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8. 큐티
마태복음 20:29 ~ 34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관찰 :
1) 여리고에 있던 두 소경을 만나는 배경
- 29절.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은 여리고를 지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리고를 지나면 이제 곧 예루살렘에 도달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이들이 몰려와서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있었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과 제사장 그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두 명의 소경이 있었습니다.
2) 두 명의 소경
- 30절.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 이들 두 명의 소경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에 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기 보다는 원래 그곳에서 구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 이들은 전에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놀랍게도 이들 소경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른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그들의 외침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만나지도, 주님의 메시지를 듣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하여 그분이 ‘주’이시고, ‘다윗의 자손’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 이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했으나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오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즉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큰 무리가 불편함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이들은 아랑곳없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단순히 불렀다기 보다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두 소경의 간절함은 무리의 꾸짖음을 넘어섰습니다.
3) 소경들이 눈을 뜨다
-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이 질문은 사실 답이 정해진 질문입니다. 주님이 모르고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소경들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드러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 33절.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소경들은 주님의 질문에 대하여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두 소경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해 주셔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 34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치병기적을 일으키시는 중요한 동기이십니다. 주님은 이들을 무시하고서 빨리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집중하실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 두 소경의 간구 정도는 무시하고자 하실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간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와중에도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 천국의 속성을 다시금 보여주시는 장면이라 할 것입니다.
- 주님이 두 소경의 눈을 만지셨고, 곧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 못 고치실 질병이나 장애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들이 어디까지 따랐을까요? 예루살렘에 따라와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까지 따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았던 듯 싶습니다. 이들에 대한 행적은 그 뒤에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바라바와 예수님을 선택하는 순간에 있었다면, 목숨을 걸고, 큰 소리로 부르짖음으로 무리들의 선동을 막아섰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자신들의 가족에게로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초대 교회의 예수님의 증인으로 섰을 것이라는 기대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가르침 :
1)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차대한 상황 속에서도 두 명의 소외받은 소경에게 집중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중심입니다.
2) 큰 무리들. 이들이 결국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로 변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대신 바라바를 달라는 자들이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며 돌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고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소경은 비록 육신의 두 눈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주’로,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바쁜 와중에도 이 기사를 집어넣음으로 맹목적인 큰 무리들과, 그들 속에 숨겨진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를 바르게 보고 있는 두 명의 소경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역설입니다!
3) 두 소경이 그렇게 치유를 받은 원인은 간절함이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애걸복걸하는 간절함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로 볼 때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애걸복걸 하는 자들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4) 소경들은 무리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하라는 무리들의 권면을 무시할 때, 나중에 얼마나 욕을 먹을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에게 동냥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 두려움을 넘어섰습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을 진정으로 도와줄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소경들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5)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백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발생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인생을 보시는 기본적인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얻는 것이 세상의 무엇보다 나은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기본은 그렇기에 우쭐한 종교지도자의 기도가 아니라, 마음이 이미 부유해서 주님을 나이스하게 대하는 기도가 아니라,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이 두 소경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주님의 마음이 곧 천국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대의를 위해 소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반응하는 사역자, 진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그렇게 천국이 임해서 주님과 같이 한 영혼에 집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복음서는 언제나 선명합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이들이 등장하고, 다시 한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 속에 언제나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상황 속에서 나의 문제가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이 사람들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오곤 합니다. 이런 것이 우울감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예수님을 더욱 묵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예수 충만을 간절함으로 간구드립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