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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핵무기 개발 [중국근현대의 인물]
1. 마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원자탄이란 괴물 보유해야”
처음엔 “위력 과장 말라”던 마오 - 국·공 전쟁 승리 기미 보이자 관심
- 극비리에 회의 소집해 개발 시작
1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이 걸렸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첫 번째 핵실험 성공에 환호하는 과학자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 60년대에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대국 대열에 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인류 최초의 원자탄을 투하했다. 3일 후 나가사키(長崎)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여 만명이 사망하고, 두 도시는 쑥대밭이 됐다. 옌안(延安)의 중공 중앙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가 원자탄 투하 소식을 1면에 보도했다. “불길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모든 생물이 타 죽었다.”
마오쩌둥은 보도를 믿지 않았다. “말 같지 않은 기사”라며 신문을 던져버렸다. 전화기 들고 보꾸(博古·박고)를 연결하라고 호통쳤다. 마오쩌둥이 당의 군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당을 대표하던 보꾸는 해방일보의 책임자였다.
해방일보는 일본 패망이 임박했다며 경축 분위기였다. 기자들과 술잔 나누던 보꾸는 마오쩌둥의 전화를 받으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속사포처럼 퍼부어대는후난(湖南) 사투리가 어찌나 컸던지 방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들을 정도였다.
“보꾸! 너 어디 명당자리라도 구해놨느냐? 이런 허무맹랑한 오보를 낸 이유가 뭐냐? 다른 동지들과 당장 이쪽으로 와라.” 보꾸와 편집 간부들은 한 시간 이상 마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더 이상 원자탄의 위력을 과장하지 마라.”
이튿날 미국 여기자가 마오쩌둥을 방문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나누던 중 원자탄 얘기가 나왔다. 여기자가 허수아비(scarecrow)라고 하자 마오는 틀렸다며 ‘Paper Tiger’가 맞다고 했다. “원자탄은 미국 반동파들이 사람 겁주려고 만든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2 핵실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동원된 8·1 영화제작소 촬영팀. [사진=김명호 제공]
4년 후 국·공 전쟁에서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마오쩌둥은 원자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불렀다. “외국 출장 가는 물리학자 첸싼창(錢三强·전삼강)에게 돈을 줘라. 프랑스에 들러서 원자탄에 관한 도서와 자료, 실험기구들을 깡그리 수집해 오라고 일러라.”
그해 여름(1949년 8월 29일) 소련이 1차 핵실험에 성공했다. 10월 1일 개국을 선언한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했다. 체류기간 동안 평소에 안 보던 영화를 많이 봤다. 핵실험 기록영화를 보고 잠을 설쳤다.
귀국 후 첫 번째 회의에서 원자탄을 언급했다. “소련에 간 보람이 있었다. 영화로 원자탄실험 보고 진땀이 났다. 미국도 있고, 소련도 있다. 우리도 소홀히 넘길 물건이 아니다. 원자력 연구를 전담할 연구소를 분야별로 20개 정도 만들어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에 있는 중국 과학자들에게 귀국을 권해라.”
프랑스에 있던 퀴리 부인의 딸 졸리오 퀴리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귀국을 결심한 방사능 전문가 양청쫑(楊承宗·양승종) 편에 마오쩌둥에게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자탄을 반대하려면 원자탄을 보유해야 한다. 원자탄은 생각보다 무서운 물건이 아니다. 원리도 미국인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나는 중국의 핵 연구를 지지한다.” 적은 양이었지만, 직접 만든 라듐염도 양청쫑에게 선물했다.
집권 2년 차에 들어선 소련의 흐루쇼프가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양국 고위층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면 말해라.” 마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원자력과 핵무기에 흥미가 있다. 소련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 그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
흐루쇼프는 손사래를 쳤다. “그 물건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돈도 많이 든다. 우리는 한 가정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핵우산 밑에 있으면 된다.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물건에 돈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만든 다음에도 창고에만 처박아두고, 시간이 지나면 또 만들어야 한다. 그런 낭비가 없다.”
마오쩌둥은 심사가 뒤틀렸다. 극비리에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함께 첸싼창과 과학원 부원장 리스광(李四光·이사광)을 대동하고 나타나 입을 열었다.
