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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회복과 찬양
단 4:34-37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단 4:34-37 /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왕이 말하였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내가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35) 주께서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시지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수리도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 그 누가 감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랴! 주께서 하시는 일 그 누가 감히 이러실 수 있느냐고 입을 뗄 수 있으랴! 36)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다스리던 이 제국의 영광과 위엄과 영예가 회복되었다. 나를 돕던 관료들과 귀족들도 모두 나를 환영하였고 내 왕권도 되찾았다. 나는 전에 누렸던 영예보다 더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37)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징계가 끝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총명을 회복합니다.
그 기한이 차매(34-35) 이 징계의 목적은 느부갓네살 왕이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기한이 찼다”는 말은 이 징계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그에게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이전의 그의 교만한 모습(30)과 대조를 이루며 그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겸손하게 하늘을 우러러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총명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이어집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35절을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최고 권세자이시며,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업무 복귀(36) 이전처럼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으로 돌아와 어전회의를 주도합니다. 그의 위세는 더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신하들을 다그쳐 벌벌 떨게 하였다면 이제는 덕으로 이끕니다. 광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왠지 모를 빛과 밝음이 그의 얼굴과 주변에 비춥니다. 또한 “내게 찾아오니”라는 말을 주목하면 전에는 신하들이 왕의 호출을 두려워하였으나 이제는 신하들이 자발적으로 왕을 찾아와 고충을 토로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의 지극한 위세는 권력이 아니라 그의 온유한 성품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37) 간증은 낮추심으로 끝납니다. 그는 본래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정복자입니다. 나라 간의 전쟁을 신들의 전쟁이라고 믿었던 고대의 관념에 따라 그는 바벨론의 신들(벨, 마르둑)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그는 진심으로 낮아져 하나님을 하늘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찬양과 칭송과 경배를 드립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잃음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잃는 것이 불행만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잃음을 통해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적용: 느부갓네살 왕의 간증에서 참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가요?
제임스 버릴 엔젤은 1871년부터 1909년까지 38년간 미국 미시간 대학의 총장을 지냈습니다. 그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을 때 기자들이 몰려와서 그토록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총장 자리는 명예롭지만 그만큼 지키기가 어려운 자리인데 오랫동안 유임을 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엔젤이 대답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팔보다 안테나를 더 높이 세웠던 것이 비결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것이 유임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 설 교 >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
단 4:34-37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이방인의 왕 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가 지금 읽은 본문이외에도 2장과 3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섭리하심에 대해서 3번씩이나 고백한 것으로 다니엘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 역시 다니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6:16, 25-27).
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왕의 입에서 어떻게 하여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과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해서 스스로 찬양하는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는 여전히 우상신을 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 그리고 끝으로 그는 어떻게 그러한 성숙한 고백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1. 첫번째 고백
느부갓네살 왕의 첫번째 고백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그가 장래의 일을 염려하며 잠이 들었을 때 꾸게된 꿈에 대해서 다니엘이 해몽하여 주었을 때 그가 했던 것입니다. "...생략(꿈 해몽)....."
이와 같이 다니엘이 꿈을 해몽해 보이자 느부갓네살 왕은 단 2; 46-47 에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의 내용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47의 "모든 신의 신"이니 "모든 왕의 주재"라는 표현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의미에서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많은 신들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즉,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단지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하나의 신이요,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하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꿈을 해몽했던 다니엘을 높은 자리에 앉혔다 하더라도 진정 그 꿈을 보여주시고 해몽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가 경배하거나 그를 따르는 모습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금신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을 하게 하는 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2. 두번째 고백
그러면 두번째 그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느부갓네살 왕의 두번째 고백은 다니엘과 함께 끌려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관련된 사건에서 나타난 고백이었습니다. 첫번째 고백에서 살펴본대로 여호와를 참된 유일신으로 고백하지 않은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했는데 마침 유대인들을 참소하는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왕은 이 세청년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넣으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단 3 : 28 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여기 두번째 고백에서는 첫번째 고백과 비교해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좀더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고백이 여호와의 그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똑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반해 3 : 29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표현은 좀더 구체적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느부갓네살 왕은 3 : 29절에서 "무릇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행동이 거만하고 무례함)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엄히 명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존재를 참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 왕의 두번에 걸친 고백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요컨대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고백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은 느부갓네살의 세번째 고백을 살펴보면서 대답될 수 있습니다.
