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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묵상글 (8/24 21:20~:30, 04:55, 05:3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신부님(21:20), 호명환 신부님(21:20).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21:30).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 김찬선 신부님: 04:5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35 추가. >
# 사목자의 모습과 사명 관련 2편의 글 (8/24 21:20)
(조재형 신부님, Mark Choi 님)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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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러분이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2,1-3ㄱ.14-17)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2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3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1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복음<십일조와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마태23,23-2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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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주님의 말씀은 따끔하지만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
아주 작은 향료의 십일조까지 꼼꼼히 바쳤습니다.
그 정성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면서 정작 ‘더 중요한 것’ ―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를 ‘무시했다’는 데 있습니다.
작은 것에 매여 큰 것을 놓친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킨다’는 말씀이
이를 통렬하게 그려 줍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잔’의 비유를 드십니다.
“겉은 깨끗이 하면서 안은 탐욕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핵심을 일러 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성 대 바실리오는
이 ‘안과 겉’의 순서에 주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는 겉’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안(마음)’을 보십니다.
겉을 아무리 닦아도 안이 탐욕으로 차 있으면,
그것은 ‘회칠한 그릇’일 뿐입니다.
반대로 안이 맑으면 겉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바실리오가 늘 강조했듯,
참된 신앙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합니다.
바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 곧 ‘사랑’입니다.
‘사랑의 찬가’가 노래하듯,
아무리 큰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잔의 안쪽’을 채우는 것이며,
그 사랑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솟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작은 겉치레’에 매여 ‘큰 사랑’을 놓치지 않는가?
나는 ‘남에게 보이는 겉’부터 닦으려 하지 않는가?
나는 ‘잔의 안쪽(마음)’을 성령께 열어 드리는가?
나의 신앙은 ‘사랑’이라는 더 중요한 것 위에 서 있는가?
주님,
작은 겉치레에 매여 큰 사랑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먼저 ‘잔의 안쪽’을 당신께 열어 드리게 하시고,
그 안을 사랑으로 채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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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의 참 자아를 인식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참된 자아란 곧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곧 성령께서 내면에 현존하시는 신비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참 자아와 거짓 자아
우리의 참 자아를 인식하기!
2026년 8월 24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참된 자아의 특징과 그 목적을 더 깊이 설명해 줍니다:
참 자아를 찾고 다시 발견하는 일은 신앙의 기초이며, 가장 본질적인 과제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차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6–27).
여러분과 저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새겨진 내적 소명이며, 우리 존재의 진리를 알고 있는 절대적인 중심입니다. 이 참된 신앙인은 우리 존재의 지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드러나고 실현되며 허락받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되어,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서도록, 미리 예정되어 하느님의 아들들과 딸들로 입양되었습니다"(에페소서 1,4–5 참조). 이것이 바로 참된 자아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를 대개 "영혼"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존재 전체 안에서 하나의 역설을 드러내시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곧 인간성과 신성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이를 증언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같은 소명을 그렇게 거부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 놀랍고, 또 위험하게 느껴져서 참된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반대되는 증거도 너무 많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조차 전통 안에서 일관되게 전해지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합니다. 혹시 우리가 "신성을 짊어지는 부담"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마리안 윌리엄슨이 말하듯,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1]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정말로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믿는다면(1코린토 3,16; 6,19; 2코린토 6,16 참조),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자아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곧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참 자아는 바로 우리 내면의 신적인 일부로서, 인간적인 나약함을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크고 깊으며 은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만 머문다면, 우리 존재의 부족함과 한계를 부끄럽게 여기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역설적으로, 참 자아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교만이 아니라 깊은 겸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지만, 그것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며 결코 자신이 그런 자격을 얻기에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에페소서 2,8–9; 바오로 서간 전체 참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때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주저 없이 무릎 꿇는 일일뿐입니다.
