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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갤러리 미술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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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 갤러리] 스크랩 오르세 미술관 작품
rose 장혜숙 추천 0 조회 144 07.04.28 1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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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낭의 장례식 -귀스타프 쿠르베 1849~1850 캔버스의 유화

쿠르베는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의 최고의 거장이다. 밀레나 도미에 같은 훌륭한 사실주의 예술가들도있지만 이 사조의 맨 앞자리는 늘 쿠르베의 차지이다.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이 경험하고 확인한 것만을 그렸다.기독교 소재와 신화소재는 물론이고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표현했던 동방과 고대의 풍경 또한 그에게는 허황되고 거짓된 것이었다.

왼쪽에서는 검정 옷에 검정모자를 쓴 네 사람이 흰 띠로 관을 메고, 검정 십자가를 높이 들고, 교구장인신부와 함께 입장한다. 신부는 성서를 읽으며 장례식을 집행하고 있고, 무덤을 파다가 나온 일꾼은우리 앞쪽으로 판 직각의 무덤 앞에 엄숙히 무릎을 꿇고 떠나간 사람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한다. 그 뒤에는 붉은 가운을 걸친 두명의 집사장이 서 있다. 무덤 주위에는 가족들이 슬픔의 눈물을 참으며둘러 서 있고,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가족들도 있다. 흰 개 옆에 있는 망토를 걸치고 짧은 가죽바지를 입고 파란 긴 양말을 신은 사람은 오르낭의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의 뒤에 있는 젊은소녀는 시장이 딸이고, 그의 어깨 너머에서 흰 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여인은 시장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 오른쪽으로 선 검정옷을 입은 세 여인들은 쿠르베의 여동생들이라고 전한다.40명의 인물들이 겹겹이 장례식장을 메우고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무덤을 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부나 관에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초점이 없고, 그들의 멍한 표정은 무관심과체념에 가깝다. 이는 장례식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실생활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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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 L' Olympia 1865년) -에두아르 마네 (캔버스에 유채,130.5x190cm)
<올랭피아>란 제목?아스트뤼크의 시에서 따왔지만, 프랑스의 홍등가에서 즐겨 쓰던 여인들의가명이다. 그림의 착상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떠올랐으며, 누워 있는 상류층의 여인 대신 매춘부로 대치했다. 여인은 머리에 장미 대신 난을 꽂고, 주인에게 충실한 개 대신 성적으로 방종한 검은 고양이로 바꾸었다. 하인들이 함에서 의복을 꺼내 오는 대신에 흑인하녀가
고객이 보낸 듯 한 꽃을 들고 오는 현대적인 감각을 살렸다. 문제는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상류사회의 부인이거나 첩을 암시하는 비너스같이 아름다운 누드인데 반해 마네의 누드는 시골에서돈을 벌기 위해 파리에 온 처녀이거나 석탄을 나르는 여인같이 보인다.
올랭피아는 신선미나 인간미도 없이, 고릴라처럼 국부를 손가락으로 가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여자의 얼굴은 겉늙고, 손은 더러우며, 주름잡힌 발에는 낡아빠진 슬리퍼를 걸쳤다.
몸에는 시체처럼 반점 같은 것이 보이고, 윤곽은 석탄으로 그려 썩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론가들은 혹평했다. 침대보와 시트는 고양이가 묻힌 석탄재 자국처럼 누추하다. 다시 말해 여주인공도 추하고 인체의 모델링도 건성으로 형편없이 그려졌다는 비난이다. 매춘은 성과 돈에 직접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류층과 중산층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을 파는 매춘행위는 육체와 온을 다같이 타락시키는 도덕적, 사회적 죄악이었다. 그런데 그림에서 나오는 여인은 예쁘지 않고, 부끄러움도 없이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나체를 자랑하면서, 꽃을 보내 자기 차례를 알리는 고객을 즐겨 반기는 내색이다. 목걸이 대신 검은 끈을 질끈 목에 매고, 머리엔 보석대신 붉은 난을 꽂고, 놋쇠 팔지를 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다. 최근에 <올랭피아>뿐 아니라, <풀밭위의 점심>등 마네의다른 작품들에도 등장한다. 그녀는 말년에 생활고로 인해 몸을 팔아야 했다고 자백했다.마네는 카라바조와 같이 사실주의적인 필치로 주인공을 묘사했지만, 비평가들은 마네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네는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었고, 그의 <올랭피아>는 어떤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없었다. 프랑스의 역사 평론가고티에는 그의 그림에 대해 오로지 시선을 끌려는 욕심뿐이라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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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와 밀레 (캔버스에 유채, 83.5x111cm, 1867년)
