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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전 휴거(携擧)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妄想)이 될 수 있다.
환난전 휴거는 누구나 소망하는 것
환난 전 휴거는 마지막 때 환난 임하기전에 교회가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는 해석이다. 다니엘서에 나온 칠십 이레의 예언 중에서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기간인 일곱 한(한이레를 일곱 이레로 잘못 표기하여 정정합니다) 이레가 되면서 환난이 시작되는데 (단 9:25-27) 이는 요한 계시록에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하는 것으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런 극심한 재앙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공중으로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잔치를 칠년동안 벌인다는 것이다.
칠년 대 환난을 당하지 않고 공중에서 지상에 임하는 칠 년동안의 엄청난 재앙을 보면서 주님과 즐거운 잔치를 즐긴다는 것이다. 참으로 말세의 환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말세 통과 사상이다. 계시록에 기록된 엄청난 재앙과 전 지구적인 환난을 면할 수 있다는 이 사상은 매우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사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신자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라도 말세에 재앙과 환난을 면하고 싶은 것은 인지 상정(人之常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인함인지 환난 전 휴거 사상이 한국교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상태로 많은 신자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다.
필자도 오래전에 환난전 휴거에 관한 책을 읽고 이 행복한 말세 통과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심취(心醉)하여 오랫 동안 이를 믿어왔다. 십여년 전에는 휴거를 주제로 하는 송명희의 환난소설 "표"를 읽고 이에 공감하고 "송명희 대 환난 소설 '표' 에 나타난 인물들에 대한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글을 온라인에 올린 바도 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환난전 휴거 설이 성경적인 근거가 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환난전 휴거의 근거로 인용되는 성경구절이 억지로 갖다 부친 것 처럼 되어서 보편 타당한 해석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환난전 휴거설이 구라파와 미국의 세대 주의자들이 주장하던 학설로서 미국에서는 영향력을 잃어버린 구닥다리 비성경적인 사상임을 인터넷 정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휴거로 해석되는 성경구절의 정확한 이해
환난 전 휴거론 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인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라는 구절 해석이"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라는 구절에 치우친, 편벽된 해석으로 인하여 그 앞절에 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라는 구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반쪽자리 해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수십번 성경을 통독하면서도 이 구절은 막연하게 지나쳐 버린 것이다. 이는 필자가 아둔하고 어리석었음이기도 하지만 일찌기 환난전 휴거에 관한 책을 읽고 이에 맹신하게 되어 이구절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해서 통독하다보니 성경전체의 윤곽을 점차 이해하게 되고 성경구절을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해석할 수있는 눈이 조금씩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놓쳤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성령님의 지도에 따라서 배워야한다.
성경을 책을 통해서든, 사람을 통해서든, 배울 때에 잘못된 선입견을 통하여 성경을 배우게 되면 성경을 바로 아는데 많은 지장을 받게되고 이를 교정하는데 장구한 시간이 걸리게 됨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배울 때에 잘못된 관점을 통하여 배우게 되면 성경의 본뜻과는 엄청나게 다른 잘못된 해석이 되고 잘못된 신앙관이 되기 마련인데 극단적인 예가 이단사이비들의 잘못된 성경공부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성경공부는 사람이나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지도로 배워야 한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님의 가르침을 바라고 기도하면 성령님의 가르치심이 임한다. 그때 그때 필요한 성경 구절의 의미가 깨닳아진다. 가장 확실한 공부인,성령님을 통한 성경공부를 하고나서 일정한 단계에 오르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성경의 본 뜻에 어긋나는 것은 분별하게 되므로 절대로 미혹당할 염려가 없는 것이다.
신자 생활을 하다가 이단에 미혹되는 사람은 성령님을 통한 성경공부를 거치지 못한 연고로 성경말씀을 통한 분별력이 부족하여 미혹당한 것이다. 본인 경험으로는 책상머리에 성령님을 교사로 하여 성경 통독을 열 번만 해도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반하는 이단들의 이단 사설 정도는 능히 분별할 수 있었다. 다만 근본 진리안에서도 여러가지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성경통독을 통한 성령님의 지도가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되었고 잘못된 선입관이 작용하는 구절은 더욱 시간이 소요되게 됨은 위에 인용한 구절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휴거는 부활의 한 과정이다.
환난 전 휴거론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위의 성경 구절은 그 주제가 휴거가 아니고 부활에 관한 것임을 "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라는 앞의 구절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간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얻어지는 인간의 부활인데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전서 15장에 자세히 설명되어있고 부활의 순서는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다(고전 15:52).