“원자탄이 과연 필요한지를 토의하자. 나는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남을 공격할 일은 없다.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하면 우리는 방어하고 반격해야 한다. 그것도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라야 한다. 그러려면 어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비행기와 대포도 많아야 하지만 원자탄이 있어야 한다. 원자탄 끼고 있는 것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원자탄인지 뭔지 하는 괴물을 보유해야 한다. 이견이 있으면 말해라.” 다들 마오의 기세에 눌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기분이 좋았다. “원자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라며 만찬을 제의했다. 마오의 오른쪽에 펑더화이, 왼쪽에 리스광이 앉았다. 첸쌍장은 마오의 건너편에 자리했다. 요리 네 개에 탕 한 개가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마오가 손수 술을 따르고, 요리도 평소보다 두 개 더 많았다. 건배 제의도 직접 했다. 중국 핵무기 개발의 막이 올랐다.
2. 마오 “우리가 핵 보유국임만 인정받으면…”
핵실험 성공 보고 받고도 냉정 - “원자탄,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
저우언라이는 기뻐 “하오” 연발 - 장아이핑이 연구 5년 만에 개발
1 1960년대 후반, 개국원수(開國元帥) 네룽쩐(가운데)과 함께 핵실험기지를 둘러보는 왕진창(왼쪽)과 주광야(오른쪽)
1959년 6월 중공은 개국 상장(上將) 장아이핑(張愛萍·장애핑)에게 원자탄 연구와 개발을 일임했다. 참모차장 겸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장아이핑은 당황했다. “감자 키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원자탄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천이(陳毅·진의) 원수가 달랬다. “모르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배우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왕진창(王?昌·왕금창)이나 덩자센(鄧稼先·등가선) 같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널려 있다.”
장아이핑은 중국 과학자들의 수준에 눈이 둥그래졌다. 1개월 후 “거국적인 지지와 지원만 있으면 1964년에 핵실험이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책임 하에 ‘원자탄 연구발전 중앙전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저우는 모든 권한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임 네룽쩐(?榮臻·섭영진)과 부주임 장아이핑에게 위임했다.
2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1차 핵실험 성공을 보고하는 장아이핑. 1964년 10월 16일 오후, 신장위구르자치구 뤄부보. [사진=김명호 제공]
네룽쩐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당시 중국의 과학계통 종사자는 190여 만 명에 불과했다. 미국 320여 만, 소련 250여 만 명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였다. 쓸 만한 과학자는 1200명 정도, 거의가 국민당이 남겨 놓고 간 과학분야 종사자와 신중국 수립 전후 귀국한 과학자였다. 이들 중에는 국내외에 저명한 인물이 많았다. 장아이핑의 예상은 정확했다.
1964년 10월 16일 핵실험 현장지휘관 장아이핑은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떴다. 6시 정각 기상처장의 보고를 받았다. “기상이 호전됐다. 아무 문제 없다.”
장아이핑의 보좌관이 일기를 남겼다. “뤄푸보(羅布泊)에 정적이 감돌았다. 새벽에 운반된 원자탄은 철탑에 안착 중이었다. 베이징의 총리 집무실에 암호 전문을 보냈다. 머리 단정히 빗고 전문 보내는 치우샤오제(邱小姐))의 옆모습이 아름다웠다. 원자탄이 제자리에 놓인 것을 확인하자 두 번째 전문을 보냈다. 치우샤오제에게 자리를 뜨지 말라고 지시했다. 나를 빤히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초롱초롱했다. 원자탄이 장착된 철탑은 가관이었다. 한 차례 둘러본 장아이핑이 입을 열었다. 통제실로 가자. 이날 처음 한 말이었다.”
출발 10m도 못 가서 장아핑이 차를 세웠다. 보좌관이 이유를 묻자 별일 아니라며 다시 출발시켰다. 훗날 보좌관이 정차 배경을 설명했다. “장군은 촬영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날도 원자탄 옆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려 했지만, 평소 부대원들에게 비밀 엄수와 촬영금지를 요구했던 탓에 포기했다.”
통제실에 좌정한 장아이핑은 폭발 단추 누를 대학생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며칠간 잠을 설치다 보니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장아이핑은 불안했다. 통제실을 지휘하던 국방위원회 부비서장 손에 기폭장치 풀 열쇠를 쥐어 줬다. 이때 총리 집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결과가 나오건 장아이핑이 직접 총리에게 보고해라.”
