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산에 들어갔다. 아니다. 그 사이에 설움 많던 지방 대학생 시절이 있었고, 엄지발톱이 두 개나 빠진 전방 군대 시절이 있었고, 하루 네 시간 밖에 자지 못했던 신문사 기자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냥 어느 초가을 날의 입산으로 수렴되고야 만다. 삼십대 초반이었다.
기자 생활이 싫어 잠시 잠수를 탔던 나에게 지금은 저 세상에 계신 한 시인께서 연락을 주셨다. 내설악 백담사의 어느 스님께서 이 시인을 찾으니까 한 번 뵙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단풍이 막 물들던 초가을이었다. 당시에는 참으로 적절했던 내설악의 아름다운 길을 오르며 여기서 딱 한 철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님을 뵙고 나서 이 한 철이 수십 철로 바뀌게 될 줄은 몰랐다.
스님은 머리 긴 청맹과니를 퍽이나 아껴주셨다. 지금은 절 집안의 최고 어른인 조실스님이 되신 스님은 내게는 너무 큰 스님이었다. 청맹과니는 스님의 품 안에서 강원도의 사찰들을 두루 참배했다. 그 중에서도 백담사, 낙산사, 신흥사에는 반쯤 삭발한 내 머리털이 수북하다. 최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한 비구니 스님은 청맹과니가 모신 노스님의 모습을 공적인 트위터에다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한 번도 맨 정신일 때를 못 봤고, 한 번도 헷갈리는 때를 못 봤습니다.』 나는 이 비구니 스님처럼 노스님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내 몸 어딘가에, 내 머리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사무쳐 든 것 같다. 그것은 때로 칠흑 같은 백담사의 겨울밤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반딧불이가 춤추던 백담사의 빛나는 여름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중략)
그리고 마침내 다시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던 첫날 밤,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이제 고향은 저 멀리 던져버려야겠다/고향에 짐을 푼 첫날 밤, 이 한 구절이 섬광처럼 지나갔으나/계절이 바뀌어도 뒷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나는 아직도 나그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귀거래, 귀거래 전문)
나는 고향으로 돌아오되, 공간적인 고향만으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고향은 ‘나그네의 고향’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그네일 때만 참된 ‘고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내 턱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절집에서 몸에 익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간에서 절집에서 묻은 체취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때 섬광처럼 찾아온 말이 ‘건달’이었다. 건달이란 말도 원래는 건달반성이라는 불교용어에서 나왔다. 건달반성은 끝내 닿지 못하는 곳, 건달은 바로 이 신기루를 쫓는 자이다.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스님도, 시인도 끝내는 건달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경허스님도, 시인 백석도 천생 건달이었다. 건달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이 현생의 세간이다.
저 강원도 오지에서 비석 하나 매고 참 여러 곳을 지나 마침내 건달을 꿈꾸는 삶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초저녁 꿈속에서 난 왜 그리 개울처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꿈속까지 찾아갈 서러움이 남아있단 말인가. 이런 날은 나그네의 고향도, 건달의 길도 아조 멀리에 있는 것만 같다.
▶ 작가_ 이홍섭 – 시인, 평론가. 1965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일보 기자 역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강릉, 프라하, 함흥』 『가도 가도 서쪽의 당신』 등이 있으며, 유심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했다.
▶ 낭독_ 박웅선 –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에 출연.
▶ 출전_ ☜『대산문화』 2013년 겨울호
▶ 음악_ BackTraxx / mellow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이홍섭, 「나그네의 고향, 건달의 길」을 배달하며
삼 십 세. 새빨간 심장 하나가 산에 들었다.
적막한 골짜기 붉은 홍엽 위에 검은 갈기 떨어뜨려 놓을 때마다
마음은 비석을 하나씩 짊어졌다.
맨 정신이 아닐 때도 헷갈리는 일이 없는 노승에게
배운 것은 단지 ‘사무침’ 이었다.
하산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보니
대낮이 칠흑으로 보여, 제대로 한바탕 서러움에 겨워본다.
수 십철의 절밥이 허송은 아니었던 듯.
문학집배원 서영은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