그러하므로 휴거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위의 구절은 부활을 설명한 것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주님의 지상 재림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으므로 마지막 때에 모든 환난이 끝 난뒤 일어나는 사건이다. 주님의 재림은 심판주로서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서 (계 19:11-21) 하늘 군대를 거느리고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고 거짓 선지자와 짐승을 잡아서 유황불 못에 던져 심판하시는 것인데 이 때 부활이 일어나고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들어가게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라고 기록되어 있다(계 20:4). 그리고 이는 첫째 부활이라 하였다(계20:5).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시에 일어나므로 환난 경과 후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는 부활 과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고 산 자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고전 15:51,52). 계시록에 기록된 주님의 재림 사건을 보면 주님의 재림과, 세상 임금들과 군대를 정벌하는 것과, 짐승과 선지자 징벌과 옛뱀을 잡아 무저갱으로 던져 잠그는 일과, 첫째 부활이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고린도 전서 부활 기록과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 17절 기록을 보면 이는 기록은 여러 사건이라 순차적으로 기록되었지만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부활이 환난 후에 일어나므로 휴거도 환난 후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환난 후에 주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일어나므로 칠년 환난전에는 부활이 없는 것이다. 환난전에 부활이 없으므로 부활의 한 과정인 휴거도 없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한 과정 중의 하나인 공중 들림을 부활과 분리하여 반쪽자리 해석을 하니 부활과 휴거를 분리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한 과정 중의 하나가 휴거이므로 부활이 어느 때에 일어나느냐에 따라 휴거 시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환난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휴거 사건도 환난 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큰 환난을 당하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의 날을 감하신다 하셨다(마 24:22)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으로 환난을 견디라 (계13:10)고 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이 환난 전에 들림 받는 다면 환난의 날을 감해 주실 필요가 있겠는가? 환난 중에 인내와 믿음으로 견디라고 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면 주님이 택하신 성도를 외면 하실리가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보아도 어디에도 환난 전에 부활 휴거하여 환난을 면한다는 구절이 없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하는 이 말씀을 환난 전 휴거로 인용하기도 하는데 온세상에 임하는 시험을 면케 해준다는 말씀은 온 세상에 임하는 어려운 시험을 면케 해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 환난을 면하게 해준다고 해석 할 수도 있겠다. 요한을 천상으로 부르는 구절(계4:1)을 인용하여 교회의 휴거로 억지 해석하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원문에 나온 시험이라는 뜻이 시험, 유혹, 꾀임, 속량등으로 나온 것을 보아 이 시험이 모든 환난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한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험의 때를 면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험을 안당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환난 초기에 큰 환난을 당하며 죽은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은 자들이다(계7:9-14). 이들은 다섯 째 인까지의 환난중에 죽은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그 후에 닥치는 일곱나팔과 일곱대접의 재앙을 면한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온세상에 임하는 환난을 면한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 이 때이후까지 살아서 환난을 겪는 사람들보다 환난을 면한셈이므로 이들을 지칭 한 것으로 해석 할수도 있으나 원문의 뜻이 환난과 멀므로 적절한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환난 전 맹신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어처구니 없는 망상(妄想)에 빠질 수가 있다.
이외에도 여러 성경구절을 환난 전 휴거로 인용하는데 이에 대한 것은 비유적인 해석이 될 뿐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단들이 잘 사용하는 것이 비유풀이 해석인데 이는 잘못된 길로 가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근거가 희박한 환난전 휴거를 주장하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억지로 종말시기를 정하여 휴거 시기를 정하고 기다리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妄想)에 빠졌던것 처럼 있지도 않은 환난 전 휴거를 기다리다가 큰 좌절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환난 전 휴거를 고대하다가 휴거 없이 환난을 겪으며 적그리스도의 통치시기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차라리 환난을 견디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는 기도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 이 두려운 환난을 도저히 우리의 믿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면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부탁하여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이 모든 환난중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의지나 믿음으로 감당 못해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도가 있다면 어떤 모양이라도 주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이다.
이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으로 부터 삼년 동안 배우고 살았지만 주님 잡히던 날에 다 도망하였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다.
