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선 풍경
곽 흥 렬
난장이다. 빙 둘러 놓인 좌석 곳곳에서 왁자지껄 술판이 벌어졌다. 바깥은 봄비가 촉촉이 바다를 적시고, 안은 소주가 질펀하게 사람들 가슴을 적신다. 중앙 쪽의 널따란 공간에서는 춤판이 숨 막히는 열기를 뿜어낸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 울긋불긋 차려입은 중년의 남녀들이 질서 없이 뒤섞여 산 낙지처럼 몸을 흐느적거린다. 개중에는 이미 노경으로 접어든 축도 눈에 뜨인다.
삼천포항에 정박해 있던 유람선이 길게 고동을 울리며 미끌어지듯 포구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악은 한껏 볼륨을 높이고 춤판은 한층 흥성스러워진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배 안의 풍경을 무연히 바라보고 섰다. 놀면서 주변 경치를 관람한다는 뜻을 지닌 ‘유람선遊覽船’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관광은 완전히 뒷전이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육신의 쾌락에 몰입해 있다. 누군가는, 가끔씩 이렇게 몸을 흔들어 줘야 일상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며 춤판 예찬론을 편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 생각하든 무조건 자기만 즐기고 보자는 식이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평소 얼마나 삶의 압박감에 시달렸으면 저럴까 싶어 잠깐 연민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성정을 또 한 번 보고 말았다. 저 아득한 중국 서진 시대 역사가였던 진수陳壽가 쓴『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서의 기록에서처럼, “과연 속희가무음주俗嬉歌舞飮酒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진수의 표현대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기를 즐기는 풍속을 지녔다는 그 민족성이, 그때로부터 일천 칠백여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흘렀건만 오늘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정말 성정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과문한 탓이어서인진 모르겠으되, 이웃 나라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이렇게 벌건 대낮부터 광란의 춤판을 벌이는 광경은 여태껏 만나지 못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섬나라 일본의 경우야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중국 사람들도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일상적으로 춤판을 펼치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저속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춤판에는 절도가 있고 품격이 느껴졌다. 건전한 카세트 음악에 맞추어 모두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의 춤은 춤이 아니라 흥겨운 놀이였으며, 동시에 건전한 생활 스포츠였다. 우리처럼 술에 취한 채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가 마구 뒤섞여 흐느적거리는 추태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볼썽사나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백년하청일지도 모를 소망 하나 마음속에다 품는다. 이런 품위를 잃은 행태는 우리 당대만으로 끝내고 다음 세대에로는 절대 유전되지 말았으면, 그때는 격을 갖춘 건전한 놀이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고.
한 시간 반의 유람을 마친 배가 서서히 선착장에 들어서자, 그제야 춤판을 파한 이들이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치면서 입구 쪽으로 우르르 몰려나온다. 나는 비로소 뱃멀미인지 사람멀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울렁거림에서 놓여났다. 잔뜩 일그러졌다 겨우 평상심을 되찾은 내 표정과는 달리, 광란의 춤판을 펼친 이들의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에서는 그들 방식의 행복감이 넘쳐나 보인다.
하지만 이제부터 상황은 역전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의 가슴속에는 다시 일상의 재미없음에서 찾아지는 재미로 생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나날의 재미없음에서 생겨나는 권태로 삶의 허기가 쌓여 갈 것이다. 나는 지금껏 그 재미없음에서 재미를 느끼며 스트레스를 다스려 왔고, 그들은 그동안 재미있음을 위해 그 재미없는 시간들을 견디느라 스트레스를 쌓아 왔으므로.
선착장을 빠져나오면서 시야에서 멀어지는 유람선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잘 있으라는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신 거기에 몸을 맡기지 않으리라는 단호한 결별의 표현이었다.
<고령신문 2019년 5월 27일>
첫댓글 호호호~
피는 못속인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을 읽고 저절로 를 치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