밀레는 농촌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그것은 선하고 정직하며 자연에 순응해 사는 민중으로서의 농민에 대한 믿음 이었다. 밀레의 농부들을 보노라면 어찌도 그렇게 무던하고 순박한지 경외심이절로 일 정도이다. 이 같은 농민상은 사회가 한참 산업화 되던 밀레 당시보다 한두세대 전인 19세기초 혹은 그 이전의 흘러간 시간속에나 존재하는 이미지라며 밀레의 농민상을 "시대 착오적" 이라며
비판하는 비평가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밀레가 꼭 의도적이거나 과거 지향적이어서 그렇게 그렸던것은 아니었다.
밀레의 대표작들을 보다보면 우리는 그 끝없는 지평선을 계속 만나게 된다. 지평선을 이토록 사랑한 화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까닭에 밀레의 대지는 늘 조금의 미동도 없이 인간의 굳건한 믿음의 바탕이 되어 준다. 밀레의 지평선이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아마도 (이삭줍기) 일 것이다.
세 사람의 여인이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고 먼 배경에는 커다란 추수단을 쌓느라 바쁜 사람들에 비하면 이들은 이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 이 이삭도 함부로 주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고 한다. 가진자와 관과 이웃의 눈치를 살피며 이삭 줍기나마 감지덕지해 대지에 머리를 조아린 여인들,밀레는 이들을 일부러 지평선 아래 배치했다. 마치 이들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선인 것처럼 그 지평선은 하늘로부터 그들을 분명하게 갈라 놓았다.이들은 철저히 대지에 속한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그 선 아래로 허리를 숙여 묵묵히 자기 발 앞의 이삭을 줍고있다. 오직 땅은 정직하며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삶의 원천으로 삶는 인간은 그만큼 정직하고 존엄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지평선이 밀레에게 준 제일 중요한 교훈이었다. "세상 모든것이 변해도 농민들의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삭줍는 여인들>에서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은 성서에 나오는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고, 훗날 예수의 집안 할머니가 된 룻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룻은 모압 땅의 처녀로 그 나라에 이민 온 히브리 청년과 결혼했다. 남편이 죽자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에서도 시어머니를 잘 섬겼다. 룻은 너무나 가난하여 추수가 끝난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살아야 했다. 며느리를 기특하게 여긴 시어머니는 부유한친척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받아 내었고, 젊은 과부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충고도해주었다. 시어머니가 시킨대로 어느날 밤 얌전한 룻은 들에서 자는 보아즈의 발 밑에서 잤다. 부자 친척은 여인의 고운 마음씨와 행동을 알고, 그녀를 책임지고 후에는 결혼까지 했다. 이 룻이 훗날 다윗과 예수라는 훌륭한 인물들을 낳은 가문의 조모이다.
넓은 밭에는 높은 밀단들이 보이고, 허리를 굽혀 추수한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열심히 줍고 있는여인들은 당당하고 경건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서서 허리를 구부린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같고, 분홍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분홍 토시를 낀 가운데 있는 여인은 시어머니의 권고로 고향에 돌아간룻의 동서 오르파 같다. 청색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룻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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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Angelus) 밀레 (캔버스에 유채,55.5x66cm, 1857~59 작품)
이제 막 해가 지려는 때 하루의 노동을 마친 두부부가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멀리 교회에서는 저녁종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자연과 우주를 관통하는 위대한 힘앞에 머리를 숙일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보다 커진다. 이들은 가난하고 가진게 없는 사람들이지만 지금 신의 사랑으로 이 어떤 부자 보다 충만한 삶의 위로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바라보는우리에게 그 넘치는 위로를 전한다. 신앙의 위대한 힘은 종교를 강권하고 종교집단의 권위와 위계를세우는 데에 있는것이 아니라 이렇듯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데서 나온다.