3. 세번째 고백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던 때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단 4:1-3 절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안의 때를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또다시 그에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꿈과 해몽에 대해서는 단 4:15-26 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꿈의 요지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라"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 왕은 단 4 : 30 에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교만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단 5:18-21절에는 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그는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꿈은 현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단 4:34-37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번째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고백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번째 고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두 번째 고백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내용 뿐인 것에 반해 세 번째 고백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함은 물론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우상신보다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주관자이심을 증거해주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으로만 여겨지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격적으로 얼마나 인간의 삶에 가깝게 머물고 계신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느부갓네살 왕의 세번째 고백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격적이며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나의 인격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설령 그것이 입술의 찬양으로까지 이어질 수는 있다 하더라도 다만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남용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고백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까?
혹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그런 고백은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의 실패를 맛보는 것은 혹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소망없는 사람과도 같이 언제나 불안과 염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잘 알고 또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미움과 시기로 가득찬 그런 삶은 아닙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굳건하게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고백을 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백이 질적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 인식에서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에 있어서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참 하나님을 알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들은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또 우리로부터 도움을 요구하게 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도움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연약한 자와 병든 자를 우리가 돌아보지 않음으로서 우리들은 천국잔치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하려 하지 않고 누구도 돌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쁘게 행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더 성숙해가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어려움과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돕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남에게 짐을 안겨주는 일들을 자행하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그리고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보여준 태도는 도대체 어떠한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금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지막 제안에 대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단 3:16-18절에서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 불가운데서 자신들을 건져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설령 그러한 소망이 헛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은 오직 여호와만을 참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의 확신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적인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사자굴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 6:22-23).
우리 민족은 지금 위기의 한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아쉽고 또 가슴 아픈 일들은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위기에 휘말려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 때에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지낸다면 우리의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섬기면서 오히려 남을 도우면서 또 담대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은 이땅에서의 삶이 아니고 천국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에 기쁨의 소식을 증거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증거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삶 속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지금 위기 가운데서 방향을 잃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러한 위기에서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게 됩니다. 오히려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권세
단 4:34-37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칠 때 대부분이 좋은 쪽으로 가르치고자 애를 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어려운 일은 쉽게 해결되도록 하시고, 고통도 물러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런 쪽으로만 가르칠 때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갈 수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느냐 입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겪게 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것이 그 고통과 어려움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제외해 배리고 고통을 없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말한다면 결국 그 사람을 하나님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아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감히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만큼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내가 이것을 할까요 말까요'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천국으로 이끄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좋은 일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나에게 고통이 되는 쪽으로도 기적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셔서 천국으로 이끄시는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을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느부갓네살은 꿈 내용대로 소처럼 풀을 먹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게 되고,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짐승같이 된 느부갓네살의 비참한 모습은 하나님 편에서 주신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겪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분명 이것은 느부갓네살에게는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고통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끝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4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자가 되었더니 그 고통이 끝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의 백성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땅에 것을 붙들려고 할 때 하나님은 순찰자를 통해서 잘라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에 대한 미련과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늘에만 소망을 두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바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하나입니다. 35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나라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자기 영광에 빠지게 됩니다. 바벨론의 부강이 자신의 힘이었던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같이 된 일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면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심으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게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세상보다는 하나님이 더 좋다는 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 어떻게 되든 나에게는 하나님만 계시면 상관없다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영원한 권세입니다.