오후 1시 장아이핑은 60km 떨어진 관망대로 이동했다. 왕진창과 덩자센, 주광야(朱光亞·주광아)등 핵 과학자와 신장군구(新疆軍區) 지휘관, 위구르자치구 서기 등이 먼저 와 자리잡고 있었다.
15시 정각 치바오(起爆) 구령과 동시에 백광(白光)이 번쩍했다. 거대한 괴성과 함께 대지가 들썪했다. 불덩어리가 갈라지며 버섯 모양의 붉은 구름이 하늘로 치솟더니 서서히 우유빛으로 변했다.
핵 폭발 30초 후 장아이핑은 전화통을 들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 핵실험이 성공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침착했다. “핵 폭발이 확실한지 왕진창에게 확인해 봐라.” 장아이핑은 근처에 있던 왕진창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총리가 핵폭발이 맞는지 궁금해한다.” 왕진창은 표정이 없었다. 성공이라는 말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과학자들은 군인과 달랐다. 성공 여부를 함부로 단정짓지 않았다. 공병과 방화요원들로부터 “배치해 놓은 탱크와 군함이 종잇장처럼 꾸겨지고, 그 안에 있던 원숭이와 토끼들에게 변화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야 성공을 확신했다.
두 번째 전화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하오(好)”를 연발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 국무원을 대신해 원자탄 제조와 실험에 참가한 모든 동지들에게 축하인사를 보낸다. 지금 주석은 인민대회당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즉시 달려가 보고하겠다.”
저우언라이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냉정했다. “원자탄이 확실한지 상세히 조사해라.” 긍정적인 답을 듣고도 여전했다. “계속 관찰해라.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 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85년 봄 덩자센의 병세가 악화됐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쩐닝(楊振寧·양진녕)이 병문안을 갔다. 원자탄과 수소폭탄 유공자에게 국가가 지급한 상금 얘기가 나왔다. 덩자센의 부인이 10원(元)을 받았다고 하자 양쩐닝이 경악했다. “농담 그만해라.” 듣고만 있던 덩자센이 한마디 했다. “집사람 말이 틀렸다. 원자탄 10원, 수소폭탄 10원, 모두 20원 받았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3. 과학계 원로 “예치쑨은 물리학계의 영광”
노벨상 받은 양전닝 등 과학자들
“서거 15주년, 공정한 평가 받아야” - 시카고대 물리학과 입학한 예치쑨
“과학은 경제의 산물” 확신 - 하버드 대학원 들어가 박사과정
1 칭화대학은 미국유학 예비학교였다. 1912년 뉴욕에서 열린 칭화대학 출신 미국유학생 모임.
중국의 1세대 과학자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머리 좋고 단순하다 보니 이상(理想)에 복종하고 국가와 애정에 대한 충성(忠誠)이 남달랐다. 낭만적이고 품행도 괜찮았다. 그러다 보니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사제간의 우의(友誼)도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1992년 봄 칭화대학(?華大學) 구석방에 원로 과학자 27명이 모였다. 중국 원자탄의 비조(鼻祖) 자오충야오(趙忠堯·조충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振寧·양진녕) 등 세계적인 과학자가 대부분이었다.
“내년이 예치쑨(葉企孫·엽기손) 서거 15주년이다. 공정한 평가를 받을 때가 됐다. 동상이라도 세우자.” 미국에서 날아온 우젠슝(吳健雄·오건웅)이 핸드백을 열었다. 손수건 꺼내며 훌쩍거렸다. “비극적인 말년을 생각하면 속이 터질 것 같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1년이 후딱 흘렀다. 한 언론매체에 생소한 인물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중국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과 리정다오(李政道·이정도), 원자탄의 아버지 첸싼창(錢三强·전삼강)과 왕진창(王?昌·왕금창) 같은 준재들을 배출한, 중국 근대 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라며 업적을 상세히 소개했다.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치쑨이 재직했던 칭화대학이 특히 심했다.
“이런 대가의 족적을 우리와 단절시킨 이유가 뭐냐?”
예치쑨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성황을 이뤘다. 90을 넘은 중국 과학계 원로가 몇 마디로 예치쑨을 정의했다.