성숙한 종교의 참된 목적은 우리를 끊임없이 참된 자아의 새로운 체험으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만일 종교가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종교일 뿐입니다. 모든 성사, 성경 이야기, 전례와 강론, 성가, 사제직과 봉사, 그리고 전례의 모든 요소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닙니다. 곧 우리가 참된 자아를 체험하도록, 곧 하느님 안에서의 우리 자신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넉넉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에고의 요구를 따를 때, 영적으로 눈멀게 될 수 있습니다. 외적 상황이 영원한 만족의 근원이 아님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늘 갈망하며 불행 속에 머뭅니다. 참된 기쁨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상태입니다. ‘내 방식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과 요구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맑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Dave A.
References
[1] Marianne Williamson, A Return to Love: Reflections on the Principles of “A Course in Miracles” (HarperCollins, 1992), 19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 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ith Traeger (Orbis Books, 2018), 71–7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k Haupt, untitled (detail), 2022, photograph.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각 조각마다 내재된 빛을 드러냅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돌파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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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006
2026.08.24 08:56
열린 하늘을 보는 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51절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을 훨씬 더 깊은 신비로 이끄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 말씀의 배경에는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사다리**가 있습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꿈을 꾸는데,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층계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야곱에게는 베텔이라는 장소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장소를 당신 자신에게로 옮기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새로운 베텔, 새로운 성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다리’가 아니라 ‘한 인격’이 계십니다 이 말씀을 육화의 신비 안에서 바라보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올라오라고 사다리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상승보다 하느님의 내려오심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높으신 분이 낮아지셨으며,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몸을 취하셨고,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상처와 눈물과 실패가 있는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길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죽은 다음 하늘에 가면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쩌면 닫힌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삶에서 열린 하늘을 발견하는 삶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공동체도 그대로이고, 함께 살아가는 형제도 그대로이며,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그대로이고, 반복되는 일과 피곤함과 갈등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눈이 달라집니다. 관상의 눈이 열리면 평범했던 일상이 베텔이 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는 자꾸 하느님을 특별한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바로 여기다. 네가 피하고 싶은 그 사람 안에, 네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 관계 안에,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되는 하루 안에,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작은 손길 안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마음 안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안에,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에서도 하늘은 그렇게 열렸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하늘이 열린 곳은 화려한 성당이나 황홀한 신비체험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환자를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존재, 역겨움과 두려움을 느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껴안았을 때, 그동안 닫혀 있던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회심은 어쩌면 하늘이 열린 사건이면서 동시에 눈이 열린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이 닫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환자가 하느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환자를 밀어내던 자기 자신이 만든 경계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계가 무너지자 프란치스코는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가난과 겸손과 형제성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가난은 나를 비우는 것이며, 겸손은 타자가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형제성은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서로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도 ‘열린 하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복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이어 주시는 분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사람들을 이어 주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밀려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 품어주고,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 용서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의 몸과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도 작은 육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하늘이 열리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신앙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내가 하늘이 되는 것 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늘이 열리도록 허용하는 것, 내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이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것,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그에게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묻는다면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하늘이 열리게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네가 사랑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네가 내려가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네가 자신을 내어주는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네가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너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열린 하늘은 어떤 장소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관계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의 삶은 그 열린 하늘을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내는 것, 곧 내려가고, 내어주고, 받아들이고, 형제가 되어 줌으로써 우리 관계 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육화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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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5 04:39
- 관상을 잘하는
어제는 강론을 올린 후 늘 하던 대로 오늘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복음을 미리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위선자를 질책하는 말씀이 나오자 아주 짜증이 나면서
또 이 묵상을 해야 하나? 이젠 제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과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교는 너무 사람을 죄인으로 몬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이런 묵상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그래도 억지로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지만 여러분을 위해 한다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것인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입에 쓴 것이 약임을 알면서도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머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경우 눈을 감음으로써 눈이 머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도 눈이 먼 것과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니까요.
내내 눈을 감고 보지 않으면 눈먼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다가 성무일도 낮 기도를 바치는데 시편의 다음 구절이 저를 때렸습니다.
“뜻 아니한 허물이야 누가 다 아오리까?
내 모르는 잘못에서 나를 깨끗이 해 주소서.
