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면, 그 냄새와 더불어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 내 할머니, 다만 김씨 성을 가졌다는 것만 알 뿐 그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그녀의 건강한 치아는 아버지에게 이어지고 나에게도 이어졌다.
그녀의 똘망한 얼굴도 아버지에게 이어지고 나에게 이어졌다.
아버지는 그 얼굴로 바람을 피웠다.
그 냄새, 장마가 시작되기 전, 할머니와 살았던, 그 집 마당은 뜨거운 태양빛으로 데워져 먼지가 날 정도였다. 이윽고, 장마비가 시작되면, 황토 마당은 적셔지면서 흙냄새를 풍겼다. 기분 좋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냄새를 못 잊는가보다. 할머니 그녀와 함께.
비가 내리면 난 할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아 멍하니 비를 쳐다 보았다.
우리가 살던 기와집은 높은 산 중턱에 있었기에 마을 동네가 내려다 보였다.
마을 에서는 갑작스런 비로 인해, 따뜻한 흙바닥과 충돌하여 물안개가 피어 올랐고.
그러면, 할머니는 부엌으로 달려가 순식간에 장떡을 부쳐 온다.
장떡은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과 된장을 섞어서, 할머니가 손수 키운 밀을 말리고 갈아서 만든 밀가루로 만든 명품 요리였다.
나는 그 보다 맛있는 요리는 그 후 먹어보지 못했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고추장과 된장과 밀가루 뿐인데도 말이다.
할머니 그녀는 특급 요리사이기도 했다.
장떡을 먹고 나서 할머니와 나는, 벙거지를 뒤집어 쓰고, 바로 앞 북낙풍천으로 비 구경을 나갔다.
나무 토막과 함께 가끔 돼지 새끼도 떠내려왔다.
녀석들 구조해서 할머니와 키웠던 기억도 있다. 그후 돼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아마, 추석 때 잡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해 추석의 산적은 소고기가 아닌, 돼지 고기 였으니.
어린 놈이라 부드러워서 난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서 자주 이사를 해서, 나를 명주군 옥계면 낙풍리, 내가 태어난 곳의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의 손자들 중에 유일하게 할머니와 오랫동안 같이 살아서, 내가 강릉으로 나가서 학교에 다닐 때면, 나를 보러 강릉시내로 나오셨다.
꼭 장떡을 싸가지고 오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왜 나왔냐고 투덜거렸다.
낙풍리에서 강릉시내로 나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차로 운전을 하면 30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때는 하루가 걸렸다. 하루 두 번 오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옥계면의 중심지 현내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시간을 걸어야 했다. 버스의 시간은 제멋대로였다.
오전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할머니는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버스를 한 시간 정도 타고, 강릉에 도착하면, 남대천 다리 건너기 전에 내려서, 한시간을 걸어서야 월대산 밑 우리집에 도착을 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할머니가 나타나면, 달려가서 안겼다. 할머니에게서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났다. 아마 장떡을 하느라 몸에 밴 것 일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장떡을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동생들 오기 전에 빨리 먹으라는 할머니의 지시로.
그녀, 할머니와 장떡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했다.
초등학교 4 학년 때, 큰댁에서 할머기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도 할머니의 치아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동안은 저녁 무렵 노을지면 할머니 생각에 울었다.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 정도에 돌아가셨다. 장마비가 내리는 지금, 할머니 생각에 먹먹하다.
장떡이 먹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를 위해 장떡을 해주던 그녀 할머니는 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