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에스겔 1:1-3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2011. 10. 26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오늘부터 에스겔서를 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서는 대선지서로 분류되는 이사야 예레미야와 함께 삼대선지서를 기록한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의 멸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먼저 에스겔 선지자의 이름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부모가 에스겔의 이름을 지었겠지만 이 이름에도 에스겔 선지자의 사역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겔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름이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끝에 하나님과 여호와를 말하여 발음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강하게 하신다는 같은 뜻입니다. 나라의 위기를 보면서 부모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여 달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겠지만 이스라엘은 지금 약할 때로 약하여져서 포로로 잡혀 가 있습니다. 부모의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이 강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지만 현실은 그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간 상태입니다. 이름의 뜻과는 반대에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 강하심이 드러납니다.
왜 사로잡혀 갔습니까? 신명기 28:36-37절입니다.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이어지는 47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저주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유효하게 적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하여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으시면 언약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저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계속하여 언약을 배반하는데도 이런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언약이 파기 되었기에 완전히 버리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바벨론 포로로 인하여 자신들이 언약의 저주임을 알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8:46-53절입니다. “봉독”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적국에서 넘기셨을지라도 그 곳에서 죄를 깨닫고 돌이켜 주시기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범죄 하지 아니하는 인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만민 중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주의 기업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하면서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른 해 넷째 달 초 닷새라고 합니다. 이 서른 해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도 있지만 대부분 에스겔의 나이로 말합니다. 에스겔이 제사장 가문 출생이기에 어려서부터 제사장의 사역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사역이 30세에서 50세까지이니 공식적인 사역의 나이이기도 합니다. 에스겔 30세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연대 표시는 2절에서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초닷새라고 합니다. 여호야긴 왕은 여호야김 왕이 죽은 후 18세에 왕이 되어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잡혀온 곳이 그발 강가입니다.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인공적인 관개수로를 만들어 니푸르라는 곳으로 흐르게 하였습니다. 바벨론 지역을 발굴한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여서도 드러난 곳이라고 합니다. 유대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것은 3차에 걸쳐서 잡혀왔는데 여러 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발 강가에서 계시를 받은 것입니까? 이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3절에 보시면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아서 강가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처럼 그발 강가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모인 곳일 수 있습니다.
사로잡혀 온 상황에서 강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편 137편을 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이들이 범죄 함으로 이렇게 포로가 되어 왔지만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럴 때에 하늘이 열립니다. 1절과 3절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 위에 거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낙심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리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바벨론마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온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또한 그곳에서 나타나셔서 새로운 계시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몇 가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는지를 알게 합니다. 에스겔 5:5-9절입니다. “5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6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9 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의 이방 나라들보다 더 악하였기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심판을 당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완전히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3:10-11절입니다.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그들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살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심을 보여주십니다. 에스겔 37:11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은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형식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포로로 잡혀감으로 자신들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36:16-38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일 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고 그리하여 열방에 포로로 잡혀가게 됨으로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돌이키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아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게 하시는 일에 그들을 씻기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오지만 제대로 나라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성전은 겨우 재건하였지만 나라의 꼴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계속하여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울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울어야 할 일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는 그들이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메시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땅의 예루살렘의 회복이나 성전의 회복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이 새 예루살렘이고, 예수님 안이 새 성전임을 성령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성령이 임한 자들은 이 땅의 시온을 향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시온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로 부터 구원하실 자를 기다리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던 사람들처럼 지금 온 세상이 바벨론의 유배지가 된 이곳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울고 있는 자들이 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양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3:14절입니다.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이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날마다 이 땅으로부터 분리시켜 주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모습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바벨론 강가에서 탄식하며 목 놓아 우는 자들처럼 울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처음 나타난 하늘이 열리고의 표현입니다. 완전히 바닥까지 갔을 때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이 열린 것이 신약에서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합니다(마3:16). 그리고 요한복음 1:5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본 하늘의 사닥다리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서 내려온 사닥다리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행7:51).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는 것은 다 예수님과 연결이 됩니다.
하늘이 열리는 순간은 인간으로서 절망의 순간입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가다 들판에서 돌베개를 하고 자는 그 순간에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하늘이 열려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순교의 순간에 열렸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다다른 인생이라고 다 하늘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만 열려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삶의 정황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 때에 오히려 하늘이 열리게 되는 때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1:4-28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 2011. 11.
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12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가장 큰 충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가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언약들은 다 어디에 가고 이렇게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충격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과연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하는 이런 갈등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로 잡혀가서 5년, 그 절망의 순간에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4절입니다. 북쪽에서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실 때의 모습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도 구름과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부분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도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고 나서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제일 끝에 들리고 엘리야도 그리하고 에스겔서도 끝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시는 모습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임합니다.
