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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학번③]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한총련 학생운동
이제는 50대 전후, 공안탄압 견딘 세대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1996년 8월 연세대에 있던 사람들 찾는다... 2028년 2월까지
인하대 연구교수 김갑봉
오늘은 광복절이다. 30년 전 오늘 나는 봉쇄된 연세대 교정에 있었다. 그날 그 교정에서는 제7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이 열리고 있었고, 전날 전경 51개 중대와 헬기 11대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술자리에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80년대에 학생운동을 했다는 선배들이 묻는다. 90년대에도 학생운동이 있긴 했냐.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나는 웃지 못한다.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숫자가 답한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아흐레 동안 5899명이 연행됐다. 1986년 건국대 사태 1526명의 네 배 가까운 규모이자 단일 사건 최대 기록이다. 있긴 있었냐는 물음에 이 숫자를 되돌려 드린다.
1. 1년에 두 번, 같은 형식으로 죽었다
1996년 3월 29일 연세대 법학과 95학번 노수석 열사가 한총련 집중 집회 때 서울 을지로 시위에서 죽었다.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외치던 날이다. 경찰은 부검 결과를 내인성 심장마비라고 발표했다.
1997년 3월 20일 조선대 2학년 류재을 열사가 광주에서 죽었다. 남총련 개강선포식 뒤 시위에서 맨 앞에 섰다가 쓰러졌다. 부검 결과는 심장질환에 따른 급사로 발표됐다. 1년 사이에 스무 살 청년 둘이 시위 현장에서 죽었는데 국가의 답은 두 번 다 심장이었다.
그해 9월에는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열사가 죽었다. 2001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냈다. 형사가 특진을 노리고 사비로 향응을 제공해 지인을 프락치로 만들었고, 김준배는 은신처를 급습당해 아파트 13층에서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다 숨졌다. 위원회는 경찰이 쓰러진 그를 구타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갈비뼈가 양쪽 다 부러졌는데 얼굴에는 외상이 없었다.
당시 광주북부경찰서 형사과장은 위원회에서 제2의 류재을 사건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대통령 선거를 석 달 앞둔 때였다. 죽음조차 정국 관리의 대상이었다.
2. 당선증이 수배장이 됐다
1997년 검찰이, 1998년 대법원이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총학생회장이나 단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면 한총련 대의원이 되고, 대의원이 되는 순간 국가보안법 수배자가 됐다. 당선증이 수배장이었다.
2003년 연합뉴스가 정리한 정치수배자 명단에 176명이 실려 있다. 전부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단과대 학생회장, 동아리연합회장, 총여학생회장이다. 긴 사람은 7년째 수배 중이었다. 1997년에는 경찰 수백명이 특진했는데 모두 한총련 수배자 검거 공로였다.
그런데 구속자 통계를 보면 이 탄압의 실체가 드러난다. 한총련 대의원 구속자는 2000년 71명, 2001년 72명, 2002년 90명이다. 그 가운데 실형은 2000년 1명, 2001년 3명이다. 잡아 가두되 처벌하지 않았다. 죄가 무거워서 잡은 게 아니라 잡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낙인이 목적이었다.
낙인은 사회 전체로 번졌다. 1996년 연세대 진압 직후 검찰과 경찰은 한총련 와해작업에 주력하겠다고 밝혔고, 대학마다 대자보 검열이 부활했다. 경제 5단체는 입건되거나 구속된 학생에게 취업 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논의했고, 검경은 PC통신망 폐쇄를 요청했다. 국가와 대학과 기업과 통신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승아는 2000년 이화여대 석사논문에서 이 과정을 담론분석으로 정리했다. 한총련이 미디어 담론 속에서 친북 세력으로 오염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그려졌으며, 그 위기 구성이 정부의 물리적 탄압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3. 군복을 입고 수배자와 커피를 마셨다
나는 1996년 연세대에서 연행돼 기소유예를 받았다. 1999년 9사단에 입대했다. 낙인은 군대까지 따라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할 때 나는 내무반을 떠나 있어야 했다. 부대가 전방 철책으로 이동할 때는 특별 관심대상이었다. 중대장이 책임지고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부대원들과 떨어지지 않고 군생활을 마쳤다.
휴가를 나왔을 때 대학 동기를 만나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 친구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수배가 떨어진 처지였다. 한 사람은 국가의 군복을 입었고 한 사람은 국가에 쫓기고 있었다. 같은 스무 살이었다. 미안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수배를 접고 경찰에 자진 출석해 정리한 뒤 군에 입대했다. 이적단체 대의원이라던 사람을 국가가 다시 군인으로 받았다. 지금 그는 공직자로 일한다. 낙인에 실체가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낙인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다.
4. 한총련도 오판했다, 그러나
낙인을 걷어내자면서 안쪽을 덮을 수는 없다. 나는 당시 한총련 지도부가 오판했다고 생각한다. 연세대 이후에도 대의원대회는 전민항쟁 노선과 학생운동 전위대 투쟁을 고집했다. 대중과 괴리된 교조주의였다. X세대에게 전민항쟁이라니, 낡은 형식이었다. 그 오판이 학생운동을 안에서 무너뜨렸다.