환난을 이기는 능력을 주님께 부닥하는 기도 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한 성령 충만 받은 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주 성령님의 역사였다. 이는 순교자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는데 자기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께 의지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순교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해도 주님의 능력안에 있으면 승리할 수 있으므로 이를 부탁하는 기도 생활이 중요하므로 환난을 준비하는 자세로 주님께 매달리는 기도 생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글은 몇년 전에도 올리고자 했는데 주님이 합당하게 여기는지 알 수 없어서 보류 중이었다. 환난을 통과한다면 누가 좋겠는가? 그러나 말세 징후가 너무 뚜렷하고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계속되면 한국이나 외국이나 적 그리스도의 세상이 급속하게 오게 되므로 준비할 시간이 없을 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몇사람에게라도 알려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비슷한 글은 다른 사람들도 올렸겠지만 필자도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남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글을 작성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전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듣던지 안듣던지 경고하는 것이 파수꾼의 사명이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겔 33;2-6). 그러므로 읽는 사람들은 이글에 대하여 받아들이든지 베척하든지 자기 뜻대로 하면 된다.그러나 대부분의 환난전 휴거론자들이 휴거에 참여키 위하여 경건에 힘쓰는 신자들로서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줄 아는데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오류에 빠질까 염려되는 것이다. 이들이 성경을 상고하여 휴거가 부활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에 대하여 준비하는 신앙적 작업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환난전 휴거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억지로 성경 구절을 꿰어 맞추다 보면 논리적인 성경해석을 하지 못하고 망상적인 해석에 빠져서 잘못된 길을 가기 쉬운 것이다. 누구나 엄청난 칠년 대환난을 피하고 싶지만 성경에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의지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며 주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기를 소망하여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 이런 기도로 준비하게 되면 환난을 당해도 주님을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하늘나라에 저금하듯이 쌓아논 기도로 인하여 주님의 능력을 덧 입어 환난을 견디는 길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급속히 진행되는 적그리스도의 세계화와 개신교의 배교
이런 준비 없이 휴거를 기대하다가 환난을 당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어 믿음의 시험을 이기기 어렵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예상보다도 급하게 말세 현상으로 변하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마귀의 전략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교회가 주님을 배반하여 마귀의 수중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키는 동성애를 비롯하여 온갖 음행을 저지르게 하려고 적그리스도 세력의 앞잡이들은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법에도 없는 동성애 교육을 어린이 교육과정에 도입한다는 말도 있으니 무법 천지로 세상은 변질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의 지향대로 세계 통일과 종교 통일을 위해서 다문화운동과 종교 다원주의로 민족주의와 개신교를 말살하려고 하고 있다.
불과 오십년전만 해도 대체적으로 건전한 도덕률과 미풍 양속이 세상을 이끌었으나 불과 반세기 만에 급격한 타락과 오염으로 세상은 말세 현상으로 치달려 가고 있는데 그중에서 개신교의 배교와 타락은 놀라운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자와 연합하여 배교의 길로 들어선 많은 개신교 단체는 한국에서도 나타났는데 그중 예장통합과 기독교감리회와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 등과 여러 군소교단이 배교의 길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종교 통합의 명목으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을 부인하므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버린 배교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뿐 아니고 근래 몇년사이에 그동안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던 예장합동과 다른 교단 중에서 교단 중직에 있는 자들이 이들 배교 단체와 통합을 서두르는 어지러운 상황에 있다. 만일 이들의 조종하는 대로 모든 평신도들이 따른다면 이는 제이의 신사참배 죄악이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 국가 의례라는 명목으로 일본국가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일제가 강요 했을 때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와 평교인들이 이에 굴복했고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켜 남북분단과 동족 상잔의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나마 10 % 정도의 교인이 투옥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에 저항하여 믿음을 지켰고 이들의 믿음과 기도로 한반도는 암흑의 세상인 공산당 국가로 몰락하지 않고 절반이나마 남한이 주님을 믿는 자유민주의 국가가 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타락해지는 나라와 그를 바로 이끌지 못하는 개신교회의 역량미달속에 나라와 민족은 적그리스도의 침노를 받게 되었는데 교회가 앞장서서 적그리스도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민족과 나라가 버림받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의 길로 가는 것
일제시대는 투옥당하는 형벌의 위협이 있어서 우상숭배에 굴복했다하지만 지금은 우상 숭배종교와 연합하지 않아도 무슨 형벌 받을 이유가 없는데 자진하여 우상숭배의 배교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니 기가 막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헤를 배반하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려하는가? 예수 이름 팔아서 목회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예수를 등뒤로 던질수가 있는가? 설마하니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든 종교의 신은 하나인 줄 진정 믿는단 말인가? 이런 믿음이 고대 이스라엘의 바알을 믿는 신앙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해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만만한 분으로 잘못 알고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런 믿음 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부흥 성장시킬수 있으며 목회를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요, 참담(慘憺)한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을 사랑하시어서 주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 형틀에 올라가므로 인생들의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부활하여 인생들로 하늘나라의 자녀로 구원받을 구원의 길을 마련 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명하기를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먼저 뜻과 마음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인간을 사랑하셨다. 주님은 목숨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려고 인간의 죄를 대신히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그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의 사랑이었다(롬 5;8). 인간들을 향하여 뜻과 정성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실상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이 사랑을 받은 인간이 주님 앞에서 하는 행위가 믿음인데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어찌 주님을 배반하고 우상신과 연합한단 말인가? 이들 배교자들이 믿었다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진정 믿기는 하였단 말인가? 이러한 믿음으로 교회를 어떻게 부흥시키며 명망있는 목회자의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었는가? 인격적으로 존경받고 신앙적으로 신뢰받던 분들이 이렇게 쉽게 배교로 돌아선 것을 보니 놀랍고 의아스럽고 한탄스럽기만 하다.