5절에서 25절까지 네 생물이 영에 의하여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무엇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과 같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런 형상들을 그려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울사도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지만 그 내용을 말로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2:4절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의 환상과 계시가 어떠하였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이런 환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활동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그 절망의 순간, 가장 바닥을 쳤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18:7-14절입니다.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여호와의 우주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1:5-24절의 내용에서 여호와의 활동성을 보려고 합니다. 네 생물이 사자와 독수리와 소와 사람의 얼굴의 형상을 하고서 날개가 있다는 표현들은 유대인들의 율법 해석에서 이 네 생물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물들 중 가장 높은 존재는 인간이다. 새 중에는 독수리, 가축 중에는 소 그리고 짐승 중에는 사자다. 이 모든 것들은 충성을 받았으며 위대함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보좌 아래 놓여있다” 결국 네 생물이 하나님의 보좌 아래 놓여있음을 말하지만 네 생물을 에스겔 10장에서는 그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방금 본 시편 18편에서 그룹을 타고 다니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네 생물의 활동에 대하여 바퀴와 날개는 다 빠르게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개 밑의 손과 바퀴에 눈이 가득합니다. 네 생물과 네 면의 얼굴의 형상이란 사방을 다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며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와서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에스겔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은 이미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14절에서는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 움직임은 네 생물의 바퀴 가운데 있는 영에 따라 움직입니다.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네 생물로 그대로 가게 되는데 상하좌우 회전하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22-25절입니다.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렵다고 합니다. 이 궁창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눠집니다. 궁창 위는 보좌의 형상이 있습니다. 네 생물은 궁창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 네 생물에 대하여 명령하는 음성은 궁창 위에서 들립니다. 그러므로 보좌에 계신 이의 음성을 듣고 이 네 생물이 그 영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네 생물의 날개소리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많은 군중이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네 생물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빈틈없이 이루어내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26-28절입니다. 네 생물의 머리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습니다. 네 생물을 에스겔 10장에서 그룹이라고 합니다. 그룹이란 날개형상인데 이 그룹은 언약궤 뚜껑에 그룹을 양편에서 붙여 만듭니다. 이런 그룹은 날개의 형상인데 하나님께서 그룹 위에 또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삼상 4:4, 시80:1). 그러므로 이 그룹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룹을 타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위에 궁창이 있고 그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보좌의 형상이 남 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모양과 같은 형상이 허리 위의 모양은 불에 달구어진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납니다. 그 사방 광채가 비 오는 날의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 영광 앞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음성이 들립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음성을 듣는 선지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인의 땅 바벨론에 나타났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이로서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리시며 또한 자신의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분이심을 에스겔과 포로로 잡혀온 자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포로에서 회복되어 돌아가게 될 지를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은 바벨론 포로 70년 후에 아주 부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에스겔이 본 그런 완벽한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되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과 함께 궁창 위의 보좌에 드러난 여호와의 영광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1-5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들 앞에서 변형이 되십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입니다.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평소에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바로 구약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할 때의 모습입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는 홀연히 사라지고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골로새서 1:15-17절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까? 고린도후서 4:3-11절입니다. “봉독”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마치 구약시대에 나타난 그런 영광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영광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그때가 바로 이 세상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심으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이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신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6절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쳐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입니다. 이러한 재창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사람이 되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만들어 내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증거를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믿게 되는 것도 역시 바벨론과 같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질그릇인줄 압니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합니다. 이런 자들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며 또한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욱여쌈을 당한 것 같아도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니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는 그 어떤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한 초대교회 때에 엄청난 환난과 핍박이 가하여 져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4:1-11절입니다. “봉독” 에스겔서와 연결이 되는 보좌에 계시는 분의 모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이미 하늘에서 완료된 일입니다. 8절을 봅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주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지금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주의 이 약속을 바라보고 삽니다. 바벨론에서도 함께 하셨고 초대교회 때도 함께 하셨고 지금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 영광중에 오고 계십니다.
에스겔 2:1-10 듣든지 아니 듣든지 2011. 11. 9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이 여호와 영광의 형상을 보고서 엎드립니다. 1:28절을 봅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 앞에 엎드리지 아니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임금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임금이 행차를 하면 백성들은 길에서도 엎드려야 했습니다. 임금에게 청원을 하여도 엎드려서 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아도 인간의 죄란 신이 되려고 하는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 왕 앞에서도 엎드리는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는 스스로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어느 장로님이 자기에게 찾아와서는 성경을 번역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불만이 많다고 하였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존칭어를 사용하지 않고 번역하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다고 하였답니다. 어떻게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함부로 이름을 부르느냐는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누가 엎드려 떠는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하지 아니하리라고 십계명에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어처구니없는 일이나 욕설에 사용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라고 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일어서서 듣든지 엎드려서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9:2-3절입니다.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세 시간은 서서 말씀을 듣고 세 시간을 죄를 자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듣지만 마음의 자세만은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을 때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 이사야, 에스겔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계시록 1:4절에서 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생전에 주님 품에 기대어 앉았던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엎드려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져 있으니 그가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을 부르시는 주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에스겔 2:1-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에게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힘이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제가 2주전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힘이 다 빠진 것이 아니라 감기기운으로 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설교를 위하여 서점에 갔다가 힘이 다 빠졌는데 이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엎드려졌기에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임하여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일어서서 그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입니다. 아담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을 사람이라고 하니 인자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인자라는 말이 93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인자는 연약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서에서 묵시적인 존재인 인자와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한 인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패역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에스겔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3절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부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어느 정도로 언약을 어겼는지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라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패역이나 배반이라는 말은 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대항하였다는 표현입니다. 한문으로 패역(悖逆)이란 어그러지고 거역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패역하고 배반하는가 하면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사야 30:8-11절입니다. “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전하여 영영한 증거를 삼으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고 하신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22:21절입니다.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어려서부터 습관이라서 구스인이 피부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고 표범이 그 반점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가야 하는 것입니까? 2:5절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깔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는데 눈을 떠 보니 부자는 지옥이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입니다. 문자대로는 음부이고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이때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에 좀 대어달라고 합니다. 불꽃 속에서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곳과 그곳은 건너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살려서 지상으로 보내어 자기 형제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전하여 달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면 믿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서 가더라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 어떤 표적과 기적을 보고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지도 아니할 그들에게 왜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도 선지자의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게 됩니다.