“예치쑨이 있었다는 것은 물리학계의 영광이며 교육계와 중국 지식인의 영광이었다.” 리정다오도 스승을 회고했다. “노벨상 받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예치쑨 선생이었다. 중국의 제대로 된 물리학은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
2 칼텍에 유학 중인 제자들을 방문한 예치쑨(앞줄 왼쪽 넷째). 연도 미상. [사진=김명호 제공]
예치쑨은 어릴 때부터 유학(儒學)의 기초가 단단했다. 열일곱 살 때 이미 국내외 출판기구, 학술단체와 교류하며 성숙한 학자티를 풍겼다. 중국 고전에 관한 연구와 감상력도 뛰어났다. 독서도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상세한 독서필기를 남기는가 하면, 전국을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자연과 풍물을 시(詩)로 화답했다.
종교라면 무조건 반감을 느꼈다. 타고난 무신론자였지만 유물론자는 아니었다. 외국인 교사의 장례식에 함께 갔던 친구가 구술을 남겼다.
“목사의 설교를 듣던 예치쑨은 짜증을 냈다.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 교리만 떠들어대니 못 봐 주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칭화대학(당시는 칭화학당) 재학 시절 베이컨과 헉슬리에 심취하면서 과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 최초의 학생단체인 과학회(科學會)를 만들어 매주 돌아가며 보고회를 열었다. 후배들에게는 타과 학생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유학을 떠났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예치쑨은 “과학은 경제의 산물” 이라고 확신했다. 경제학과 수업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학원은 하버드대학을 선택했다.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 문하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학위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예치쑨은 물리학과 설립을 준비하던 모교의 초빙을 받았다. “평생을 인재 육성과 중국의 과학 사업에 일관하겠다”는 일기를 남겼다. 27세, 청년티가 물씬 날 때였다.
북양정부에 예속된 칭화대학은 교장이 전권을 행사했다. 교장은 학문과 거리가 먼 관료나 정객이 대부분이었다. 정부에서 파견 나온 소수의 고위직원들이 대학을 좌지우지했다. 교장도 자주 바뀌다 보니 정상적인 대학운영이 불가능했다.
예치쑨은 소장파 교수를 대표했다. 교수회의와 평의회를 무기로 학내의 관료들과 한바탕 치고 받았다. 교장을 내쫓고 교장이 의장을 겸하는 교수회의를 최고의결기구로 하자고 제안했다. “과학과 학술이 뭔지도 모르는 관료들이 대학 교육을 침식하고 파괴한 지 오래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 창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교수치교(敎授治校)를 주장했다.
북벌(北伐)에 성공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한 후에도 칭화대학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난징정부는 젊은 교수들의 신망이 두터운 예치쑨을 난징으로 청했다. “교장 선임 문제를 함께 고민하자.” 장제스는 예치쑨의 손을 들어줬다. 교수회의가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치교를 승인했다. 더 이상 정부가 교장을 임명하지 않았다.
교수치교는 교수들의 수준이 중요했다. 예치쑨은 인재발굴에 나섰다. 물리학과도 확대시켰다. 이학원(理學院)을 설립하고 수학·물리·화학·생물·심리·지학 6개 학과를 신설했다. 물리학과 교수는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이 다였다. 우유쉰(吳有訓·오유훈), 저우페이위안(周培源·주배원) 등 일류 과학자들이 예치쑨의 손짓에 군말 없이 응했다.
저우페이위안이 부임하던 날, 저우의 부인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예치쑨은 미혼이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4. 예치쑨, 학력·경력 안 따지고 원폭 개발 인재 모시기
1 중국을 떠나기 직전 선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칭화대학 출신 미국 유학생 일행. 넷째줄 왼쪽 첫째가 예치쑨. 1918년 8월, 상하이.