인간다운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그 일을 인정하는 것이 곧 복종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런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나에게 땅의 것이 잘려지는 고통을 제공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하늘만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땅의 것은 언제라도 잘라버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미리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하는 걱정은 이방인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몸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물론 몸을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되 그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수익을 믿지 말고, 그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언제라도 나에게서 잘라질 수 있음을 알고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4:34-37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에 바벨론과 메대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중 바벨론은 천 년의 역사 중 구바벨론이 무너지고 신바벨론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바벨론을 세운 왕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신 바벨론은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이집트, 당시의 애굽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펼치게 됩니다. 말그대로 대제국이 된 것입니다 . 그리고 남유다를 세 번 침략하여 마침내 완전히 무너뜨리게 됩니다. 남유다는 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입니다. 이 삼차 침략 중 1차 침략때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고 그 가운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기록한 것이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서 1~4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꿈을 많이 꾼 왕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꿈이 그리 좋지 않은 내용인 것 같아 그로말미암아 몹시 두려워하고 번민하였다고 나옵니다. (단 4:5)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우고 다스리지만, 꿈 하나에 번민하고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고 세상의 권력이 이런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작은 것 하나에도 무너질 수 밖에 없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왕은 그 꿈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 벨드사살로 이름한 다니엘을 불러 꿈을 해석토록 합니다. (단4:9) 그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큰 나무가 있어 그 나무가 견고히 자라 하늘에 닿도록 자랍니다. 아름드리 나무의 가지들에는 아름다운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새들이 쉬어가며 들짐승이 머물다갑니다. 그런데 한 순찰자,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가지를 자르고, 짐승들과 새들을 쫓아냅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두고 그것을 쇠와 놋줄로 동이고 일곱 때를 지나게 한다는 꿈이었습니다. (단4:10~16)
그 꿈의 내용을 들은 벨드사살로 이름한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그 것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과연 좋은 징조가 아닌 꿈이라 번민하며 말하기를, 이 꿈의 불길한 해석이 왕에게 임하지 아니하고 왕을 미워하는자, 대적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단4:19) 이 꿈에서 나온 큰 나무는 바로 느부갓네살 왕을 말하는 것이고 왕이 신바벨론 제국을 세워 번영시키나, 그 교만함이 하늘을 찔러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의 주권아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하시고자 왕의 교만함을 꺾고 그것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곱 때가 지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꿈의 끝은 나쁜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이 이 모든 일을 깨닫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 다시 그를 왕으로 세우시지만, 그에게 장차 일어날 일은 좋지 않은 일, 그의 교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해석처럼 그에게 실제로 이런 일들이 임하게 됩니다. (단4:28, 38)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고 낮아진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통치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지나 기한이 차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왕의 자리로 세우시게 되고 왕은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그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는이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단4:34~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엎드리고 간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갖기가 쉬우나, 일이 잘 풀려나가고 내 생각과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내 공로를 치하하고 내 생각을 의지하고 내 경험만을 밀고 나가며 교만해지기 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어려울 때 보다, 어떤 일이 잘 될때 더욱 우리 스스로를 경계하며 돌아보고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일의 성과가 잘 되는 그 과정이 우리의 분별력을 잃게 만들고 총명이 흐려지고 지혜가 무뎌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주장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고 항시 그런 마음의 중심을 가지기를 간구하며 주님께 모든 주권이 있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방인, 이방의 왕 느부갓네살 왕이 그 모든 상황을 지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그 상황을 지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낮아질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앞에 선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통해 꿈을 해석하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알며 모든 상황을 지나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느부갓네살 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70년 간의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다시 본토로 돌아가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그것을 찬양하는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언제나 마음의 중심을 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주권 앞에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무릎 꿇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 언제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시며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회복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낮은 곳에 있어도, 높은 곳에 있어도 이 모든 일을 허락하시는 것, 이 모든 일을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요동치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바로 우리에게 그 하루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 하루를 더 연장하여 살 수 있게 생명을 부여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시작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내고 찬송드릴 수 있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단 4:34-37 | 다니엘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교만했던 느부갓네살 임금을 낮추기 위해서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왕위에서 쫓겨났고 사람들에게서 쫓겨나서 짐승들과 같이 거하고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비극적인 상황이 7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4절 보십니다. "그 기한이 차매." 몇 년이 지났습니까? 7년이 지났습니다. 7년이 지난 뒤에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교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볼 줄 몰랐습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알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인간 이상으로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인간 이하로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짐승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었던 교만이 사라져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뉘우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저는 지극히 낮고 천한 존재입니다."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세입니다
.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우러러볼 줄 모르고 나 자신만 생각하면서 나만을 위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바로 그때에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승의 마음이 다 사라지고 다시금 인간의 마음이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마음, 짐승의 마음, 깨끗하지 못한 마음들이 다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마음, 깨끗한 마음, 지혜의 마음, 주님의 심정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리학에 불가입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공간에 두 물체가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물컵에 물을 부을 때는 컵 속에 있던 공기가 나옵니다. 한 물컵 속의 공간에 물과 공기가 동시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주님으로 충만하면 세상의 더러운 생각들이 내 마음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세상적인 지저분한 짐승의 마음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 짐승의 마음을 다 떨쳐주시고 오직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주셔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인간의 마음을 다시 받게 되었을 때 느부갓네살 임금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옷을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7년 동안 머리를 한번도 깎지 않고, 또 빗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머리털이 독수리 털 같았다고 했습니다. 7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7년 동안 손톱, 발톱을 깎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까? 새 발톱같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흉측한 모습이었겠습니까? "내게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나."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온전히 회개하는 모습이 34절 하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어떻습니까? 지극히 천하고 낮은 자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로, "감사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온전히 거두어가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또 나에게 인간의 마음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또 자기에게 정신병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할 수 있고, 지극히 높으신 자를 깨닫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병을 주신 그 자체도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느부갓네살 임금이 감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둘째로,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안개와 같습니다. 새벽에 자욱하게 끼었다가 동편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언제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존경하였노니." 감사드리고, 찬양하고, 존경했습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을 존경할 줄 몰랐습니다. 삼상 2:30 하반부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존경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길 수 있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우리를 귀하게 쓰십니다. 높여주십니다.