에스겔 2:6-7절을 봅니다. 에스겔이 당할 고난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전할 때에 반응이 가시와 찔레와 전갈입니다. 에스겔이 엘리야나 세례요한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에스겔을 미워하고 싫어할 환경이 이런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하였기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 패역하고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잠시 잠간 언약의 갱신이 일어나지만 곧 다시 패역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그들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거짓 평안을 남발하며 거짓 축복을 남발합니다.
8-9절입니다. “봉독”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니 한 손이 에스겔을 향하여 펴지고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펼치니 그 안팎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5:1-4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는데 그 두루마리에 온 땅에 내리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을 사르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과연 어느 인간이 좋아하면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패역하고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찌르는 형국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예언하였고 그 예언하였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역시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정도가 아닙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합동으로 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자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의 대접으로 올지라도 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번영의 신학이 가득한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 애가와 애곡과 저주의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그들로부터 가시와 찔레와 전갈과 같은 공격들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여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1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도 두루마리 책이 있고 받아먹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에스겔 3장에서도 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 세상이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야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에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여진 복음과 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복음대로 된다는 것은 온 세상과 우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에스겔 3:1-11 두루마리를 먹이시며 2011. 11. 16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에스겔이 받았습니다. 2:8-10절을 봅니다. “봉독” 에스겔이 전하여야 할 여호와의 말씀이 두루마리 책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루마리형태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에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 책이 에스겔을 향하여 펼쳐져 있는데 안팎에 글이 있습니다. 안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안팎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양이 많습니다. 그 많은 양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1-3절입니다. 발견한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능동적으로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피동적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번역에서는 피동형으로 ‘그가 내 입을 열어주시니’로 되어있습니다. 입을 벌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벌리시고 두루마리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고 하시는데도 에스겔이 왜 적극적으로 말씀을 받아먹지 않습니까?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을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의 실상은 같습니다. 자기 귀에 좋은 소리 듣기를 좋아하기에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고 합니다.
에스겔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한 말씀을 받아먹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입을 벌리시고 두루마리를 먹이시면서 네 배와 창자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먹는데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하는 말씀이 시편 119:103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본 말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입에서 달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내용이 말씀에 나오면 달고 기쁘겠는데 내가 평소에 정말 싫어하는 내용이 말씀에 나오면 과연 그 말씀이 달까요?
예레미야 15:16-17절을 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을 먹었는데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앉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는 기쁨이지만 그 말씀이 삶으로 적용이 되면 고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0:8-11절입니다.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에스겔과 비슷한 소명을 사도요한이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에스겔과의 차이는 그 배에서는 쓰게 된다는 말씀이 에스겔에는 없고 사도 요한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에스겔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증거 함으로 쓴 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의 환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환경인지 요한계시록 18:15-21절을 봅니다. “봉독” 바벨론의 멸망을 말합니다. 온 세상의 경제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붙어야만 살아남는다고 모두가 바벨론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온 세상을 취하게 하는 음녀인데도 그 보암직하고 먹임직 하고 세상이 자랑이 될 만한 것들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FTA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이마트와 동네 구멍가게와 경쟁하면 누가 이깁니까?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려고 하는 이유는 약한 자는 죽더라도 강한 자는 살아남게 하겠다는 자유시장의 법칙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바벨론을 의지하지 않으면 북한 꼴이 납니다. 그들은 바벨론을 의지하지 않고 주체사상을 믿고 살기에 너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바벨론에 적극 협조함으로 배는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둘 다 참된 생명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서 주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은 사람은 이 세상이 멸망할 때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이라면 세상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울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사도는 자신이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이고 세상이 자신을 볼 때에 자신을 죽은 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무너지는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18장의 내용입니다. 19-20절을 봅니다. 울며 애통하는 자와 즐거워하는 자로 대비가 됩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우리가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필요하고 내가 좋아하는 구절만 인용하여 아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성경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상 슬픈 노래와 통곡과 재앙을 결코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입을 벌려서 말씀을 먹이십니다. 마치 농번기에 소가 지쳐서 여물을 먹지 않을 때 소의 주인이 억지로 입을 벌려 여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어서 먹이듯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먹이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먹고 소화를 시키는 것이 말씀이 적용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지 배에서 쓰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본문 4절 이하에서 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먹이신 것은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이 가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5-6절에서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쓰는 자기 족속에게 가서 전하는데 그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에스겔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보냈다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이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이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지 7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한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었다고 합니다. 이마란 사람의 가장 앞선 부분 드러난 부분이라면 마음은 가장 깊은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안팎으로 전혀 듣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도 그들을 마주 대하도록 얼굴과 이마를 굳게 하시는데 화석보다 더한 금강석 같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로 마음이 굳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11절입니다.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어서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선지자가 없어서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는 어떤 핑계도 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의 나라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주변 국가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하신 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더 멀리 있는 이방의 나라들은 핑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온 천하에 다 증거가 되었습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바울사도도 로마서 1:18-20절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전체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면서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최종적으로 확증하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이유는 그들의 입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공관복음에서 나오는 악한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주인의 종을 때리고 죽이고서는 최후에 주인의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장차 말씀 자체가 이 땅에서 오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1:20-23절입니다. “봉독”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한 곳에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한 말씀과 그 권능을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에 전하였다면 그 성들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은 가버나움이 심판의 날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든지 아니 받아들이든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의 택하신 백성이라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들이 주의 백성들에게는 입으로 들어가고 배로 들어가서 쓴 맛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쓴 맛이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에스겔 3:12-21 파수꾼 2011. 11. 23
12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니 13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14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 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 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받아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난 후 주의 영이 들어 올려 사로잡힌 백성에게 갑니다. 사로잡힌 백성들이 사는 곳이 그발 강 가 델아빕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의 영에 의하여 들려 옮겨지는 중에 일어난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12절입니다. 주의 영이 들어 올리시는데 에스겔의 뒤에 큰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 도다’라는 소리입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은 모두가 찬송을 받으실 일입니다. 천지의 창조도, 심판도, 구원도 다 찬송 받으실 일입니다. 지금 에스겔을 통하여 심판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실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을 항상 나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는 말은 나도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위한 엉터리 영광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9:1-3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1절이 에스겔이 들은 음성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런 찬송이 언제 나옵니까? 바로 앞의 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서 찬송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바벨탑을 쌓아놓고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착각합니다.
