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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 14,13-21
‘은총만으로’와 ‘성경만으로’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큰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총만이 아닌 말씀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에만 목을 매면 그 기쁨에만
머물러있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란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려면 그분을 마치 ‘거울’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쪽이’에 한 아이는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보니까 말썽부리던 자기 모습을 버리고 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은총만을 바라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은총중독’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은총중독은 ‘말씀 빈곤’으로 갑니다. 말씀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은 무시하고 성체만 영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얀세니즘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얀센주의는 원죄, 인간의 타락, 신성한 은혜의 필요성, 예정론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선택된 소수만이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종교적 실천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오직 즐거움(영적 즐거움 포함)이라면 그런 행위는 모두 죄가 됩니다.
얀세니즘이 엄격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은총만을 강조하니까 자연히 예정설을 주장하게 되고 말씀의 역할이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10권 제33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성가의 말씀(가사)보다는 목소리에 더욱 감화될 때, 나는 벌받을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정적주의’도 있습니다.
은총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싱입니다.
정적주의는 17세기에 발생했으며 스페인 신부 미구엘 데 몰리노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적주의가 왜 이단일까요? 말씀의 실천 동안엔 마치 운전할 때 기름을 줄어드는 것처럼 은총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채웠으면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때 은총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총과 말씀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원을 개혁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진 에너지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성가는 노래 부르는 이의 목소리나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처럼 ‘말씀만으로’라고 한다면 이는 말씀의 씨를 키우는데 태양과 비는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총만으로’라고 한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만으로 구원이 된다고 말할 때 서로 모순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매일의 나의 방향을 잡습니다.
방향은 잡혀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하.사.시.입니다.
그렇다고 성체조배를 하지 않을까요?
성체조배와 말씀 읽기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차를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고 운전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혼이 은총이라면 몸은 말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 마르 9,2-10
원판 불변의 법칙!
평생토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평생토록 같은 고백성사를 보고 있는 저 자신, 그리고 죽어도 안 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사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 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강론>
(2024. 8. 6. 화)(마르 9,2-10)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2-10).”
1) 하늘나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 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마다 폭염 경보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폭염도 혹한도 없는 나라, 태풍이나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전쟁, 테러, 갈등, 분열이 전혀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또 진짜로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루카 20,35).
그 자격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만 그 자격을 얻게 됩니다(마르 8,34).>
사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일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바로 그 하늘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그 체험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체험’이 금방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 동안의 묵상을 통해서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체험을 하고서도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대화입니다(루카 9,31).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이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고, 자신들은 그냥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도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신 말씀, 즉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신원보증’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신원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