동사가 세 가지 나왔습니다. 감사했고, 찬양했고, 존경했습니다. 과거에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통해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고,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할 줄 알고,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할 줄 알았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하나님은 영원히 사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나라는 잠시 잠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인간 나라, 세상을 위해서 너무 땀흘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바벨탑처럼 쌓은 것 같지만 다 쓰러지고 맙니다. 대대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땀흘리고 애쓰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 하늘 나라 창고에 보화를 쌓아두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만이 대대에 이를 것입니다.
그 다음에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나님 앞에서 땅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nothing입니다. 전혀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이 땅의 모든 거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군사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언제 보았습니까? 풀무불 속에서 보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기 위해서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서 자유롭게 거니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자기의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순찰자, 거룩한 자가 자기로 상징되는 땅의 중앙에 있는 큰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이신 것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직접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물만 마시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니까 그 얼굴빛이 더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어떠했습니까? 자기에게 충성했던 신하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해서 풀무불 속에 던지는 자기 신하들에게 불이 붙어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 하나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연약합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땅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느부갓네살 임금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순찰자, 천사가 자기를 벨 때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땅의 거민에게도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 임금은 여러 번의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누가 하나님의 손이 하시는 일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냐 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다스려 나가시고 섭리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깨닫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에 우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야 할 줄 압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게 생명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주의 전으로 불러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이 아침에 내 마음을 드릴 수 있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감사의 조건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고통을 주시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는 줄 알고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이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면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없어질 세상만을 위해서 땀흘리지 말고,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지 말고, 대대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거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든지, 땅의 거민이든지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과 항복
단 4:1-37
◎공부할 내용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 짐승의 마음을 받아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면서 들짐승과 함께 살았습니다. 오늘은 느부갓네살 왕이 그와 같이 된 이유가 무엇이며, 또 그가 어떻게 다시 정신이 온전해져서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에 관한 꿈을 꾼(참조, 단 2:1-49) 이후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보니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높이가 하늘에 닿을 만큼 커서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일 정도였습니다. 아름다운 잎사귀를 가진 그 나무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열매가 맺혀 있었습니다. 또 나뭇가지에는 공중에 나는 새들이 깃들이고 나무 그늘에는 많은 들짐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오더니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 4:14-17)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불러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단 4:9)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즉,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본 나무는 바로 느부갓네살 왕을 의미하는데,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들짐승과 함께 7년을 지낼 것이며, 7년을 지내는 동안 왕의 교만이 깨어져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다시 왕위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참조, 단 4:20-26).
2. 교만했던 느부갓네살 왕
느부갓네살 왕은 당대에 가장 큰 나라인 바벨론 제국과 그 수도인 바벨론 성을 건설한 왕이었습니다. 이 바벨론 성은 고고학자들이 ‘세계 고대 문화에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웅장하고 찬란하게 건설된 도성(都城)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세운 바벨론 성 위에 서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라고 교만하게 말했습니다.
이는 마치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3-14)고 한 사탄의 말과 같이 교만한 말입니다.
잠언 16장 18절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참조, 잠 3:34; 벧전 5:5).
바벨론 성 위에 서서 한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단 4:31-32).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참조, 단 4:33).
3. 하나님께 항복한 느부갓네살 왕
교만하여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던 느부갓네살은 7년이 지나자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참조, 단 4:34). 여기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항복한 것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동안,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라 세움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교만했던 사실을 깨닫고 뉘우쳤던 것입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에게로 다시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4)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서 짐승의 마음이 떠나가고 정신이 온전해지자 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그를 찾아와 그를 다시 왕으로 섬겼습니다(참조, 단 4:36).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된 느부갓네살 왕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7)고 고백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적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에 대한 도전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징벌하십니다. 성경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야훼를 사랑하라 야훼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연구
1.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어떻게 되었습니까(단 4:33; 공부할 내용 참조)?
2.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항복한 후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습니까(단 4:37; 공부할 내용 참조)?
◎나눔과 적용
1. 교만을 회개한 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한 경우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2.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의 꿈
단4:34-37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고,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을 찬송하고, 영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 내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 나의 명예와 위엄과 나라의 영화가 회복되었고, 나의 고문관들과 대신들이 나를 찾아왔으며, 나는 이전보다 더 큰 영예를 받으면서 왕위를 회복하였다. 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고 높이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과연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참되며, 그의 모든 길은 공의로우니, 그는 교만한 이를 낮추신다.”]