콤프턴의 제자 우유쉰 영입 - 자오충야오에겐 물리학 권유진창·스스위안 유학 돕고
‘중국의 퀴리 부인’ 우젠슝 제자로 둬 - 수학 천재 화뤄겅은 영국 유학 보내
예치쑨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우리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중국과학원 학부 위원 55명이 예치쑨의 제자였고,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 개발에 거대한 공을 세운 과학자 70여 명도 예치쑨의 제자였다. 한 역사가의 평이 주목을 끈 적이 있었다. “예치쑨은 이미 공자를 추월했다.”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예치쑨이 부임하기 전까지 칭화대학 물리학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예치쑨의 인재양성관은 단순했다. “우수한 교사가 우수한 학생을 만든다.” 서구의 과학계 동태에 무심치 않았다. 1923년 미국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교수 콤프턴(Arther Holly Compton)이 훗날 ‘콤프턴 효과’로 알려진 양자역학의 기본법칙 하나를 발견했다.
세계를 진동시킨 대사건이었다. 중국인 유학생 우유쉰(吳有訓·오유훈)은 콤프턴의 제자였다. “콤프턴·우유쉰 효과가 맞다”는 물리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그냥 제자가 아니었다.
콤프턴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 1년 전인 1926년 가을, 학위를 취득한 우유쉰은 학계에서 공인받지 못한 콤프턴 효과를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귀국했다. 우유쉰은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다. 이름 없는 대학을 떠돌았다. 가는 곳마다 촌놈들에게 이리 채고 저리 채였다.
예치쑨은 우유쉰이 어떤 사람인지를 꿰고 있었다. 인연 맺기 위해 애를 썼다. 안부 주고받는 사이가 된 후에도 연락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8년 8월 물리학과 교수로 영입한 후 우유쉰을 위해 중국 최초의 물리실험실을 건립했다.
예치쑨은 유가(儒家)의 풍을 갖춘 과학자였다. 자신을 낮추고, 공손과 예의를 다해 인재를 구했다. 영입한 후에도 수중에 들어왔다며 오만하게 구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우유쉰이 학위를 받기 2년 전에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우유쉰이 평범한 교수였을 때 이미 학내 교수들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지만 우유쉰의 월급을 자신이 받는 것보다 높게 책정했다.
학생들의 장점도 잘 식별했다. 중국 핵과학의 비조 자오충야오(趙忠堯·조충요)는 원래 화학과 지망생이었다. 예치쑨의 권유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자비로 미국 유학을 마쳤다. 귀국 후 핵물리학 인재들을 손꼽기 힘들 정도로 배출해 스승의 기대에 부응했다.
2 중공정권 선포(1949년 10월 1일) 직후 제3 야전군 사령관 천이(陳毅. 오른쪽 셋째)가 칭화대학을 방문했다. 교무위원들과 함께 천이를 맞이하는 교무위원회 주석 예치쑨(왼쪽 첫째).[사진=김명호 제공]
왕진창(王?昌·왕금창)과 스스위안(施士元·시사원)도 예치쑨의 도움으로 유학생활을 마쳤다. ‘중국의 퀴리부인’이라 일컫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손자며느리 우젠슝(吳健雄·오건웅)의 스승이며, 퀴리 부인 밑에서 학위과정을 마친 스스위안은 프랑스의 라듐연구소에서 구매한 라듐을 자오충야오의 핵물리 실험실에 들고 온 장본인이었다.
이 라듐은 우유쉰과 자오충야오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날린 첸쉐썬(錢學森·전학삼)도 대학 시절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칭화대학에서 관비 미국 유학생 파견 업무를 담당하던 예치쑨이 항공 관련 유학생을 선발하는 바람에 방향을 바꿨다.
예치쑨은 인재 욕심이 많았다. 인재라는 판단이 들면 학력이나 경력 따위는 무시해버렸다. 만화 같은 실화 한 편을 소개한다. 예치쑨이 단골로 드나들던 서점에 똑똑해 보이는 점원이 있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얘기 나눌 기회도 간혹 있었다.
접하면 접할수록 셈본에 능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청년을 수학과 직원으로 채용했다. “직원 일하며 대학 수업을 청강해라.”
얼마 후 일본에서 발간한 수학 관련 학술지를 뒤적이던 예치쑨은 중국인 필자의 글이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화뤄겅(華羅庚·화라경), 몇 개월 전까지 서점 점원이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장편의 논문이었다. 읽기를 마친 예치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교수 평의회 개최를 제안했다. 화뤄겅에게 수학과 강의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교수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예치쑨을 존경하던 저명한 수학과 교수가 “나는 선생을 신뢰한다”며 화뤄겅을 신임교수로 추천했다.