둘째로 14절에서 에스겔이 근심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받아먹었으니 근심과 분한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선지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들에 대하여서도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로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학대 받는 것, 권력층이 부정한 재물로 사치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온 세상이 다 망한 것처럼 고함을 지릅니다. 단 한명의 가난한 자가 억울한 핍박을 당한 것을 보고서도 온 인류가 당하는 것처럼 민감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런 근심과 분노를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하여 감동시킵니다. 감동시켰다는 말은 여호와의 손이 꽉 잡아 눌렀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심판의 말씀을 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못하겠다고 대항하기도 하고(예레미야), 때로는 백성들이 연약하니 한번만 봐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아모스). 이런 전체적인 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지금 에스겔이 근심하고 분노하는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델아빕에 돌아와서 두려워 떨면서 칠 일을 지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벌벌 떨면서 얼이 빠진 모습으로 칠일을 지납니다. 그리고 말씀이 다시 칠 일 만에 주어지는데 파수꾼으로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경계근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군에서도 작전은 실패하여도 경계에서 실패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적의 진영을 살피면서 망루에 서서 한 순간도 졸지 않고 깨어 지켜야 합니다. 제가 전방의 철책부대 근무를 위하여 훈련을 받을 때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간첩이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에 어디로 넘어왔는지 조사하여 그 때 그 시간에 근무한 자가 처벌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보초를 잘 서라는 말이었겠지만 그 정도로 경계근무는 중요한데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파수꾼에 달린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파수꾼은 어떨까요?
이사야 56:10-12절입니다. “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신천지나 다른 이단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기성교회 목사들을 공격하는 일에 자주 사용합니다. 이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이런 꼴이 되었기에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나라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지도자라는 자들이 이런 꼴이 되었으니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맹인이며 무지하며 벙어리 개가 되어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파수꾼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순간도 보내지 아니한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노아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시대에도 가나안에서도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의 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선지자들이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데 일반적인 파수꾼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는 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쳐들어오시는 것에 대하여 파수를 하여야 합니다. 17절을 다시 봅니다. 이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기에 바벨론이 쳐 들어오는 것에 대한 파수가 아니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날을 기다린다고 하였지만 그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외치는 일이 파수꾼의 일입니다.
에스겔 22:23-31절을 봅니다. “봉독”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하고 백성들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파수꾼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께서 심판하러 오신다고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여호와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멸하셨다고 합니다.
18-19절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이들이 아직 주께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파수꾼의 자세로 전하여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악인에 대하여 돌이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악인에게 전하여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죽을 것이지만 그의 피 값을 에스겔에게서 찾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악인에게 에스겔이 깨우쳤지만 그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가운데 죽을 것이지만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고 합니다. 파수꾼은 그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은 전도에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적용을 하려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주께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당신은 꼭 죽게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아니 교회 다니는 것이 주께로 돌이킨 자들이 아니냐고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다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께로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20-21절입니다. 앞부분에 악인에게 돌이키라고 한 말씀인 반면에 이 말씀은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 전하라고 한 말씀입니다. 앞의 부분은 처음부터 악인을 말하는 것이고 이 부분은 처음에는 의인이 공의롭게 살다가 돌이켜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런 부분은 에스겔서의 뒷부분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파수꾼의 역할과 그에 대한 반응의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의인이 악을 행하면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의를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의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장애물을 두시면 아무도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의 의를 의지하고서 지금 악을 행한다면 그것이 아무른 유익이 없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서도 파수꾼이 깨우치게 하라고 합니다. 그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가 죽게 되면 그의 죄악을 인하여 죽지만 에스겔에게 피 값을 묻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깨우치게 하여 그가 돌이키면 그도 살고 에스겔도 사는 것입니다. 이 경우가 가장 좋은 예가됩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당신은 그렇게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거저 거짓 평안을 빌어주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곳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장 조사를 하듯이 고객의 선호도를 조사하여 그 지역에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합니다. 그러한 교회 컨설팅이 미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해 왔고 이런 것이 한국에서도 벌써 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조사하여 그 지역에 도서관이 없으면 교회에 도서관을 만들라고 합니다. 지금 계속하여 문자가 옵니다. 10평의 공간만 있으면 도서관을 꾸미고 1년만 운영하면 구청에서 연 200만원인가 지원이 나온다고 세미나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또는 백화점의 문화센터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여력이 있으면 그런 취미생활을 해도 되겠지만 과연 그런 문화 활동들이 지금 심판 하러 다가오시는 주님 앞에 세울 수 있는 일입니까?