• 묵시문학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긴 겨울이 이제 물러갈 채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꽃샘추위가 있다 한들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나로호가 우주 궤도에 진입하던 날, 많은 중죄인들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마땅히 나와야 할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어 사람들은 허탈해 합니다.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씁쓸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현실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거울은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가 기록된 시기는 주전 2세기경입니다. 그 때는 대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유입된 헬레니즘 문화로 말미암아 각 나라는 문화적 정체성과 신앙에 일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 즉 땅에 나타난 신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는 애굽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정복한 후 도성을 불태우고, 성전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포고령을 내려 전통적 관습을 포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율법을 소지하거나 낭독하는 것을 금지했고, 안식일을 비롯해 다른 절기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곳에 이방 신들을 위한 신당을 세우고, 그 제단 위에서 부정한 짐승을 잡아 바쳤습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이스라엘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묵시문학이 그런 것처럼 다니엘서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를 성찰하기 위해 과거의 이야기를 끌어들입니다. 그가 선택한 시기는 바벨론 제국의 전성기였습니다.
다니엘서는 포로로 잡혀갔던 젊은이들이 그 이방 땅 바벨론에서 어떻게 뜻을 정하여 믿음을 지켰는지, 그리고 사자굴과 풀무불로 상징되는 억압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는지를 아주 흥미롭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주전 2세기의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되새길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야기는 우리를 더 큰 역사 혹은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 평안할 때의 불안한 꿈
느부갓네살 왕의 꿈 이야기를 통해 다니엘은 역사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왕 중에서 아마도 제일 유명한 사람일 겁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다니엘 덕분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세계사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요, 위대한 건축가였습니다. <바벨론 연대기>나 <왕들의 원정기>라는 책에는 그가 벌였던 정복전쟁에 대한 보도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는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파괴하고, 불태웠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 위대한 정복자라라고 칭송하고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라고 말합니다. 그게 온당한 평가일까요?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도로써 임금을 돕는 자는 군대를 강하게 하여 천하를 다스리게끔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일은 반드시 되갚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모든 사물은 강장해지면 노쇠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노자 30장).
지나친 성공은 언제나 불행의 씨앗을 동반합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거대한 신상’을 보는 꿈입니다(단2장).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꿈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조서를 통해 이 꿈이 언제 자기에게 왔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집에서 편히 쉬며 궁에서 평화를 누릴 때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나를 두렵게 하였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생각이 번거로웠고, 머리 속에 받은 환상 때문에 나는 번민하였다."(단4:4-5)
‘집에서 편히 쉴 때’, ‘궁에서 평화를 누릴 때’ 불길한 꿈이 찾아온 겁니다. 가끔 SNS 상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이들이 살벌한 논쟁을 마치면서 상대에게 이런 문자를 날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꿈 꿔." 어느 분이 여행을 떠난 아내와 딸에게 ‘내 꿈 꿔’라는 문자를 보냈더니 아내로부터는 ‘꿈 깨’라는 답이, 딸에게서는 ‘헉’이라는 답이 왔다고 투덜거리더군요. 평안할 때 꾸는 불길한 꿈을 사람들은 무의식이 보낸 손님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때도 많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술사들과 마술사들과 점성가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꿈 해몽을 청하지만 누구도 그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니엘을 불러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면서 꿈 해몽을 부탁합니다.
꿈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그는 땅의 한 가운데 있는 높고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가 점점 자라서 튼튼하게 되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게 되었고, 땅 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도 풍성했고, 새들과 들짐승들이 먹이를 얻고 그 그늘 아래에 깃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늘에서 한 감시자가 내려오더니 큰 소리로 나무를 베라고 명령했습니다. 잎사귀는 떨어지고 열매는 흩어지고 짐승들도 쫓겨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줄과 놋줄로 동이고 들풀 속에 버려두어, 이슬에 젖게 하라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 다니엘의 권고
다니엘은 거룩한 영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그와 그의 제국이 번영의 정점에서 겪게 될 운명의 예고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미쳐서 사람의 세상에서 쫓겨나고, 들짐승처럼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세월을 7년이나 보내야 겨우 제정신이 들어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것"(4:25)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 이야기가 과거에 빗대 현실을 타격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묵시문학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보았던 그 ‘나무’의 운명은 어쩌면 제국주의를 지향하면서 폭력으로 약한 이들을 유린하는 이들의 운명임을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입니다.
