않았어도 모든 분야가 완성되고 굴러가던, 기본토대인 국가가 망한지 얼마 되었다고 완벽하게 고토수복을 했겠습니까..사견으로는 발해가 그정도 강성했던 것도 고구려의 포스,후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당나라가 요동 평양만 집중 공략해서 딴 지역은 고구려의 행정력이나 영향력이 그대로 있었다는 걸까요.. 그 상태에서 고구려의 후계자가 재빨리 등장하자 알아서 뭉친 걸까요..??
그런 거점공략의 영향으로 인한 여력도 있지만 망한지 얼마 안되어서 각 분야의 제도에 익숙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군사,경제,통치체계에 혼란을 안겪는 큰 이점(단순한 효율성을 넘어 큰 파급력) 이 있었다고 할까요.말그대로 여력이 많이 남아있단 얘기였습니다.종합적인 힘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겠죠.몽골에게 일방적이고 초토화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뭐 일단 요동을 상실했으니 동쪽으로라도 확장을 하자.... 이런거 아닐까요? 고려의 문제는 조금 복잡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광종이 즉위하면서 친신라쪽의 파워가 살아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런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그래도 일단 그 발해유민 3만은 상당한 핵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발해의 문화적 하이테크의 실질적 보유자들이란 얘기입니다. 이후에 만주에 남아있던 만주족의 경우는 문화적 역량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 발해와는 달리 만주에서 자립하지 못하고 중원으로 들어가서 중국화 되었습니다. 발해가 한국역사의 카테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유가 그때문이라고 봅니다.
고구려가 물길을 정복한것은 물길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북조왕조와 연결까지 했기 때문에 배후 위협을 없앨려고 물길을 정복했고, 발해는 역시 흑수말갈이 트러블을 일으켜 당에 복속하고 발해와 적대적으로 된 상황에서 당과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배후의 안전을 위해, 연해주의 말갈을 정복한거죠- 흑수말갈은 정복이 늦고 일시적이었지만, 독자적 외교관계를 가진 우루, 철리, 불열말갈을 정복한것은 결국 732~735년의 전쟁 때문에고, 정복시기도 74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ㅡ.ㅡ 정통성이니 고구려뽀쓰니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죠
현실적인 이유로 인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선 저변에 깔려 있는,다행스럽게 비교적 빨리 회복한 고구려포스(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 정도)라는 역량이 없었으면 애시당초 불가능했으리라 봅니다.발해의 원동력에 대한 제 사견이 그렇다는거고요,질문한 분에 대한 정답은 앨런비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구려는 초토화 되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인구밀집지역인 요동과 평안도부근이 70년간 대중국항쟁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중 상당수는 돌궐, 신라, 당으로 끌려가거나 이주하죠- 그 수를 무시할 수가 없는게- 돌궐로 간 사람중에는 돌궐가한의 사위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고구려계 사람들의 수는 급감한것이죠- 발해의 중심지이자, 대조영이 초기에 정착한 동만주지역은, 말갈족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계인들이 이주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계의 인구는 적은 편이었다고 추측됩니다-
그래도 구-고구려령에 고구려인이 어느정도 남아있긴 했으나, 이들이 발해를 택한것만은 아닙니다- 뻥조영에서는 대조영이 요동지역의 성을 공략한 것이라고 하나, 정작 실제역사에서는 거란군이 요동을 공격하자 고구려계인들이 이를 방어해서 당의 영토로 남게 했습니다-_-;; 요동지역이 고구려 멸망전에 얼마나 중요했느냐를 생각해보면, 이게 좀 난감합니다;
이전에도 몇 번 얘기한 바 있지만, "국경"과 "영토/영공"의 개념이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근세 이전의 역사에서는 "영토개념"을 "선"과 "면"이 아니라 "점"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부 '낙관적'인 지도들은 고대의 영토를 표시할 때 그 나라가 최고로 멀리 진출한 지점들끼리 줄긋기 놀이를 한 후에, 그 선 내부의 면적을 곧 영토(=국력..)이라고 이해하는데, 실제로는 그 나라가 보유한 "점"의 질이 훨씬 중요하거든요.
..으음.. 으음.. 이해가 될듯도 하고..-_-; 제 머리가 나쁘네요..
KWEASSA햏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점이 가장 중요하고, 점들 사이를 잇는 '통행로'를 장악하는 것이 근세 이전의 전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