사도행전 20:24-28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하였기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파수꾼의 역할을 못하면 그 피의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였기에 자신은 그 복음을 거부하여 심판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은 할 일을 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교회의 감독인 목사들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산 교회를 보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 이 피 외에 다른 것을 전한다면 어찌 그 사람을 파수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피에 대한 파수꾼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3:22-27 벙어리 파수꾼 2011. 11. 30
2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 23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24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25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26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27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전달하여야 합니다. 물론 저항하기도 하고 중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여러 가지 역할극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에스겔도 여러 가지 역할극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처음 역할입니다.
들로 나가라! 2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십니다. 에스겔이 처음 여호와의 영광을 본 것은 그발 강가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델아빕에 와서 일주일을 답답하게 지낸 후에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지난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파수꾼의 생명이 달린 문제임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파수꾼의 첫 역할인데 먼저 들로 나가게 합니다. 들에서 에스겔과 말씀하시겠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들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도 광야로 나가서 40년을 보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광야 40년을 사도행전 7:38절에서 광야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광야교회여야 합니다. 지상에 영원히 거할 것처럼 부동산 확보하여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들로 나가듯이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주의 말씀을 묵상함이 정말 필요한 시대입니다.
마태복음 11:7-9절입니다.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광야에 나간 이유는 선지자를 보려고 갔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10절에서 말라기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에 대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들로 나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에스겔처럼 예수님도 자주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활동을 하였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을 거쳐 나왔듯이 예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출발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 하십니다. 마가복음 5:15-16절입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분주한 세상에서 나만의 빈들이 있습니까?
네 집에 가서 문을 닫으라. 23-24절입니다.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그곳, 그 빈들에 임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영광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그 영광이기에 에스겔이 바로 엎드립니다. 전에처럼 주의 영이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내 발로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처음 말씀이 들로 나가라고 하셨는데 들로 나가서 들은 처음 말씀이 네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 사람인데 문을 닫았다는 것은 심판을 보여줍니다.
왜 심판의 상황인지를 25절에서 봅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 맬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포로로 잡혀왔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하여 얼마나 불만이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묶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이 이들의 조상들이 한 일이며 바벨론 포로에 잡혀와 있는 중에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32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에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편지를 보냅니다.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 그 나라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합니다. 70년이 되면 여호와께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편지를 보내니 이 편지를 받은 스마냐가 예루살렘의 백성과 제사장들에 편지를 보내어 예레미야 같은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 하는 자들을 결박하여 가두라고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보낸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예레미야를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라고 하는 이들이 에스겔인들 줄로 묶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문을 닫고 들어가면 그들이 줄로 묶는 다는 말씀이 어느 정도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벙어리가 되리라! 26절입니다. 전에 사용하던 성경은 벙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파수꾼이 벙어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벙어리를 파수꾼으로 세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벙어리가 아닌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는데 그 혀를 입천장에 들어붙게 하셔서 그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파수꾼을 세워서 적이 쳐들어온다고 외쳐도 그들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쳐들어오는 적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패역한 자들에게 선지자의 책망이 들리지 않으면 이것이 심판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회개의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은 요란하지만 정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 회개의 말은 윤리도덕적인 수준이거나, 아니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회개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하고 병든 것은 하나님을 잘 못 섬겨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십일조를 다 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돈을 사랑한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만 그동안 못한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겠다는 것도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인데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있기에 그런 사람이 교회를 나와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들먹거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을 책망하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하고 또 하다가 그 책망마저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심판밖에 받을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교회의 여러 가지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복음을 전한다는 교회로 찾아오지만 그러나 그 안에도 역시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이나 복음이나 간에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챙기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주의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을 누가 보내신 것입니까?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신약에서 누가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에서 주의 영으로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전서 1:10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입천장이 붙어서 꾸짖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패역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행위라면 에스겔에게 이렇게 행하신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태복음 12:41-42절입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오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나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반전이 일어납니다. 2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자기 임의로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벙어리 되게 하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입을 열게 하시면서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입니다. 이미 받아먹은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에스겔의 말을 듣고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들을 자와 듣기 싫은 자입니다.
이렇게 참된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싫어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싫었으면 선지자를 죽이고 그 선지자를 보낸 예수님을 죽이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역시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증거 하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다는 것을 이미 기록된 성경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이시고 그 입을 열어서 전하게 하는 자들의 말은 듣기에 싫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새롭게 계시를 받은 말씀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듣는 자가 있고 듣기를 싫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듣고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자는 소수이고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다수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 역시 그들이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벙어리가 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서 그렇고, 입을 열게 하셔서 전하는데도 듣기를 싫어하는 것 역시 그들이 반역하는 족속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대표로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도 패역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증거 하면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까지 가치 있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주님은 배설물이라고 하시면 아멘이 되십니까? 지금도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만이 아니라 그래도 내가 선하다고 여긴 것들, 이것은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서도 배설물로 버리라고 하시면 여기에도 아멘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에스겔 4:1-17 에스겔의 상징행위 2011. 12. 7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 내가 그들의 범죄 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7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14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을 떡을 구울지니라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먹고서 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 벙어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열게 하실 때에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벙어리가 되어 꾸짖지 아니하면 이것은 완전한 심판입니다. 파수꾼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꾸짖지 아니한다는 것은 돌이킬 기회가 없고 이제는 심판만 집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서 말은 하지 못하지만 행동으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무언극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 보다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요한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서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에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물을 때에 서판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쓰니 그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요한이 보통 아이가 아님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말없이 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 년이 넘는 기간을 무언극만 하고 있습니다. 그 무언극은 4:1-5:4절까지 계속됩니다. 무언극이 끝나고 그 상징행위의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4장 안에서 에스겔의 상징행위만 살펴보겠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상징적인 행위를 하지만 그 뜻은 유다백성이라면 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징행위로도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겠습니다.