이 길로 가면 다 지옥행인데 이를 전혀 믿지도 아니한단 말인가? 자신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거느리는 수많은 양떼들은 어찌하려는가? 다 같이 지옥의 동반자로 끌어 갈 것인가? 성경 역사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이방민족의 침노로 전쟁이 발발하고 노예 생활을 하였던 기록이 안 믿어진단 말인가?
우상 숭배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반복하여 죄악이 누적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종당에는 망국의 비극을 당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도 이를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런 배교행위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겠다. 일제 시대에는 일제의 협박으로 감옥가기 싫어서 우상 숭배 했다면 지금은 누가 종교 다원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협박하는 자들도 없는데 어찌 그리 쉽게 배교의 길을 갈 수 있는가?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차이
나를 위해 피흘려 목숨을 바쳐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어찌 그리 쉽게 자원하다시피 우상 숭배자들과 연합하며 주님을 배반 할 수가 있는가? 천국가기 어렵다는 근래에 유포된 천국간증자들의 간증으로 시험이 들어 카톨릭의 비성경적 교리인 연옥설과 사후구원설에 경도(傾倒) 되었기 때문인가? 성경을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들의 교리가 엉터리고 결국은 멸망받을 바벨론 음녀의 교리라는 것(계17장)이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것을 보고도 그들의 완충적인 교리에 마음이 미혹될수가 있는가?
성경에는 분명 불가운데 받는 구원으로 그리스도 터위에 세운 믿음 만 배반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전 3:10-15). 천국간증자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 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의 일방적 주장에 말려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행위가 부족해도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안에서 필요한 회개 생활을 충실히 하면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고 구원해준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요일 1:3). 사람의 말 천만마디 보다 성경 한구절의 약속의 말씀이 더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사 41:8)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충성된 믿음의 행위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헌신된 믿음을 보고 칭찬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이라고 로마서는 증거하고 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19-22)"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 받은 믿음은 독자 이삭을 아낌없이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본 것이 아니고 이렇게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은 애초에 약속한 대로 네씨를 통해서 자손이 번창해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굳게 믿어서 재속에서라도 살려내서 자손을 보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 후손들이 아브라함 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하신 것으로 보인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친한 친구를 지기(知己)라 하는데 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주고 신뢰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신뢰해주는 사람이다.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신뢰하지 않고는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신뢰한 믿음을 보여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으므로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지기(知己)의 자리에 서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된 것 같다.
이런 믿음의 조상을 바라보면서 우리 후진들도 아브라함이 보여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무슨 경건과 충성 이전에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는 다면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약속, 하나님 자신이 육신으로 오셔서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셨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아직 믿음의 출발도 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지금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므로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오류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섬긴다는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함으로 인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아니고 성경 밖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신념이나 사상을 믿는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 뿐 아니고 성경말씀보다 자신의 신념이나 자신의 사상을 성경 말씀위에 올려 놓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듯이 보여 실상은 자신이 하나님이 된 사람으로 지극히 조심하고 경계하여할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말씀위에 철저하게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부시고 주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된 모습이 될수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화난 전 휴거를 신봉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 경건한 듯 보여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 내부에 자리잡아 성경말씀에 우선하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 처럼 되는 잘못에 빠질수가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환난은 싫어하고 이글을 쓰는 필자도 환난을 당하기 싫고 환난을 피하기 원하지만 성경에 환난 전 휴거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환난을 통과하도록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 말씀을 신뢰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필자 같이 어리석고 우둔하며 누추하기가 비할 데 없는 부끄러운 그릇인데 보다 지혜롭고 경건하고 정결한 신앙인들에게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주제 넘은 짓 같아서 몇번을 망서렸으나 말세 현상이 임박한 듯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내가 깨달아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의 뜻이 감동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둔한 문장으로 글을 올렸다.