화뤄겅은 언어와 수학의 천재였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로 논문 세 편을 발표해 예치쑨을 즐겁게 했다. 한 학기가 끝나자 예치쑨은 있는 돈 없는 돈을 털었다. 화뤄겅을 영국으로 보냈다. “너는 일류 수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너를 믿고, 내 눈을 믿는다.” 화뤄겅은 예취쑨의 기대 이상이었다.
세계적인 수학자 반열에 오른 화뤄겅은 세상 떠나는 날까지 예치쑨을 그리워했다. 임종 몇 개월 전, 생애 마지막 편지도 예치쑨의 조카에게 보냈다. “스승 생각 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방법이 없다. 나에 대한 보살핌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선생의 비극과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한 나는 사람도 아니다.” 예치쑨의 비극은 제자에 대한 사랑과 한 여인 때문이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5. 슝다전과 친했던 예치쑨, 호모 소문에 시달려
상하이 동향 출신인 슝다전 총애 - “지나칠 정도로 각별해 연인 사이 의심”
베이징대로 옮긴 예치쑨 웃음 없어져
2 저우페이위안과 왕디칭. 연도미상
한동안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이 호모(동성애자)였다는 말이 떠돌았다. “슝다전(熊大縝·웅대진)이라는 학생에게 지나칠 정도로 각별했다. 연인 사이가 아닌가 의아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평생 결혼을 안 한 것도, 말년에 구걸로 연명한 것도, 쓩다쩐 때문이다.”
구체적인 소문도 있었다. “슝다전과 은밀한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집에 살며 가족처럼 지낸 건 사실이다. 슝다전은 우수한 물리학도였다. 훌륭한 과학자 자질을 갖췄다고 다들 인정했다. 예치쑨은 슝다전이 항일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뜻을 꺾지 않자 도움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을 만했다.”
호모라는 말은 이해가 안 간다는 사람도 많았다. “예치쑨은 같은 학과 교수 저우페이위안(周培源·주배원)의 부인 왕디청(王??·왕체징)을 좋아했다. 왕디청은 단정하고 총명했다. 뒷모습이 일품이었다. 예치쑨이 왕디칭이라면 몰라도 다른 여자완 결혼하기 싫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과학구국(科學救國), 과학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결혼까지 포기했다는 말도 한동안 있었다. 애들 교과서라면 모를까, 오래가지 못했다.
1 예치쑨(왼쪽 둘째)은 여행을 좋아했다. 1935년 여름, 슝다전(가운데)과 학생들 데리고 모간산(莫干山)에 놀러간 예치쑨
1949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 입성했다. 군사관리위원회가 칭화대학을 접수했다. 교무위원회 주석 예치쑨은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현실 대처 능력이 신통치 못했다. “마르크스건 케인스건 그 소리가 그 소리”라는 말을 자주했다.
국민당 따라 대만(臺灣)으로 가지 않은 이유도 단순했다. “철학책 한 권만 읽으면, 마르크스나 레닌주의 받아들이는 건 일도 아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미운털이 박히던 시절이었다. 예치쑨은 대학 운영에서 점점 소외됐다.
정권수립 3년 후, 신중국은 대학 조정을 단행했다. 예치쑨도 베이징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수치교(敎授治校)의 신봉자였던 예치쑨은 되는 일이 없었다. 불평이 늘어나고 웃음이 없어졌다. 문혁이 발발하자 한동안 잊혀졌던 ‘슝다전사건(熊大縝案)’이 예치쑨을 덮쳤다.
얘기는 1930년대로 되돌아간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슝다전은 1932년, 19살 때 칭화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예치쑨은 동향 출신인 슝다전을 총애했다. 밥도 같이 먹고, 산책도 함께할 때가 많았다. 졸업 논문도 직접 지도했다.
졸업 후에도 조교로 옆에 두며 애지중지했다. 가끔 다툴 때도 있었다고 한다. “국수 사먹으러 가던 중 벤치에서 둘이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상하이 방언으로 따발총처럼 서로 쏴대다 보니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각해 보였다. 배 채우고 오다 보니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해 보였다. 단순한 교수와 학생 사이 같지 않았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전 중국에 전쟁의 열기가 넘쳤다. 중공은 도시의 지하당원들에게 지시했다. “농촌으로 가라. 무장조직을 결성하고 유격전을 전개해라.”