에전의 우리의 이발소들이 이 그림이 조잡하게 베껴져 내 걸리곤 한것도 그 위로의 힘을 모아 우리모두 쉽게 느낄 수 있었고 또 적극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이 밀레에게 나올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밀레가 진정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종)은 그의 어린시절 신앙의 추억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만종)은 내가 옛날 일을 떠 올리며 그린 그림이라네. 날, 우리가 밭에서 일할때 저녁종 소리가 들리면 우리 할머니는 한번 도 잊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일을 멈추게 한 후 꼬박 꼬박 삼종기도(오전,정오,오후 종소리에 맞춰 하루에 세번 드리는 기도) 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게 하셨지."
이 작은 그림의 제목이 "만종"인 이유는 퐁테뉴블로의 변두리 마을 샤이이의 교회 첨탑 때문이다.
지평선 저 멀리 희미한 작은 교회의 종소리는 이 작은 그림보다 더 크게 우리 가슴 속에 울리고 있다.
지평선이 보이는 기름진 프랑스의 농토는 농업대국 프랑스를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 농촌의 여성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은 밀레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아내 쪽에만 빛이 비춰지고 남편은 그늘 속에서 그 존재가 희박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작은 그림의 제목이 "만종"인이유는 퐁테뉴블로의 변두리 마을 샤이이의 교회 첨탑 때문이다. 지평선 저 멀리 희미한 작은 교회의 종소리는 이 작은 그림보다 더 크게 우리 가슴 속에 울리고 있다.지평선이 보이는 기름진 프랑스의 농토는 농업대국 프랑스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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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 (캔버스에 유채, 208x264cm, 1863)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 전시되어 비난과 조소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으로 마네에게는 물론이거나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으로 "오랭피아"와 같은 해에 그려졌다. 일반 여성의 나체를 등장시킨 주제의 대담성, 이행과정이 없는 대담한 명암, 평명적 색채, 원근법의 무시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오랭피아" 처럼 이 작품도 고전작품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라파엘로의 뎃생에 의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가 만든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에서 인물 배치를 따왔으며 티치아노의 "전원의 연주"에서 남녀의 구성을 응용했다. 그림 속에서 중앙의 인물이 아내 수잔느의 오빠이며 다른 한 사람은 마네의 형제이다. 나체의 여인은 마네가 즐겨 그린 모델인데 그림 속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이제 막 옷을 입으려는 누드모델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우리의 연상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격분한 당시 비평가는 "간신히 가릴 곳만 가린 매춘부가 있는 대로 멋을 부린 두 신사 사이에서 안면몰수하고 칠칠치 못한 자세로 앉아 있다"라고 했다. <풀밭 위의 점?은 스캔들을 일으킨 문제작이었다. 그는 1863년 살롱전에 처음에는 <목욕>이란 제목으로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낙선한 화가들을 위해서 정부가 마련한 낙선전'에 전시되었다. 그 전시를 보고 간 한 관객은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천한 여인이 정장한 두 남자 사이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벗을 대로 벗고 건방지게 앉아 있다. 사내 녀석들은 공휴일 날 성인 행세를 하는 학생 녀석들 같다. 나는 이 수수께끼같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의 의미를 찾으려고 헛되이 애썼다. 이건 한 젊은 화가의 짓궃은 장난이며 전시할 가치조차 없는 부끄러운 상처다. 풍경은 잘 그렸지만 인물은 제멋대로다." 사실 기대고 누워 있는 사나이가 쓰고 있는 모자는 당시 파리 대학의 학생모 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낮에 공원에 와서 옷을 모두 벗고, 과일 바구니를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앉아 있는 여인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수줍기는 고사하고 뻔뻔스럽게 누군가를 쳐다보는 값싼 표정이며, 어깨에 붙어 버린 짧은 목이며, 접힌 아랫배며, 한 사나이의 가랑이 사이에 남자 같은 다리와 마당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양이 당시 파리인들 에게는 버릇없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속옷만 입은 여자가 물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배경은 당시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조르조네의 <전원 연주회>에 고무된 작품이지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당시의 가식적인 프랑스 사회의 이중적 도덕성을 지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기교면에서도 당시 미술계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화폭이 거칠다. 누드 여인의 육체를 섬세하게 모델링하지 않았을 뿐더러 거친 붓 자국이 남성들의 바지나 풀밭 여기저기에 크게 얼룩져 나타난다.
 