아무쪼록 이글을 읽는 독자들이나 글을 쓰는 필자나 말세의 환난을 성령님의 전폭적인 능력을 힘입어서 넉넉히 극복하여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만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자신이 속한 가족들과 권속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7년 한이레 이후의 휴거설을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첫째부활을 인정하시는 것은 맞습니다만 첫째부활은 그 이상도 이하도 조건이 없습니다.
즉, 큰 환란에서는 온전한 육신으로는 통과 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마24장)(계14장)
성경의 말슴 중에 7년 한 이레 이후의 휴거의 말슴 근거를 부탁드려도 되는지요?
감사합니다.
늦게 답글을 달아 죄송합니다. 본문에도 나오는 것 같이 휴거는 부활의 한과정으로 보니까 휴거도 부활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믿는 자의 부활이 첫쩨 부활인데 주님 지상 재림시에 난다 했으니 이때는 한이레 환난후가 되는 것이지요.주님을 공중에서 만나는 것이 부활인데 이 때가 환난후라고 보는 것입니다. 살전 4:16,17에 기록된 대로 주님이 재림 할 때에 공중에서 7년동안 주님이 머문다는 것이 환난전 휴거론인데 공중에서 7년머문다는 기록이 없고 계시록 20장 5절에 기록된 대로 첫째부활은 환난후에 일어난다고 시기적으로 명시되었으니 한이레후의 부활이고 휴거라고 해석됩니다. 본글에 기록된 대로 부활을 비롯한
@joseph 심판을 비롯한 사건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런글은 각자 해석이 다르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글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있습니다. 산소 님의 견해 외에 어떤분의 좀 몰상식한 글도 있습니다만 일일이 댓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익한 논쟁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산소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이런 분에게 부탁하는데 다만 인터넷에서 올리는 글은 글 한줄로도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되니 예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관한 글을 올릴 때에 글 한마디 잘못에도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군요.
암요.망상이구 말구요.
적절한 지적이시라 생각합니다. 훌륭한 분석에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점점 환란후 휴거설에 대한 글들이 인정되고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불과 1-2년전에는( 아마 주기신은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환란후 휴거설은 바로 삭제에 강퇴 내지는 글쓰기 정지 먹었습니다. 이곳 빛 흑암카페 등대지기님도 그러신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환란후 휴거설 올렸다가 일정기간 글쓰기 정지 당했습니다. 정말 분위기 많이 바뀐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환난이 한참 진행 중일때는,
즉, 환난 중에는 외계인 납치카드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옆집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신경 쓸 여유도 없겠고
없어진줄도 모를겁니다
환난 중엔 통신 역시 차단될텐데
굳이 휴거를 납치 사건으로
만들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구원 사역의 측면에서
불신자에게 주님의 심판이 다가온다고
전파하면 돌이켜 회개하기보다
피난처로 도망가기가 쉬울듯 합니다
만약 환난 전 휴거가 맞다면
불신자들은
주님께 더욱더 매달릴거로 생각됩니다
주님이 징계하시는 이유와 맞아떨어지지요
글쓴이의 주장을 보면 "성경적 근거가 없는 환난 전 맹신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어처구니 없는 망상(妄想)에 빠질 수가 있다."라고 하셨는데, 환란전 휴거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말로 보입니다. 물론 환란후 성경적 근거도 있습니다. 따라서 환란전 주장과 환란후 주장의 단일한 성경구절만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펴기 보다는, 성경을 숲으로 보는 관점과 숲속의 나무로 보는 관점을 종합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정죄하면서까지 극단적인 논리를 펴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환란전 휴거를 믿는 것이 어찌 맹신입니까?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는 본문에 소개된 글에 있습니다. 이글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든지 배척하든지 각자 의향대로 하시면 됩니다. 개인적인 해석을 올린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 대한 님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환난전 휴거에 대한 비유적이 아닌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시면 얼마든지 제 주장을 철회할 용의가 있습니다.누구든지 성경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난전 휴거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맹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죄입니까? 언어표현이 거칠지만 저는,휴거를 준비하는 경건한 분들에 대하여 정죄는 커녕 염려의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환란 전 휴거에 대한 기록도 있고,
환란 후 휴거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잘못된 신학 잘못된 믿음이
잘못된 해석을 낳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막습니다
그런데 휴거를 제대로 깨닫기가 어렵지요
조세프 씨 에겐 망상이 될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