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다니 9,4-10; 루카 6,36-38 / 2024.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사자굴에 떨어질 절대절명의 위기를 앞두고 하느님께 절절한 심정으로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자기 자신이 살아온 바를 성찰하거나 자신의 죄를 뉘우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 살아온 바를 성찰하면서 동족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동족에게 경고했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떠올리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스라엘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거역하였다는 죄와,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지 않았다는 죄입니다. 그들이 다른 주변 강대국들처럼 약한 나라를 침략했다는 죄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동족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지 않았다는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민족의 지도자로서 다니엘이 기도한 같은 잣대로 삶을 성찰하고 죄를 가려내자면, 세상이 말하는 정의의 잣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라는 잣대로 성찰하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불의하고 이기적인 세상 풍조 안에서, 세상을 하느님의 뜻과 빛으로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맺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자비로우며 얼마나 정의로웠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에 관한 진복팔단의 말씀이 적중합니다(마태 5,3-10).
- 하느님 나라를 약속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멀리 하지 않았는지,
- 불의한 일에 슬퍼하며 서로 위로했는지,
- 하느님께 온유한 이들끼리 연대하며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 옳은 일에 주저없이 나서 보았는지,
- 자비를 베푸는 일에 용감하고 베풀어진 자비에 감사했는지,
- 이 모든 순간에 기도로써 우리 마음을 하느님 앞에 깨끗하게 정화시켰는지,
- 평화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작은 행동이라도 힘을 보태 주었는지,
- 그리고 이 모든 선행으로 오해와 의심과 비협조로 안팎에서 박해를 받을 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의 덕행과 감사의 마음을 견지할 수 있었는지 하는 여덟 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자비와 심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분이시지만 그 심판의 잣대는 자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야 하며 그 자비의 잣대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심판하거나 더구나 단죄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심판주이시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게다가 한없이 당신의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조성하시고 생명을 지어내시되 이를 조건 없이 먼저 선물로 주셨으며 그것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자비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계기는 우리에게 당신을 닮으신 구세주를 보내주신 강생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의 조건에서 그리고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회악 조건에서 당신께서 창조하실 때 섭리하신 길을 가는 방식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요약한 교리 용어가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는 강생으로 시작되어 부활로 완성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양식으로 현존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부활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이 강생과 부활이 한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자비입니다. 특히 강생으로 인한 자비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절박한 은총이며, 부활로 인한 자비는 우리 자신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은총입니다. 그러자면 예수님의 지향과 처신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시되, 세상의 악을 늘 의식하시며 맞서 대결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긴장스런 국면에서 그분의 처신은 매우 대조적이었음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 국면에서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또 다른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입니다. 즉, 아주 보잘것없는 이들이라도 귀하게 대해야 하며, 물 한 잔 주는 일 같이 하찮은 일이라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해야 합니다. 이 작은 이들, 이 작은 일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빅 이슈(Big Issue)입니다. 먼저, 무상으로 그리고 한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우주를 새로 창조하시는 듯한 정성으로 이 작은 선행을, 작은 이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이는 강생의 예수입니다.
한편 세상의 악이 판치는 국면에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천하의 권세와 재물과 영예를 줄 것처럼 유혹할지라도 그런 세속적인 것들은 하느님의 말씀 한 조각보다도 못한 쓰레기로 낮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연, 지연 등 갖가지 명목으로 유혹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聖)은 성이고 속(俗)은 속이니까요. 세속적인 것들은 아무리 커 보여도 아무런 흔적 없이 결국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비에 대해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이러한 오늘 미사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일으킨 전쟁이 3년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작년에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도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이-팔 분쟁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서, 갈수록 폭력이 악순환되고 있는 최악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민간인 사상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사태는 국제적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분쟁의 시발점과 배경이 된 것은 공교롭게도 우상숭배 풍조가 기승을 부리던 수메르 문명권 칼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문명을 이룩하라는 것이었는데도, 이스라엘 유다인들의 편협된 선민의식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배타적인 텃세가 맞물리는 바람에 해결되지 못한 채 두 세력 모두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역사적 피해자로서 오늘날의 비극을 빚고 있습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인들을 비롯한 중세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부당한 박해, 20세기 영국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들의 사악한 음모, 미국 내 유력한 유대 자본의 일방적 이스라엘 지지 등이 맞물려서 도무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는 상반되는 사람들의 죄가 쌓이고 쌓여 가는 대표적 징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절박하기는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 세 나라 사이에서는 첨예한 긴장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배하는 중국에서는 지역패권을 넘어 세계패권을 노리는 제국주의 노선이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를 상시적으로 위협하고 있는가 하면, 과거 군국주의 노선을 추진했던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끼치고 패전했던 과거의 야욕과 죄과를 반성하기는커녕, 미국의 일방적 두둔에 힘입어 마치 역사의 면죄부라도 받은 듯이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추구하며 한일 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의 대결적 냉전구도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가로막고 있기도 합니다. 민족이 화해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기운이 무르익는가 했더니 어느 새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수구 세력이 한반도 정세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공동 번영과 평화 공존의 기운을 삼키려고 노리는 가운에 또 한반도에서도 평화가 실현될 날은 도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평화가 정의의 열매이기는 합니다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자비의 열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현하려는 노력만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하느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극서와 극동 지방에서 평화가 실현되는 날이 오기는 올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니엘 예언자가 민족의 지도자요 예언자로서 유배지 바빌론에서 동족의 죄상을 고백하며 참회했던 심정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탁한 기운이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하느님의 자비에서 우러나올 평화의 기운을 더욱 맑게 샘솟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비와 평화가 하느님의 선물을 믿는 사람은 어둠을 탓하지 않고 빛을 반사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조건 없이 무상으로 먼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역사적 진리를 믿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는 일은 우리의 당연한 임무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에서 들려온 귀한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