4:1-3절입니다.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토판에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라고 합니다. 토판이 굽기 전의 토판이라면 부드럽게 그려질 것이고 구운 토판이라면 조각도 같은 것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토판의 그림들이 최근에도 바벨론지역의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왕들이 조공을 받는다든지 적을 정복한 내용들을 그림과 글로 새겨둔 것들입니다. 이런 토판에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지도를 그리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과 주택과 길들이 표시되면 알아봅니다. 그 성읍을 그린 토판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흙으로 에워싸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다리를 세우고 공성퇴를 둘러 세웁니다. 이런 모양은 옛날에 성을 공격하는 방법들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가 되고 공격을 받는 모습입니다.
3절을 봅니다. 이렇게 성읍이 포위되어 공격받는 모양을 만들어놓고서 다시 철판을 가져와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징조가 되리라고 합니다. 무슨 징조입니까? 예루살렘의 성읍이 포위되고 공격된다는 징조이지만 더 심각한 징조가 철판으로 막아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1인 2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도 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적으로 공격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적이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을 보여주시는 상징인 철판으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가로 놓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적이 쳐들어와서 성읍이 망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갈라놓고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성읍이 이스라엘의 역할인데 그 사이에 철판을 세워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고 막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직장은? 은퇴 후의 대책은? 사업은? 경제상황은? 교회의 운영은? 이런 두려움들보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더 두렵게 여겨지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철판에 막힌 것입니다.
4:4-8절입니다. 또 다른 상징행위가 나옵니다.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게 눕는 날 수 대로 그 죄악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왼쪽으로 누워서 390일, 오른 쪽으로 40일을 담당하는데 하루가 일 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얼굴을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여 팔을 걷어 올리라고 합니다. 심판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로 몸을 묶어서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 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행위를 1년을 넘게 하여야 합니다. 에스겔도 힘이 들겠지만 그의 아내도 이런 남편을 볼 때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보시면 아내가 먼저 죽습니다. 아내가 죽어도 울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징행위는 죄악을 담당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대속이냐 아니면 유대인들의 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대부분 대속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대속의 역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처럼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이며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있는 것처럼 이사야 53장에서도 그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두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고 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이 벌을 받는 것과 대속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포로로 잡혀오는 것은 죄악에 대하여 벌을 받는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소망이 있고 그 과정이 대속의 과정이 됩니다.
그러면 왼쪽으로 누워 390일을 말하는 것은 390년의 죄악을 담당하는데 에스겔로부터 소급하여 올라가면 솔로몬의 성전 완공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의 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이스라엘은 곧 우상숭배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오기 까지 늘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임을 고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40일은 아직 남은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간이 포한되는 40년으로 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430년과 같은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이러한 상징행위는 심판과 동시에 대속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4:9-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는 그 날수동안 먹을 양식과 마실 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섯 가지 혼합곡물로 떡을 만들어 옆으로 눕는 날수대로 먹는데 그 양이 이십 세겔과 물은 육분의 일 힌입니다. 이것은 한 끼의 식사분량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굶어죽지 아니할 정도의 양만을 저울에 달아서 먹어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다는 것은 성위 포위되거나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음식이 핍절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행위입니다. 그리고 떡을 구워먹되 인분에 구워먹으라고 합니다. 인분은 성경에서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인분으로 떡을 구워먹으면 부정하게 되기에 에스겔이 자신은 자기 영혼을 더럽힌 적이 없다고 합니다.
14절을 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결규례를 지켜왔다고 합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이런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이 정도로 모든 유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그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뢰하여야 할 여호와 하나님은 의뢰하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의뢰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식으로 말하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러므로 16-17절을 보시면 그 양식을 끊어버리니 저울에 달아서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마시며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 쇠패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언약의 저주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봅니다. 1-13절까지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14-46절에서는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가 레위기 26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면 재앙을 내린다고 합니다. 파종한 것을 대적이 먹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대로 청종하지 아니하면 7배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18-23절에서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이 된다는 말씀은 기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고가 헛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다시 일곱 배가 더 재앙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들짐승을 보내어 자녀를 움키고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인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들짐승은 세상의 성공이라는 들짐승이 우리의 자녀를 삼키고 있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다시 7배의 재앙을 더하십니다. 결국 최종적인 재앙이 일어난 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입니다.
26절입니다.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양식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 상징행위를 통하여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그들에게 레위기 26장의 말씀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하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심한 재앙이 쏟아지는데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은 오히려 안식을 하게 됩니다.
40-46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대항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항하여 그들이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을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누가 기쁘게 그 형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많이 잘못하였다고 이렇게 재앙을 받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순순히 포로로 잡혀가서 재앙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이들이 순순히 형벌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에스겔이 대표로 여호와의 벌을 받습니다. 390일을 모로 누워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40일을 또다시 모로 누워서 유다의 죄악을 담당합니다. 에스겔이 기쁨으로 그 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이기에, 여호와의 영에 의하여 세움을 입었기에 자신은 그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담당하는 일에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지금 주의 영에 의하여 죄를 담당하는 에스겔은 이것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기쁘게 받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으로만 됩니다.
