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사 1,10.16-20; 마태 23,1-12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2024.2.27.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 1장은 매우 신랄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창궐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고사에 빗대어 당시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소돔의 지도자’로 불렀으며, 백성은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신랄하게 지칭을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악행을 멈추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해야 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이렇듯 동족의 죄악상을 고발하여 회개를 촉구했던 이사야의 예언자적 잣대를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잣대를 시대적 편차를 감안하고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여 알아듣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사회교리 용어로 설명하자면, 사회악을 근절하고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을 구현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회적 애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독서가 이러한 사회적 회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면, 복음은 종교적 회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행태를 들어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고 엄중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위선적 행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종교적 회개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행실은 이러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본래는 성냥갑 크기의 상자에 중요한 성경 구절을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기도하기 위해 고안된 성구갑을 본 크기보다 더 넓게 만들어서는 이를 담는 옷자락 술까지 더 길게 늘여서 많은 성경 메모를 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기도하는 척한다든지, 잔칫집에서나 회당에서 높은 사람들이나 앉는 윗자리를 좋아한다든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거나 사람들에게서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버릇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보이려 하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그들이 모세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위선자로 고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의 죄악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과 새 영으로 겸손하게 서로 섬기는 태도를 종교적 회개의 행실로 주문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제자가 되자면 반드시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서, 이를 거부한다면 결코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단언하신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는 말씀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말씀은 맥락상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섬김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제자들은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어 죄악의 어둠을 비출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회개 요청의 노선에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일이 자신이 부여받은 소명이라고 천명한 바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동합의성」을 반포한 바 있습니다.
이 문서에서, 공동합의성의 여정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으로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본질적 차원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1항). 그러니까 겸손하게 서로 섬길 줄 아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제자의 본분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현대적인 용어로 바꾼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식별하고 함께 실천하기 위한 모든 논의에 있어서 공동합의성을 이루는 일이야말로 서로 섬기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공동합의성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직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틀입니다(9항). 그래서 이 문서의 본 제목도,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의 공동합의성」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직도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둡다는 것은 겉으로 본 모습이나 물리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개인의 마음이건,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건, 단체나 조직 상호 간이건, 심지어 국가와 국가 간에서건, 서로의 이익을 앞세울 뿐 대화와 타협과 공존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고, 바로 이런 현실을 두고 죄악이 가득 차 있다거나 어둡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교계제도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생활이나 활동의 논의과정에 있어서 겸손하게 서로 섬길 줄 아는 십자가를,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일이 그토록 소망스럽고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현존시켜야 하는 교계 직무의 특별한 사명이 존중되면서도 평신도들이나 수도자들을 배제시키는 성직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를 위한 능동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교회 헌장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선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를 쇄신시키는 길인 동시에 갈라진 형제들, 그러니까 동방 정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개신교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과도 다시 일치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과제입니다. 공동합의성이 충만한 친교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초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이후 서로 발전시켜온 다양한 카리스마들을 서로 배우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체험을 더욱 풍요롭고도 올바르게 하게 해 줄 것입니다”(9항).
이 권고에 따라서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이를 주제로 한 ‘시노달리타스’ 즉 모든 교회 구성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교계제도에 속한 성직자들이 교회 구조를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상호 섬김 즉 공동합의성이 실현되는 구조로 쇄신시키는 임무를 솔선하도록 권고받고 있다면, 세상 속에서 이 구조를 실현하는 임무는 교회의 대다수 구성원인 평신도들의 임무입니다.
이 중차대한 임무는 이사야 예언자가 촉구한 바, 사회악을 근절하고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을 구현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회적 애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를 실천하는 사회적 회개의 사도직 활동과, 이를 위해 신앙인들이 선의의 모든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새 마음과 새 영으로 겸손하게 서로 섬기는 태도를 실천하는 종교적 회개의 공동체적 삶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행되는 회개의 활동과 삶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게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여기에 선교의 본령과 복음화 과업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무룻 한 사회나 또는 작은 공동체에 있어서도 리더십의 기본은 솔선수범으로 구성원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데에서 비롯합니다. 이 기본적 행동수칙이 묵시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하는 일은 목표와 기본에 해당되는 것이고, 필수적 행동수칙이 겸손의 덕목으로 따라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믿고 추구해야 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요, 지도자라면 당연히 이 말씀을 남들보다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이를 내세워 말씀보다 자신이 돋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이고 종교적 회개를 받아들이고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면교사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아보게 할 것입니다. 복음적인 가톨릭교회를 이룩할 수 있는 주역은 이처럼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춤으로써 복음적 매력을 발산하는 새 인간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 인간이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사회는 명품사회가 되어 그렇지 못한 더 큰 세상에 대하여 부러움을 사는 매력을 발산할 것이며,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 사는 것이 될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