무용교실 (La classe de dance) -에드가 드가 (유채 85*75cm 1873-1876년 작품)

앵그르의 문하생으로 젊은 화가 시절, 당시 화단에서 촉망받았던 드가의 예술에 대한 접근은 1860년대 들어 사실주의 이론을 접하면서 변모하였다. 종래의 이상적 미의 추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찾아 볼 수있는 단순한 테마를 화폭에 옮기기 시작 하였다. 1872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무용수 그림들은 이러한 그의 관찰력의 소산이다. 순간적 인상을 간결한 선에 의한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러한 화폭의 움직임은 사진구도가 갖는 원근법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북적거리는 무용교실의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옷 매무새를 고치거나 스트레칭을 하느 무희, 앉아서 이야기하는 무희들의 모습을 쥘페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렸다. 이 작품은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 되었던 작품이다.
 
 
 
 
 
무랑 드 라 갸렛 (갈레트 풍차에서의 춤) -르느와르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1876)

일요일 몽마르트의 무도회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1870년대 몽마르트는 아직 예술가들의 장소로 자리잡지 않았으며 물랭의 무도회는 그 지역의 직업여성, 점원, 꽃파는 아가씨, 세탁부, 모자상점 점원 둘이 즐겼던 소박한 모임이었다. 야외 광선아래 변화하는 풍경을 그리는 인상파 화가들 중 르느와르는 예외적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던 화가이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만 해도 파리의 교외이던 평화로운 시골 언덕 몽마르뜨의 야외무도장에서의 즐거운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서민적이고 유쾌한 분위기와 넘실대는 빛이 가득한 무도장을 그린 이 작품은 어떤 회화적 의미를 지니는가? 당시 인상파에 비판적이던 비평가들도 움직이는 사람들 위에 떨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햇살이 미치는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려는 르느와르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1870), 파리 코뮌(1871)이후 되찾게 된 크고 작은 축제를 파리 사람들은 한껏 즐겼다. 오스만남작에 의해 이루어진 도시 재 건축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몽마르트르 가는 파리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즐거움이 넘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 아래에 설치해 놓은 야외 무대는 기분전환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1875년 르누아르는 현대 생활을 가장 잘 나타내는 축제를 그림의 모티프로 삼았다. 무도회의 순간적인 모습을 영원히 고정시킨 이 그림은 나선모양을 이룬다. 즉 화면의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 뒤쪽을 향해서 사선으로 시작해서 왼쪽 뒤쪽을 향해서 사선으로 소용돌이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사된 빛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그림자에 붉은 빛을 주는 모습을 그린 기법은 섬세한 점묘에 기초를 둔 것으로, 그의 그림이 성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생 라자르 역 -클로드 모네 (캔버스에 유채, 75x104cm, 1877)