행여 교만이 이 종을 지배할세라 막아 주소서.”
아! 또 교만.
많이 겸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교만이 또 저를
보지도 않게 하고 인정도 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되면서 어제 나타나엘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어제 나타나엘은 자기의 편견과 과오를 즉시 인정하면서
하늘 문이 열리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에 가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데
이런 나타나엘에게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곧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그곳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꼬락서니 곧 자기의 위선과 눈멂을 보는 것,
보기 싫은 자기 꼴을 보는 것에서부터 관상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꼴도 보기 싫지만
자기 꼴/꼬락서니를 보는 것이 제일 싫습니다.
어쩌면 자기 꼴 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을 꼴 보기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눈의 티는 잘 보듯이
자기로 향하는 괴로운 시선을 남에게 돌리려고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대로
우리 안이 온통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보기 싫어서 겉꾸밈 곧 위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으로 이런 자기 꼬락서니를 보는 것에서부터 자기 관상이 시작되고,
이렇게 시작된 관상은 점차 이웃 관상과 하느님 관상으로 이어지고 완성됩니다.
우리는 한가롭게 다른 사람 관상을 보며 관상이 어떠니저떠니 하는,
그런 관상(觀相)은 하지 말고 자기 관상-이웃 관상-하느님 관상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상(觀想)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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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5. 연중 제21주건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2026.08.25. 05:03
예전에 한 번 인용해 드렸던 내용을 다시 한번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합니다.
5세기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쓴 [마태오 복음에 대한 미완성 주석]에서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무덤이 닫혀 있을 때는 겉모습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열리면 끔찍하게 드러납니다. 위선자들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때는 칭송받을 만해 보이지만, 정체가 밝혀지면 혐오스럽게 드러납니다. 위선자여, 묻습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어찌하여 겉으로만 선한 체하면서 참으로 선해지려 애쓰지 않습니까? 악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다면, 왜 겉으로는 숨기면서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방치합니까?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가 일치하게 하시오. 아니면 실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시오.'"
이 통렬한 비평의 시선 앞에서 우리 모두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변명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서 작은 길을 열어줍니다. 곧 "실제 모습 그대로 드러내시오."
'내'가 적어도 조금은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드러낸다면, '나'는 더 이상 위선자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비록 그 모습이 부끄럽더라도 '나'는 진리 안에 서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요한 8,32)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감추어 두는 것은 풍성한 흙 속의 씨앗처럼 자라납니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낸 것은 바람에 흩어져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 안의 나쁜 점은 숨기고 좋은 점은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나쁜 점은 점점 커지고, 좋은 점은 흩어져 버립니다.
만약 우리가 반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좋은 점은 감추고(적어도 떠벌리지 않고), 나쁜 점은 솔직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요령만 부리려 하고, 곤란을 피하려고 거짓말도 하고, 게으르다…" 등등... 이렇게 고백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게 되고, 오히려 그 익명의 저자 앞에서 눈을 마주할 용기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되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우리는 진솔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어찌 보면 우리의 참 자아가 우리 내면에서 던지는 질문인지 모릅니다. 참 자아는 그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CAC 매일 묵상에서 리처드 신부님이 강조한 말씀을 상기해 봅니다.
"참 자아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곧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참 자아는 바로 우리 내면의 신적인 일부로서, 인간적인 나약함을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크고 깊으며 은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역설적으로, 참 자아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교만이 아니라 깊은 겸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지만, 그것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며 결코 자신이 그런 자격을 얻기에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참 자아는 현세의 지나나는 것들, 찰나의 만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영원하고 참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기에 지금 부족한 것을 넓은 마음으로, 즉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그 부족함과 허물을 채워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끌어안아 주시는 분은 바로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참 자아는 그런 찰나적인 것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이 찰나의 세상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늘 상기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외적이고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들뜨거나, 지금 당장 불만족스럽고 실망스러운 것, 심지어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연연해 하지 않고 초연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완전한 "초연"은 아닐지라도 그런 것들을 "허허~ 인생이 그런 거야.~" 하며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자신의 글들에서 간혹 강조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진심 있게 살고자 한다면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충동 억제"와 "만족 지연"을 애써 배워야 하고, 이런 사람이 또 다음 세대에게 그런 덕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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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목자의 모습과 사명 관련 2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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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조재형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5&id=2136349&menu=4770
260824. 04:24 ㅣNo.19139
알래스카 앵커리지 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후배 신부님이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교구장님의 부탁으로 다섯 개의 성당을 맡아 돌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신부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 다섯 성당을 모두 다녀왔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8년 넘게 알래스카 현지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습니다.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저를 위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성당의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웬만한 것은 직접 수리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당에 청소하러 오는 한 형제님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부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에게 연락하여 탄원서를 준비하고, 마치 자기의 일처럼 그 형제님을 도와주었습니다.
