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를 풍미했던 남성 듀엣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닐 영을 닮은 이주호의 음색과 아름다운 보컬 듀엣 하모니, 듣는 이를 따스하게 감싸는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1980년대 후반 높은 인기를 누렸던 남성 2인조 듀엣이다. 70년대는 통기타 하나 들고 어디에서든 의탁할 수 있는 자연속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자아내는 음유시인의 가수들이 유난히 많았던 시절이다. 보편적으로 해바라기는 이주호와 한 명(파트너가 자주 바뀌었기에 특정 인물을 꼽지 못함)더 구성된 2인조 듀엣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77년 리더인 이정선, 남성 보컬 이주호, 여성 보컬 한영애(설명이 필요없는 가수)와 김영미로 이루어진 혼성 4인조로부터 해바라기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시작되었다. 79년 군 입대를 한 이주호 대신 이광조가 참여하였으나 김영미의 외국 유학으로 혼성 해바라기는 결국 해체하게 이른다. 1980년에 들어 이주호는 그린빈스 출신의 유익종과 2인조 듀오로 새롭게 해바라기를 결성하고 바야흐로 댄스 음악의 화려한 군무와 함께 메탈 밴드가 내뿜는 강렬한 사운드가 좀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이주호가 이끈 2인조 남성 듀엣 해바라기가 대중 곁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된다.
2인조 해바라기 하면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라인업은 이주호와 유익종이다. 오리지널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1970년대 '그린 빈스' 출신의 유익종은 1982년 의기투합한 뒤 이듬해 봄 어두운 카페 창가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진을 표지로 한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행복을 주는 사람', '사랑의 시', '갈 수 없는 나라', '모두가 사랑이에요' 등을 발표했으나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이후 유익종이 빠지고 그 자리를 이광준이 대신하면서 앨범 2집을 내게 되는데 '어서 말을 해'를 제외하면 1집에 이미 수록되었던 곡들을 재녹음한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러고 보면 노래의 운명은 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2집 버전의 히트 원인을 궁리하다보니 쉽게 말해 요즘 유행하는 '포샵질'로 비유하면 채도를 올리고 콘트라스트를 높여서 다소 강한 색감과 좀더 쨍한 이미지로 보정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아뭏튼 해바라기는 2집을 계기로 라디오를 거쳐 티브이에서도 환영받는 위치에 이르렀고, 1985년 연말에는 KBS가요대상을 받으며 스타의 자리를 확인받았다. 이듬해 3집에서는 다시 이광준 대신 유익종이 들어왔는데, '내 마음의 보석상자'와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를 히트시키며 대중들에게 꾸준하게 그들의 저력을 보이므로서 연말 방송사 가요대상을 수상하는 등 해바라기의 인기는 1989년 '사랑으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해바라기는1980년대를 대표하는 듀엣일 뿐 아니라 당시 1970년대 통기타 포크를 계승한 몇 안 되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물론 포크를 발라드 연가로 속화했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아 있다지만 하루가 다르게 강렬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변모해가던 가요계에서 오랫동안 분투하며 잔잔하고 차분한 서정성으로 대중들에게 오래동안 사랑받았지만, 90년대들어 그들의 모습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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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따람따람 - 해바라기
02. ♪.내 마음의 보석상자 - 해바라기
03. ♪.모두가 사랑이예요 - 해바라기
04. ♪.어서 말을 해 - 해바라기
05. ♪.이젠 사랑할수 있어요 - 해바라기
06. ♪.행복을 주는 사람 - 해바라기
07. ♪.너 - 해바라기
08.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 해바라기
09. ♪.님은 사랑이예요 - 해바라기
10. ♪.여름 - 해바라기
11. ♪.갈수없는 나라 - 해바라기
12. ♪.사랑의 시 - 해바라기
13. ♪.슬픔만은 아니겠죠 - 해바라기
14. ♪.알고 계신가요 - 해바라기
15. ♪.그날 이후(졸업) - 해바라기
16. ♪.바람이 불어오면 - 해바라기
17. ♪.날이 가면 - 해바라기
18. ♪.어둠이 내린 거리 - 해바라기
19. ♪.바람되고 낙엽되어 - 해바라기
20. ♪.저 빗속으로 - 해바라기
21. ♪.님에게 - 해바라기
22.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 해바라기(혼성4인조 해바라기)
메모
'포크'의 몰락... 통기타가 그립다.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사에서 지난 70년대를 대표하는 상징은 '통기타 문화'라 불리는 청년문화였다.
장발에 통기타를 둘러메고 생맥주를 마시며 노래하던 이들에게서는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고뇌와 격동, 통제된 억압 속에 살아야 했던 시대적 특성 때문이다.
통기타 문화는 1968년에 그 유명한 트윈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의 듀엣)가 활동을 개시하며 막을 올렸다.
이 문화의 중심엔 포크 음악이 자리했고 그것을 전파한 사람들은 아마추어 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학생 가수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취미로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다가 소문에 의해 가수가 되고 스타덤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당시엔 오디오 보급률이 낮았고 음반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품으로 불렸던 제니스 라디오를 동경하며 라디오 프로그램에 의지하거나 음악감상실(라이브 음악을 겸하는 곳이 많았다), 음악다방 그리고 조금 더 후에는 라이브 음악살롱에서 노래를 들었다.
포크(Folk)는 단어 그대로 민속음악 내지는 구전민요 정도를 가리킨다.
각 나라의 전통적인 음악이나 민요도 포크이긴 하지만 우리는 미국적인 유형만을 포크라고 지칭했다.
포크의 중심 악기인 통기타와 하모니카는 정말 다른 악기에 비해 저렴한데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배우기도 쉬운 장점이 있다.
이런 악기로 수 십, 수 백 명이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몇 개의 코드와 스트로크 주법만 익혀도 여럿이 노래를 하며 놀 수도 있었고, 프러포즈용 세레나데를 부르를 수도 있었다.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양희은 등의 노래들은 금지와 해금을 거듭하면서도 이어졌다.
시대를 이어 조동진, 정태춘, 해바라기, 김승덕 그리고 한참 후에 김광석, 박학기 등이 활약할 때만 해도 모던한 포크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포크 장르는 새로운 앨범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앨범이 나와도 홍보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제작자의 권유나 시대의 흐름에 굴복해 아예 '세미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다.
유리상자, 일기예보, 나무자전거 등의 그룹을 포크의 전통을 잇는 후계자로 보기도 어렵다.
70년대 이후부터 시대를 관통하며 지적인 양심의 대명사로 성장한 386세대나 그 또래의 음악인들은 이제 생각하고 고뇌하며 앞장서는 통기타 문화는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한참 유행하던 이재성의 노래처럼 통기타 음악은 이제 '기타 하나와 동전 한 닢'만이 남는,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일까?
진솔하고 인간미 넘치는 통기타 음악이 그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