새롭게 등장한 철도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대를 크게 변모시켰다. 여섯개의 기차역이 파리에 있었지만 그중 인상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생 라자르 역 이었다. 이 역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바티뇰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 역으로 인해 파리의 직장인, 여행객, 예술가들은 교외에서 쉽게
파리로 갈 수 있었다. 생 라자르는 화가들이 사는 현대 도시세계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농촌지역과 그들을 연결하는 매개체 이기도 했다. 부지발, 마를리, 아르장 퇴유,퐁 투아즈,오베르 등 인상주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센 강변을 따라서 있는 많은 교외지역들은 이 곳을 통해 갈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빛을 그리기 위한" 작품으로 하나의 주제로 연작을 제작한 모네 최초의 형태를 보여 주는 작품이며, 인상파의 대표적 작품이다. 지붕 창을 통해 떨어지는 햇살이 번져 있는 실내의 철로, 기관차와 객차,
피어오르는 증기 등이 제각각의 색을 모네에게서 부여받아 어둠이 빛이 세계,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그림은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차양 아래로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담고 있다. 배경의 건물이 미색으로 밝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도시에는 지금 햇빛이 밝게 내리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차의 김이 파란색을 띤 것은 기차가 방금 차양 밑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형태는 그리 정밀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 화가가 의도한 것이다. 이렇듯 거친 붓놀림과 불확실한 표현을 통해 화가는 빛의 찰나성과 번잡한 도시와 기차의 움직임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비록 대상 묘사는 선명하지 않다 해도 현장에 포착한 그림답게 모네의 <생라자르 역>은 생기가 가득하다.
 