꿈의 해석은 해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꿈은 미구에 닥쳐올 일을 미리 알려줌으로 그 불행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조언을 합니다. "공의를 행하셔서 임금님의 죄를 속하시고, 가난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죄를 속하시기 바랍니다."(4:27) ‘공의’와 ‘자비’야말로 그가 지금까지 저질러온 모든 폭력과 억압과 착취에 대한 보속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세운 정복 군주 앞에서 포로로 잡혀온 한 외국인이 ‘공의’와 ‘자비’를 요구합니다. 이게 예언정신입니다. 한 나라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연약하고, 병들고, 무력한 이들조차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압제자들의 눈에는 없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왕보다 더 높으신 분, 역사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그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니엘의 권고에 이어 마치 마침표를 찍듯 "이 모든 일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대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꿈에 본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권고는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우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29절은 그 꿈이 현실이 된 내력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꿈을 꾼 지 일 년이 지난 후 느부갓네살은 왕국 옥상을 거닐면서 혼자 흥에 겨워 말합니다. "내가 세운 이 도성, 이 거대한 바빌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나의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느냐!"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너에게 선언한다. 왕권이 너에게서 떠나갔다. 너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을 것이다. 이와같이 일곱 때를 지낸 다음에야,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과,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1-32)
역사 기록을 보면 정말로 느부갓네살이 미쳐서 정권에서 쫓겨나 들짐승처럼 떠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론은 신흥제국에 의해 무너졌고, 그들이 자랑하던 바벨탑과 공중 정원은 철저히 유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고하신 일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가장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현실의 곤고함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이야기는 우리를 절망의 어둠 속에서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라
이제 오늘 이야기의 결론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합니다.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고,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을 찬송하고, 영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
대제국을 건설한 사람, 오만한 통치자가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면 짐승이 되기 쉽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영혼의 날개가 커집니다. 땅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는 까닭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살라는 뜻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우리 삶을 자꾸만 조회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영혼은 추락을 시작합니다. 들짐승처럼 떠도는 느부갓네살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역사는 비로소 정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라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라와 개인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공의’와 ‘자비’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나라 혹은 개인은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를 오롯이 받아들여, 하늘이 주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당신의 인생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단 4:28-37
좋다가 만 꿈
느부갓네살 왕은 두번째 꿈을 꿉니다. 땅의 중앙에 위치하여 하늘에까지 견고히 자라 땅 끝에서도 보이는 견고한 나무에 대한 꿈입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아름답고 무성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11-12절). 그 나무는 천하를 통일한 느부갓네살 왕 자신입니다(22절). 여기까진 좋았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점점 불길해졌습니다. 거룩한 순찰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나무의 그루터기만 남겨두고 다 베버린 것입니다. 결국 왕의 실권을 의미하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의 주어가 ‘내’가 될 때의 결국
그 꿈을 꾼 후 실제로 정확히 일년 후에 느부갓네살은 왕좌에서 쫓겨나 들판을 유리하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느부갓네살의 교만에서 찾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인생의 주어는 언제나 ‘나’였습니다. 다니엘서는 시작부터 이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신 것임일 강조합니다(단 1:2). 그리고 다니엘서 4장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대로 세상의 권세를 주시고 권세자들을 세우신다 반복하여 강조합니다(단4:25, 단4:32, 5:21).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단 4:32)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주권자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는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내었다.”(단 4:30)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꾼 두번 째의 꿈대로 느부갓네살을 왕좌에서 내리시고 낮추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잠 16:5).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성경의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어가 되어 다 내가 한 것이고 다 내가 이룬 것이라 큰소리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할 때, 모든 것을 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반드시 낮추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십니다(사 42:8).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그러나 여전히 기회는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소처럼 풀을 먹으며 들짐승과 같이 유리하며 살다가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를 높여주십니다(단 4:34).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자신을 우러러 보는 인생에서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인생으로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의 주어가 ‘나’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난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주어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레슨입니다.
인생의 절대 주어
경건한 유대인들은 머리에 항상 키파(kippah)라는 모자를 씁니다.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항상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내 실력, 내 업적, 내가 쌓아 놓은 것들을 자랑하며 스스로 높아졌던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내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겸손한 주의 종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권세를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절대 ‘주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능력: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인생의 주어로 삼는 것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다니엘서 1장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풀만 먹어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2장의 메시지는 세상 역사를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의해 뜨인 돌(a stone was cut out without hands) 즉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겁니다. 다니엘서 3장의 메시지 역시 동일합니다. 풀무불에 던져져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모든 상황도 우리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코로나 사태도, 경제적 어려움도, 내 아픔과 상처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어로 삼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를 다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는 너희를 높이시리라.” 할렐루야
느부갓네살 왕
단 4:34-37 / 박형근 목사
성경의 인물을 나누는 중에, 다니엘을 생각하다가 조금 색다르게 다니엘 당시의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성경에 여러 차례 나왔을 뿐 아니라, 여호와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체험하고, 여호와를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의 이라크지역에서 시작해, 이란, 터어키, 시리아, 이스라엘, 애굽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뤘지요. 그가 지은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인류역사상 이해 안 되는 놀라운 업적으로 기억됩니다.
외국에서 시집 온 왕비를 위해서, 왕비가 살던 고향의 아름다운 정원과 같이 만들려고, 사막에 높은 탑을 지어 계단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었지요. 강에서 물을 탑 꼭대기 물탱크까지 퍼 올려, 나무에 주었습니다. 왕비가 궁에서 내다보면, 고향의 정원보다 나은 꽃 동산이었다 합니다. 그런 느부갓네살 왕이, 이스라엘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들을 끌고 갔는데, 그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지요. 다니엘서에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이 자세히 언급됩니다. 오늘 세 이야기를 나눕니다.