언어를 잘하고, 음식을 잘하고, 손재주가 좋은 것도 훌륭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제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어쩌면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사제의 직무를 세 가지로 배웠습니다. 교직, 제사직, 예언직입니다. 첫째는 교직입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강론을 성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신자들에게 충실히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선포하고 가르친 말씀을 정작 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못했고,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하지 못했으며, 겸손을 말하면서 제 생각을 앞세울 때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냅니다. 첫 미사를 봉헌하던 그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고백성사와 병자성사도 온 마음을 다해 집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은 때로 정성을 빼앗아 갑니다. 돌아보면 형식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습관적으로 성사를 집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기도하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예언직입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동시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말을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제가 필요해서 사람들을 만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지난 35년의 사제 생활을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사제 생활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 시절 읽었던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라는 글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사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 성사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집전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제가 잘한 것보다 부족했던 것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직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칭찬도 아니고 화려한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사제복을 입고, 강론을 하고, 성사를 집전한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마음의 잔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욕심, 독선과 무관심을 비워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채워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잔의 겉만 깨끗이 닦는 것과 같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형제님을 위해 자기의 일처럼 나섰던 후배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의로움은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는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서는 것입니다. 신의는 어려울 때도 사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직책은 언젠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힘없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었던 사랑은 하느님 앞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저도 앞으로 남은 사제 생활 동안 겉모습보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보여 주는 사제, 힘없고 억울한 사람의 곁에 서는 사제, 기도와 성사를 정성껏 드리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마음의 잔을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 미움과 욕심과 교만이 있다면 깨끗이 비워 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채워 넣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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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연중 제21주간 화요일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6&id=2136368&menu=4770
Mark Choi [mychoi1960] 260824. 14:23 ㅣNo.191412
따뜻한 묵상 잘 읽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형제님의 곁에 서서 자기 일처럼 도와주신 후배 신부님의 모습에서 참된 사목자의 모습을 봅니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려운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참으로 귀한 사랑이지만, 공동체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관심과 배려와 돌봄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 역시 사목자의 중요한 사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도 신학적 지식과 성사 집전뿐 아니라, 실제 사목 현장에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갈등을 어떻게 풀며, 힘없고 상처받은 신자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돌볼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교육이 조금 더 강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사목 현장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성소를 받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두 가지 극단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과 요구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판단과 권한을 너무 앞세워 사람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그 중간에서 복음의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균형이 아닐까 합니다.
억울한 사람을 위해 나서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일상적인 자리에서 내가 맡은 공동체의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상처받지 않도록 살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목의 가장 기본적인 사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기를 저 자신부터 함께 묵상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this beautiful reflection. Helping someone who is suffering or treated unjustly is certainly an important part of pastoral love.
But I also believe that caring for the people already entrusted to a priest’s community—so that they are not unnecessarily hurt, neglected, or treated unfairly—is an equally important part of pastoral ministry.
Perhaps seminary formation could place more emphasis on the practical skills of listening, caring for people, and handling pastoral conflicts. I sometimes see two extremes: priests who are too easily influenced by others, and priests who may not listen enough to the people entrusted to them.
Perhaps true pastoral leadership is finding the humble balance between the two—standing firmly for what is right while keeping the heart open to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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