 
낮잠 -빈센트 반 고흐 1889년∼90년 5월까지

생 레미드 프로방스에서 체류하던 중 그는 병원에 스스로 입원했다.
그는 이때 간헐적으로 일어난 신경발작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는데 특히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거장들의 판화를 묘사했다.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도미에, 밀레 등이 바로 그들이다. 밀레는 반 고흐에게 중요한 영감을 준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 이었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과 생애에서 자신의 모델을 보았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밀레의 작품을 24점가량 모사했고 이미 1880년 연구했던 밀레의 작품들도 다시 모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반 고흐는 밀레를 마네보다 더 현대적인 화가로 여겼다. 그의 낮잠 또는 정오는〈하루의 네시각〉연작에서 그 모델을 따왔다. 그는 당시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생각하면 할 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어 그건 밀레가 시간이 없어 미처 유화물감으로 그리지 못했던 사물들을 내가 모사하려고 애쓰는 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거야.. 그건 다름 아니라 흑백의 명암으로 새긴 언어를 색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란다." 반 고흐의 미학적 의도는 분명했다. 밀레의 작품을 자신의 회화언어로 계속 이어 가는 것이었다. 반 고흐는 전경의 정물묘사까지도 밀레의 원구도에 충실 했지만〈낮잠〉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낮잠은 밀레 에게는 1860년대 프랑스 농촌을 대변하는 휴식의 한 장면 이었다. 모사에 기초를 둔 반 고흐
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보색에 대비에 기초를 두고 독창적인 색채를 구성했다. 그래서 낮잠이라는 평온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 회화 특유의 강렬함이 화폭에 표현된 것이다. 1890년 그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알베르는 낮잠에 대해 평하며 이렇게 썼다. "이것은 완전히 비틀린 자연이다. 격앙된 상태의 절정에 도달한 자연이다.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 유채, 65x45cm, 1889)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말을 할 수 없는 작품이다. "당신이 이 작품 앞에 서 있다면 자살의 충동을 한 번 느껴 보라! 아니면 자살 할 수 밖에 없었던 고호의 심정을 느껴 보라"라고 말하고 싶다. 유채 자화상 40점 중 최후의 그림이다. 붉은 수염과 넘겨진 갈색 머리칼, 움푹 패인 볼에서 비장한 결심이 엿보인다. 고흐의 무엇인가 응시하는 눈빛과 다문 입술이 인상적인 이 자화상은 자신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는 또 다른 자신과 싸우는 화가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아직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이 작품은 자살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듯,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가세에게 이듬해 선물로 주어졌다.
감정이 무겁게 실려 있는 배경은 일렁이는 고호의 정념 이며, '자신의 정신을 갉아 먹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극단적인 단일색과 불꽃 같은 터치로 그려진 이 한 장의 그림에서 표현주의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재현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색을 선택하고, 감정을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과 형태를 왜곡함으로써 회화를 감정전달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오베르 쉬즈아즈 성당 (L'eglise d' Auvers sur oise)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은 1890년 7월말 권총으로 자살하기 두 달 전부터 정신병 치료를 위해 고흐가 머물렀던 파리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오베르 쉬즈와즈 교회를 나타내고 있다. 측면에서 본 성당의 실루엣은 마치 내부에서 발산하는 신비적 힘에 의해 밝혀지는 듯한 강한 푸른색 하늘에 드리워져 있고 이러한 성당의 실루엣은 마치 내부에서 발산하는 신비적 힘에 의해 밝혀지는 듯한 강한 푸른색 하늘에 드리워져 있고, 이러한 성당의 강렬한 분위기는 성당에 이르는 양 갈래 길에 의해 마치 정신의 구심점인 양 화폭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반면, 간단한 터치로 그린 성당으로 가고 있는 한 농가 여인의 모습은 이와 대조적으로 우연적인 인간의 삶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교회는 다른 고흐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왠지 쓸쓸해 보인다.. 검푸른 하늘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 칠 듯 무겁고, 격렬한 붓질의 밀밭도, 교회의 벽과 기둥과 지붕들과 곧 불꽃이 일어나 우리를 삼킬 듯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열여섯 살때 헤이그의 구필 화상의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예술 작품의 거래는 일종의 조직적인 도둑질"이라고 극언할 정도로 고흐는 너무 과격하고 고집도 셌고 또 너무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종교를 통해 민중에게 봉사하려 했지만 교회가 받아 주지 않자, 신을 섬기는 또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잊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교회는 불길한 줄무늬가 있는 음울하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고, 마치 물감으로 새겨 놓은 거대한 탑 같다. 고흐는 신을 향한 자신의 의지만큼이나 격정적인 모습으로 이 교회를 그렸다. 너무 격해서 터져버릴 것 같지만 그대로 서 있는 교회, 아마도 평생 신의 뜻에 따르고 믿고 몸으로 실천했지만, 신에게 다가가기를 여러 면에서 실패했던 고흐 자신의 좌절과 억압과 불안한 심경이 문이 없어 들어갈 수 없는 교회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고흐 마음의 무게에 짓눌린 짙푸른 하늘에는 한줄기 빛도 열린 틈도 없다. 양쪽으로 갈라진 길은 마치 집게인 양 교회를 꽉 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파도처럼 솟아오른 땅 위에 있다. 고흐는 교회를 무거운 하늘과 경련하는 땅 사이에 두었다.
온통 문이 잠겨 있는 이런 답답한 풍경 안에서 고흐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거기에는 고흐의 불안과 고통과 외로움과 소외가 담겨 있다. 우리도 고흐 만큼이나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가슴 터질 것 같은 정신적인 고립감을 이겨내기 위해 그토록 처절히 발버둥질쳤던 화가의 그림을 이렇게 사랑하는지 모른다. 외로운 현대인이 고흐의 그림에서 위로를 받는것은 바로 그의 불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푸른수련 모네 (Claude Monet)

모네는 그의 수련 연작의 산실이었던 빠리로부터 서쪽으로 80km되는 지베르니에 머문지 7년째, 마침내 그 집을 직접 사들여 정원에 정원에 온갖 종류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에는 일본풍의 작은 다리를 거로 질러 놓고 수련을 띄워 놓아 프루스트의 말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회화작품인 이 정원을 만들었다. 이 연못이 있는 정원은 일본 판화에서 착상을 얻은 것인데, 이른 아침 매일 여기에서 자신의 명상을 거듭하며 빛의 순간적 변화, 거기에 따른 색조의 미세한 떨림을 이용한 회화세계로 나아간다. 수련과 함께 모네는 인상주의를 넘어 20세기 화가가 되면서 추상화가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르느와르, 드가와 함께 살아서 루브르에 작품을 걸 수 있었던 행복한 화가였는데 그의<물의 풍경>은 두고두고 화가, 작가 그리고 음악가의 끊임없는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춤추는 잔 아브릴 -로크렉