먼저, 느부갓네살은 왕이 된 2년 후, 꿈을 꾸었는데 뭔가 의미 깊은 것 같은데, 꿈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왕 측근에 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들, 지혜자들이 많았지요. 꿈을 해석하고, 점을 치고 별자리를 풉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모아, 내 꿈을 해석하라 윽박지르자‘무슨 꿈인지 알려주셔야 해석하지요.’왕은‘너희가 무슨 꿈인지 알아내 해석하라.’‘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습니다. 꿈을 알아야 해석합니다.’
느부갓네살은‘너희가 시간을 끄는구나. 너희 하는 일이 그게 아니냐? 속히 해석하지 않으면 다 죽이리라.’왕은 근위대장에게 죽이라 명합니다. 지혜자인 다니엘이 듣고, 근위대장에게 며칠 말미를 주면 꿈을 알아서 해석하겠다고 한 후, 친구들과 여호와에게 간절히 기도하지요. 여호와께서, 왕이 꾼 꿈을 알려주셔서, 다니엘이 왕 앞에 나가 말씀드립니다.‘왕이 꾸신 꿈은,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 하나님은 왕의 꿈에 큰 신상을 보이셨습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입니다. 왕이 본즉, 손대지 않은 돌이 날아와,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몸체가 부셔져 타작마당의 겨가 바람에 불려가듯 다 사라졌고,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했지요.’다니엘이 말하니, 왕은 꿈이 생각납니다.
다니엘은‘그 해석은,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를 왕에게 주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우상의 금 머리입니다. 왕을 이어, 왕보다 못한 나라인, 은, 놋, 쇠 같은 나라가 이어질 것입니다. 발과 발가락이 진흙과 쇠인 것은, 나라가 나뉘는데,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듯, 나라가 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래 일을 하나님께서 왕에게 알게 하신 것이니, 이 일은 참되고 확실합니다.’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46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자, 왕이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주게 합니다. 왕이 한 말인 2:47을 함께 읽습니다.‘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는도다.’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찬양했지만, 그런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다니엘에게 네 하나님이라 하지요.
오늘날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게 하시고, 성경 읽고 기도하게 하시고, 살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하시지요. 내 하나님이라 하는 성도도 많으나, 어떤 이는 내 하나님이라 하지 못하고, 너희 하나님에 머무는 걸 봅니다. 가령, 믿음이 좋은 어머니를 둔 분은‘우리 어머니는 참 믿음이 좋으셨어.’하는데, 아닙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야지요. (복창)‘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서를 신약의 요한계시록과 같이, 구약의 예언서라 합니다. 2:34 에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을 쳐서 부서뜨렸다하고, 35절에,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했다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 후에 여러 나라가 이어갔지만, 마지막에 손대지 않은 돌,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돌이, 사람이 세운 나라를 다 망하게 한 후, 그 돌이 태산을 이룬다 하는데, 돌은 예수그리스도이시지요. 다니엘서에, 예수님의 재림과 새 세상이 이렇게 담겼습니다.
두 번 째 이야기는, 다니엘서 3장에, 느부갓네살 왕이 평야에 커다란 금 신상을 세웠는데, 높이가 약 30미터로 건물 10층 높이나 됩니다. 낙성식에 모든 신하들이 참석한 후, 풍악이 연주될 때, 금 신상에 절하라 하지요.‘엎드려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모두들 절하는데,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왕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다니엘은 그때 없었지요, 절하지 않는다고 고발합니다. 포로로 끌려온 이들이 출세한 것을 보고 배가 아팠는데, 끌어내릴 좋은 기회로 여긴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를 끌어오라 한 후에‘이제라도 풍악이 울릴 때 엎드려 절하면 좋지만,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겠느냐?’다니엘의 친구들은‘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이어진 3:18은 함께 읽습니다.‘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를 마음에 꼭 담기 바랍니다. 요사이 예수 믿는다고 죽이는 곳은 없지만‘예수님, 제가 또는 사랑하는 이가 몹시 아픕니다. 고쳐주세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저는 주님만 의지합니다.’‘예수님,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나아지도록 도와주세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주님, 자녀를 키우기가 참 어렵습니다. 자녀들이 부모 말을 잘 따르게 해주세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주님을 더 의지하겠습니다.’이것과‘주님, 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세요.’전혀 다르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화가 나서 평소보다 풀무 불을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다니엘의 친구들을 던져 넣지요. 불길이 얼마나 드센지, 던져 넣던 이가 불에 타 죽습니다. 그리고 난후, 왕이 놀라 일어나며, 신하들에게‘우리가 불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였느냐 내가 보니 결박 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 거니는데 상하지 아니하였고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왕과 주위의 신하들이 본즉, 불이 다니엘의 친구들의 몸이나 머리카락도 해치 못하고, 불 탄 냄새도 안 납니다.