그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면 아주 멸하지 아니하면 그들과 맺은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바벨론이며 유배지입니다. 이곳에서 살며 고생하는 것이 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기쁨으로 이런 환난을 맞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홀로 이 저주와 재앙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십자가에서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성령을 받은 자는 놀랍게도 세상의 환난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야고보서 1:1-4절입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자신이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이 있으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땅이 바벨론이라는 유배지이기에 예수 믿고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세상의 힘을 믿지 않고 살려고 하면 집안에서 먼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려고 하면 교회에서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기쁨으로 견뎌내라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에스겔이 상징행위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었듯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상징행위가 됩니다. 믿음으로 오는 환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 5:1-17 심판의 이유 2011. 12. 14
1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 2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3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4 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5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6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9 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17 내가 기근과 사나운 짐승을 너희에게 보내 외롭게 하고 너희 가운데에 전염병과 살륙이 일어나게 하고 또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난주에 에스겔의 상징행위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적에게 포위되는 것이지만 포위한 적을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것임을 철판으로 가리는 것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상징행위의 결론입니다. 5:2절을 봅니다.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예루살렘 성읍을 토판에 그리고 그 성읍을 향하여 왼쪽으로 390일 오른 쪽으로 40일 동안 누워있어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음식과 물은 저울에 달아서 연명할 정도로만 먹어야 하고 떡을 구울 때에 소똥으로 구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430일이 차면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상징행위가 오늘 본문입니다.
에스겔 5:1-4절입니다. 아마 430일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 정도로 버텼으니 몸은 아주 수척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에스겔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카로운 칼로 깎아서 저울로 세 등분으로 나누어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 합니다. 그 흩어진 뒤를 따라 여호와께서 칼을 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삼분의 일을 나누어 불에 태우고 칼로 치고 바람에 날려버리는 중에 조금 남은 터럭을 옷 자락에 싸고 그 가운데 얼마를 불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출신입니다. 제사장은 머리를 대머리처럼 밀면 안 되며 수염도 함부로 깎지 못합니다(레21:5). 그런데 삭도로 밀어버렸으니 대머리가 되었고 수염도 다 밀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수염이 깎인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입니다. 사무엘하 10장을 보시면 다윗이 암몬 왕의 죽음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사절단의 옷을 자르고 수염 절반을 깎아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하므로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이처럼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았다는 것은 극심한 애도와 굴욕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인 에스겔의 이런 행동은 보는 자들로 하여금 충격과 경악에 빠지게 합니다.
에스겔 5:5절입니다. 에스겔의 상징행위가 끝나고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토판에 예루살렘의 성읍을 그렸기에 사람들이 다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와 공격과 심판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자들이 심판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았습니다만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다가 쳐들어오니 곧 물러간다고 합니다. 결국 포로로 잡혀가게 되니 이들은 또 2년 만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지금도 거짓 선지자들이 선동하고 있기 때문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에스겔의 입을 주목하였는데 이것이 예루살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왜 심판을 받는지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5절 중반에 보시면 예루살렘을 이방인 가운데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지리적으로든 영적으로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하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도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와 유럽으로 연결되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으로 이집트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다 조그마한 예루살렘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제사장 나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4-6절입니다.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호와의 이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하고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 언약의 복과 저주가 지난주에 보았던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만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언약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심판을 받습니다. 이런 심판의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에스겔 5:6-7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거슬리는데 그 악이 이방인보다 더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도 못하였지만 그들의 윤리와 도덕과 양심의 법으로 살아가는데 이들보다 더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지난주 주일 낮에 보았습니다만 율법을 받지 못하여도 그들의 양심과 그들 자신이 법이 되어 율법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그 큰 구원과 시내산의 강림을 보았고 아주 분명한 언약의 문서를 받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받지도 못한 이방인보다 더 악한 행위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치와 사회경제적인 죄악들이 이방인보다 더 악하였습니다.
둘째는 에스겔 5:11절입니다. 종교적인 죄악입니다.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으로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혔다고 합니다. 우상을 성전에 가득채운 것은 에스겔 8장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방 나라도 자기들의 신을 바꾸지 아니하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우상을 그들의 신으로 섬겼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10-13절입니다.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은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인데도 그들의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주어지는 저주가 8-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전무후무한 벌을 내리시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먹는 벌을 내리고 너희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방에 흩으리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머리카락과 수염을 불에 사르고 칼로 치고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고 미약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삼분의 일은 사방에서 칼에 엎드려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사방에 흩어 버리고 그 뒤를 따라가며 칼을 빼리라고 하십니다.