그러나 오판이 국가폭력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시위 노선이 틀렸다는 것과 최루탄 직격, 곤봉 구타, 프락치 공작, 7년 수배가 정당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1999년 법원은 이미 연세대 진압에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3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28년 2월 25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받는다. 한총련 96학번 모임이 집단 조사를 신청하고 있다. 당시 경희대 총학생회장이자 서총련 동부지구 의장으로 그 자신이 붙잡혔던 김종욱이 실무를 맡고 있다.
5. 재조명이 필요하다
그 시절을 비웃던 세대는 어떻게 살았나. 지금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선 얼굴들도 386이다. 1997년 외환위기부터 30년 가까이 이 세대가 사회권력과 정치권력을 쥐어 왔다. 그 사이 한국 사회 모순은 깊어졌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는가. 크지 않은가.
그 30년 동안 90년대 학번들은 386이 권력을 누리는 무대를 실무로 떠받쳤다. 90년대 중반 공안탄압을 견딘 한총련 세대가 이제 50대 전후다. 이들이 현재 한국 사회 민주진보 진영을 굳건히 뒷받침하고 있다.
통일운동의 궤적도 이 세대와 함께 꺾였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민간 영역이 이끌던 평화통일운동은 정부와 지자체 영역으로 제도화됐고, 민간 운동은 그만큼 퇴조했다고 나는 본다.
권기태와 남승균은 2020년 인천학연구 논문에서 6·15 이후 시민사회가 지자체와 함께 평화통일운동의 한 주체로 기여해 왔으나 이제 역할 증대와 새로운 방향 모색을 요구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남북이 적대적 두 국가로 치닫는 지금이야말로 민간 평화통일운동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그 운동의 마지막 대중적 세대가 바로 이들이었다.
학계 연구도 비어 있다. 1990년대 학생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논문은 최근에야 나오기 시작했다. 연세대 사례로 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를 짚은 연구(이세영, 2021)와 1990년대 학생운동 경험을 구술로 복원한 연구(김시연, 2020)가 그 시작이다. 국가폭력 트라우마 연구(김석웅, 2020)는 제주4·3과 여순과 5·18 피해자를 다뤘는데, 한총련 사건을 직접 다룬 트라우마 연구는 아직 찾기 어렵다. 5899명이 하루아침에 연행된 사건이 연구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세대에 대한 재조명과 연구가 필요하다. 있긴 있었냐는 물음에는 조롱을 되받는 대신 기록으로 답한다. 그 기록을 만드는 일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김종욱은 벽보 한 장과 페이스북 글로 1996년 8월 연세대에 있던 사람들을 찾고 있다. 1차 신청은 7월 31일 마감됐고 대상을 넓힌 2차 신청이 준비되고 있다. 접수는 2028년 2월 25일까지 열려 있다. 구속되거나 연행됐던 사람, 다친 사람, 오랜 트라우마를 안고 산 사람이 모두 대상이다.
30년 전 오늘 봉쇄된 교정에 있던 당신의 이야기가 기록이 된다. 광복절 아침에 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상철, 「한총련 사태 총점검 - 통계로 본 시위·진압 실태」, 한국일보, 1996.8.24.
· 「한총련사태 전말」, 한겨레, 1996.8.21.
· 「학생들 부상전경 사망 소식에 고개 떨궈 - 한총련 수사 이모저모」, 서울신문, 1996.8.23.
· 김선숙, 「폭력시위자 채용제한」, 국민일보, 1996.8.25.
· 이동훈, 「PC통신 투쟁지침 계속 - 검경 통신망 폐쇄 요청키로」, 한국일보, 1996.8.25.
· 고제규·차형석, 「4년 만에 드러난 김준배 사망 사건의 진실」, 시사저널, 2001.9.13.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08
·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 명단」, 연합뉴스(통일뉴스 게재), 2003.4.8.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976
· 이승아, 『정치적 억압을 위한 위기의 담론분석 - 1996년 한총련 사태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이세영, 「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와 혁신의 모색 - 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학림』 48집, 연세사학연구회, 2021, 125~162쪽.
· 김시연, 「2010년대에 '학생운동' 말하기 - 1990년대와 2010년대의 학생운동 경험 구술과 '우리'의 구성」, 『대중서사연구』 26권 1호, 대중서사학회, 2020, 135~174쪽.
· 김석웅, 『국가폭력 트라우마 경험에 대한 근거이론적 탐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 권기태·남승균,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인천지역 시민사회 평화통일운동 연구」, 『인천학연구』 33권,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20, 125~164쪽. DOI 10.46331/jis.2020.08.33.125
· 박신애, 「한총련 연세대사태 상해 대학생들, 손해배상받는다」, 법률신문, 1999.11.12. (서울지법 제14민사부 1999.11.9. 선고 96가합85101)
· 「97년, 오직 한총련만 싸웠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현장언론 민플러스, 응답하라 한총련 연재. https://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65
· 이민우, 「1996년 연세대 사건 국가폭력 진실규명, 한총련 96학번들 직접 나선다」, 뉴스피크, 2026.7.8.
· 서영빈,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명예회복을 요구한다」, 통일뉴스, 2026.7.11.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3기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안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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