‘어찌 그런 일이? 난 그런 만화 같은 이야긴 안 믿어.’그러나, 전해지는 많은 간증들은, 그처럼 매우 어려운 중에 주님이 지키신 이야기들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진심어린 고백인 3:28을 함께 읽습니다.‘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전국에 조서를 내려‘다니엘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 터로 삼을지니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다니엘친구들의 믿음이 자신을 구하고, 전국에 참 하나님을 알렸습니다. 그 후에,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믿음을 지켰기에,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150년 전 우리나라도, 예수를 계속 믿겠다면‘참수’안 믿는다면‘석방’할 때,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을 지키며 죽음으로 나갔지요. 다니엘의 친구들은, 풀무 불에서 살아남았지만, 순교자들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면, 살고 죽는 것이 별 문제가 아닙니다. 옳지 않은 일에‘믿는 나는 그럴 수 없어.’그런 여러분 모두 되기 바랍니다.
세 번 째는 단 4장에, 느부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이 나옵니다. 이번엔 시작부터 2절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왕은 자신이 겪은 놀라운 일을 즐거이 설명합니다. 왕이 꿈을 꾸고, 박수와 술객에게 물어도 해석을 못했으나, 다니엘에게 말하니 해석해 주었지요. 왕의 꿈은, 땅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자라서 견고해지고 높이가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일 만 했습니다.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가 많아서 만민이 먹을 만하고 짐승과 새가 나무에 깃들만 합니다. 그런데, 한 거룩한 순찰 자가 내려와서 소리 질러‘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과 새들을 쫓으라. 뿌리의 그루터기를 쇠줄로 동이고 들 풀 가운데 두라. 마음이 변하여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왕이 꿈을 해석하라 하니, 다니엘이 한동안 말을 못하고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합니다.
왕이‘내 꿈 해석으로 네가 번민하지 말라.’다니엘이‘주여, 이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합니다. 꿈의 큰 나무는 왕입니다. 왕이 견고해지고 창대해, 하늘에 닿고 권세가 땅 끝에 미치십니다. 많은 민족이 왕에게 복속합니다. 순찰 자가 한 말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왕에게 미칠 것인데,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과 이슬을 먹을 것이라 합니다.
이같이 일곱 해를 지냄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 줄을 깨달을 것이고, 왕이 깨달은 후에, 왕의 나라가 견고해집니다. 왕이여,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장구할 것입니다. 이 내용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에게 꿈대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4:30,31절에 보면‘나 왕이 말하여, 내가 바벨론을 건설하였고, 나의 도성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을..’느부갓네 왕이‘나, 내가, 나의.. ’하며 한참 교만을 떨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며‘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일이 바로 느부갓네살에게 임해, 7년이나 정신이 나가, 미친 사람처럼 들에서 뒹굴며 짐승처럼 풀을 뜯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손톱은 새 발톱처럼 자랐습니다.
거기서 회복한 느부갓네살 왕이 찬양한 4:37을 함께 읽습니다.‘그러므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우리에게 교만하지 말라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더 의지하라 합니다. 신구약을 통 털어 느부갓네살만큼 귀한 체험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그리 찬양한 이는 없는데도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눕니다.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그런 놀라운 체험과 찬양을 하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을 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합니다. 아직 안 믿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리도 예수 믿기 힘들구나, 깨달으며 낙심치 말고 계속 주님께로 인도하세요. 믿도록 기도하세요. 권면하세요. 무엇보다 믿어서 좋음을 삶으로 보이세요. 아울러, 그리 믿기 어려운데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주님은혜로 알고 감사하세요. (복창)‘주님!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느부갓네 왕의 첫 꿈에서 나눴듯이, 세계 역사상 바벨론제국, 로마제국, 많은 나라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졌지요. 뜬 돌이 그 우상을 부서뜨리고 온 세상에 가득했듯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나라가 마침내 임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당장의 눈앞에 일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멀리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영원을 소망하며, 이 땅을 천국백성 같이 평안과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합니다.
셋째는, 풀무 불에 들어갔다 살아난 친구들처럼‘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믿음을 지녀야지요. 주님을 믿고 의지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믿음이면 낙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느부갓네살 왕은 대 제국의 왕으로 온갖 것을 누렸으나, 어느 날 정신이 나가고 짐승처럼 들을 헤맸지요. 우리에게 부귀영화가 잠시 피었다 지는 들의 꽃처럼 덧없음을 알려줍니다. 오직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고, 참된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