황무하게 하고 이방인들 중에서 또 모든 지나가는 자의 목전에서 모욕 거리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예루살렘에 벌을 내림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수치와 조롱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고 합니다. 연이어 멸망하게 하는 기근과 독한 화살을 보내어 기근을 더하여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버린다고 합니다. 기근만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을 보내어 외롭게 하고 전염병과 살육이 일어나게 하고 칼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엄청난 재앙을 내리는 이유는 이방인보다 더 악하였으며 성전에 우상으로 가득채운 죄로 인한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심판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히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열심히 말씀하신 것을 그들이 알리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중에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세기경의 사람인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잔인한 민족신 이기에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옥 교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율법이나 양심이나 윤리와 도덕적인 잣대로 보면 성경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면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에 모든 악한 죄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보았던 레위기 26장의 말씀대로 형벌을 즐겁게 받으라는 말씀을 수용하게 됩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불평과 원망이 나올지라도 이런 말씀 앞에 마주서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조금의 손해, 자존심 상하는 일, 아주 조금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마치 방금 본 13절의 말씀처럼 나도 능력만 있다면 모든 세상뿐 아니라 신조차 심판하여 버리고는 이제 분이 풀린다고 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들이 다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받은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나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항심이 있기에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지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에게 정성을 바침으로 더 나은 자아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수요가 있으니 그런 수요에 맞추어주는 공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받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 이방인들보다 더 자기의 신을 버리는 행위를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박윤선 목사님의 에스겔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죄로 인하여 난관에 빠져있다. 이때에 우리 자타가 바로 되는 길은, 어떤 물질적 원조를 확보하거나 교세 확장을 위주로 할 것이 아니라, 자체 안의 부패를 시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이 땅의 교회 형편이 어떻습니까? 본질로 돌아갔습니까? 오히려 30년 전보다 세상으로부터 더욱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몇몇 교회와 목사와 교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는 악행을 범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세상에 속하였기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더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신은 처음부터 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늘 돈을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돈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 돈과 힘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남은 것은 에스겔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서 불사르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어버리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는데도 멀쩡하다면 더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것은 버려두심입니다. 그러나 실낱같은 소망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오래 참고 계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하기는 주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께로 돌이켜 달라고 기도합시다.
에스겔 6:1-14 여호와인줄 알리라 2011. 12. 21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4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5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6 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 7 또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14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선지자가 무언의 상징적인 행위를 보여주고 나서 그 행위들의 의미를 말로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1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는 말씀이 임하여야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전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들의 마음에 상상하는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내용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도 계시를 받았다고 하지만 거짓말 하는 영에 의하여 받게 되면 그들 자신이 속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역대하 18장에서 시드기야와 미가야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나에게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다 엉터리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반드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증거 하시는 것이지 기록된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추가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것을 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인데도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서 온갖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은 듣지도 말고 붙잡지도 말아야 합니다. 과연 말씀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은 자기에게 임한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1-3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스라엘 산들을 향하여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라고 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산과 언덕과 골짜기를 칼로 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산들의 문제가 아니라 산당들을 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그런 우상의 전들이 산당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만 성전이 세워지고서는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안에 산당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 산당들은 우리의 시골마을에 서낭당처럼 마을마다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커다란 바위, 샘물이 나는 골짜기 마다 정성을 빌던 우리나라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사야 57:5절입니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예레미야 11:13절입니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이스라엘 온 땅에 우상이 가득합니다. 이런 우상숭배에 얼마나 열심인지 길이 멀어 피곤하여도 헛되다고 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바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산들과 언덕과 골짜기에 대하여 전하는 말씀은 산당들을 향하여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산당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산당의 파괴만이 아니라 그 산당을 만들고 산당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며 그들에게 복을 빌던 모든 자들도 그 산당의 파괴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이 4-7절까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봅니다. “봉독” 산당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해골을 제단 사방에 흩어버리시고 성읍이 사막이 되며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심판하심을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자 하십니까?
7절입니다.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심판을 하십니다. 이런 심판의 근거는 레위기 26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언약의 저주가 임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배반하였고 그 배반한 결과로 심판을 받게 하시는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우상은 헛것이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서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65회나 나옵니다. 심판을 통하여서 여호와를 알게 하시고 구원을 통하여서도 알게 하십니다.
8-10절입니다. “8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 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처절한 심판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살아남은 자가 사로 잡혀서 이방인들 중에 있게 하시는 것도 그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살아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기억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여호와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서를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음란한 모습은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나라들과 언약을 맺으며, 진멸하여 없애라고 한 온갖 우상들과 연합하는 것을 보고 음란한 행위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가증한 모습과 음란한 모습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나라가 망하고 온갖 산당들이 무너지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한탄하게 합니다. 한탄한다는 말은 역겨워한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음란한 행위를 기억하면서 한탄하고 역겨워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가증한 일을 우리가 행하였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알게 하십니다. 오늘 설교제목처럼 이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은 자를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기억하게 하고 그 죄로 인하여 한탄하게 하고 여호와를 알게 하시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에스겔 선지자는 전하여야 합니다.
11-14절입니다. “봉독”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전하여야 할 말씀은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진노입니다. 이런 진노로 인하여 4-7절에서 말씀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죽임당한 시체들이 평소에 그렇게 좋다고 열심히 사모하며 달려간 온갖 우상숭배의 제단들에 내팽개쳐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심도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국가적으로 언약을 맺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라가 온통 우상숭배를 하여도 이스라엘 국가처럼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온갖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을 징계하십니다. 우상을 계속하여 따라가지 못하도록 막아내십니다. 이것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난은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는 우상을 섬겨도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의 산당들이 무엇입니까? 마을마다 있는 산당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야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산당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모여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우상들을 섬기면서 구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가 교회당을 만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산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여 우상숭배를 하다가 심판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지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을 위한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심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데 심판을 통하여서도 알게 하시고 남은 자를 통하여서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든지 구원을 받든지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심이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로 아는 것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입니다.
호세아 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합니다. 그 지식이란 호세아 4:1-2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한 이스라엘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는 아닙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있다면 이것이 산당입니다.
호세아 6:1-3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것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입니다. 계속하여 6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를 마태복음 9:9-13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니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힐난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13절입니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마치 여호와의 증인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을 부르시는 것을 통하여 여호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여호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시면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이 모든 성경이 구약입니다. 여호와인줄 알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17: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까? 잠시 보이다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며 살게 됩니다.
이장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