1890년 로트렉은 '라 멜리니트 (강력 폭약)'로 불리는 잔 아브릴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브릴은 유복한 이탈리아 이주민과 화류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병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로 멜리니트라는 화약과 같은 폭발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브릴은 젊은 시절 우연히 사귄 한 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뷜리에 무도장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스무 살에 물랭 루즈에 데뷔했다. 아브릴은 비평가들에게 '춤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곧 로트렉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로트렉은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 뿐만 아니라, 모피 목도리에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모습도 그렸다.
도덕과 금기에 늘 경멸을 보냈던 그는 유명한 화상 폴 뒤랑 뤼엘이 그의 작품을 취급해볼까 싶어 그에게 작업실을 안내해달라고 했을 때도 로트레크는 그를 사창가로 데리고 갔다. "나에겐 이곳이 집보다 편한 곳"이란 것이 그의 변이었다. 사실 그는 이런곳에 몇달이고 틀어박혀 습작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의 모델이었던 여인들은 그 보잘것없는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덕에 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미술사와 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명 인사가 됐다. 이렇게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를 가장 몽마르트답게 겪고 표현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아를의 반 고흐의 방>-고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고흐는 광기 어린 격렬한 창작 행위에 그 자신을 던졌다.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어떠한 화가도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보잘 것 없고 평온하며 소박한 사물들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를에 있는 그의 좁은 하숙방을 그려 보내면서 그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 새로운 구상을 하나 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거야...이번에는 단순히 내 침실을 그리기로 했다. 오로지 색채만으로 모든 것을 그리고, 색을 단순화시켜 방 안의 모든 물건에 장엄한 양식을 부여하려고 한다. 여기서 색채로 휴식 또는 수면을 암시할 수 있을거야. 한마디로 말해 이 그림을 보고 두뇌와 상상력이 쉴 수 있도록 말이야. 벽은 옅은 보라색으로 하고 바닥은 붉은 타일, 나무 침대와 의자는 신선한 버터와 같은 노란색, 요와 베개는 초록빛이 도는 밝은 레몬색, 침대보는 진홍색, 창문은 초록색, 세면대는 오렌지 색이고 대야는 푸른색, 그리고 문은 라일락 색이야. 그게 전부야. 이 답답한 방 속에는 닫혀진 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가구를 굵은 선으로 해서 다시 한번 완전한 휴식을 표현해야 해. 벽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거울 하나와 수건, 그리고 옷 몇벌 이 있어. 그림틀은 흰색이어야 할테지-왜냐하면 그림속에는 흰색이 하나도 없거든. 이것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하는 강요된 휴식에 보복하려는 마음에서이지. 오늘 하루 종일 이 그림을 다시 그릴거야. 하지만 보다시피 이 구상은 너무 단순해. 명암과 그림자는 없애 버리고 일본 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을 칠하려고 해..."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 (캔버스에 유채, 69x91cm, 1891)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침묵, 저들이 몇 시간 씩, 며칠 씩 앉은 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른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을 알겠다. 나도 그 모든 것들이 내안으로 스며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1991년 7월 고갱은 덴마크의 친정에 있던 아내에게 이렇게 쓴 편지를 보냈다. 차례로 고갱의 반려가 된 여인들을 통해서 그는 마오리족 혼의 권태롭고 우울한 매력의 포로가 되어갔다. 이 작품은 코펜하겐에 있는 "봐히네 노 테 티아레(꽃을 든 여인)"과 함께 타히티 여인을 그린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곳의 식물적인 동시에 힘있는 생활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여인이 허리에 감고 있는 파레오의 타히티 특유의 꽃무늬는 이 그림의 장식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면서 대담한 색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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