1937년 말, 중공은 허베이(河北)성 중부에 첫 번째 항일근거지를 마련했다. 허베이를 의미하는 지(冀)와 가운데 중(中)를 합쳐서 “지중근거지”라 불렀다.
근거지는 조건이 열악했다. 의약품·통신장비·무기·탄약 등이 제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지중 군구(軍區)는 지하당원들을 채근했다. “도시의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근거지로 보내라.” 베이핑의 중공 지하당은 슝다전을 탐냈다.
온갖 꾀를 동원해 수락을 받아냈다. 슝다전의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던 예치쑨은 발끈했다. “일본인 몇 명 죽일 사람은 너 아니라도 많다. 독일에 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실험실에 박혀 있어라.” 슝다전은 고집이 셌다.
군구는 슝다전에게 인쇄창을 맡겼다. 워낙 대가들만 봐온지라 성이 차지 않았다. 군구 공급부장을 자청하고, 기술연구소 설립도 제안했다. 고성능 폭약과 지뢰를 순식간에 선보였다.
일본군의 대동맥이었던 베이핑에서 창저우(滄州)까지 철도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베이핑과 스자장(石家庄) 간의 철로도 온전치 못했다. 단파 통신장비도 슝다전이 없었더라면 구비가 불가능했다.
슝다전은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예치쑨에게 의지했다. 슝다전이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예치쑨은 흡족해했다. 칭화대학이 후난(湖南)성 창사로 이전한 후에도 마음은 지중근거지에 있었다. 홍콩에 달려가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함께 근거지에 보낼 자금을 모금했다.
슝다전의 공은 군구지휘관 네룽전(?榮臻·섭영진)도 인정했다. 일본군이 침투시킨 첩자를 색출하는 정보조직은 달랐다. 슝다전을 의심했다. 비밀리에 체포한 슝다전을 호흡이 멎을 때까지 벽돌로 내리쳤다.
베이핑과 톈진에서 온 지식인 100여 명의 최후도 비슷했다. 오죽 잔인했으면 마오쩌둥도 “무식하고 무지막지한 놈들”이라며 진노했다. 혁명에 지식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글을 발표할 정도였다.
중공은 뒷수습에 고심했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버렸다. “슝다전은 우리 근거지에 잠복해있던 국민당 특무요원이었다.” 예치쑨은 슝다전의 억울한 죽음이 수십 년 후, 자신의 운명을 바꾸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6. 문혁 때 국민당 스파이 혐의 받은 예치쑨
주자화가 중앙연구원장 시절 - 연구원 총간사 맡은 적 있어 - 그의 지시 받았다는 누명 써
1 국민당 조직부장 시절의 주자화
중공정권 수립 후,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은 억울하게 죽은 제자 슝다전(熊大縝·웅대진)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효과가 있을 즈음 문혁이 시작됐다. 예치쑨도 다른 교수들처럼 ‘반동학술 권위’로 몰렸다. 홍위병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 터졌다. 말 같지 않은 심문에 시달렸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1968년 4월, 동북왕(東北王)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측근이었던 개국상장(上將) 뤼정차오(呂正操·여정조)를 조사하던 중공 중앙군사위원회가 예치쑨을 체포했다. 국민당 특무 두목 주자화(朱家驊·주가화)의 지시를 받던 국민당 스파이, 혐의가 어마어마했다.
지질학자 출신인 주자화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던 정보기관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과 쌍벽을 이루던 중앙위원회 조사통계국(中統) 국장이었지만 권한은 없었다. 두 기관 모두 실권은 부국장이 쥐고 있었다.
예치쑨이 국민당 스파이라는 말에 제자들은 통탄했다. “중국인들의 건망증은 당할 자가 없다. 예치쑨은 어느 당파건 참여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1948년 말, 해방군이 칭화원(淸華園·칭화대 사람들은 칭화원이라는 명칭을 애호했다)에 임박했을 때도 의연했다. 국민당이 일류 학자들을 베이핑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보낸 비행기도 타지 않았다. 선생은 공산당도 교육과 과학을 소홀히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 국민당 스파이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얘기는 국민당 통치시절로 되돌아간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교수와 법조인들을 중용했다. 무책임하고, 패거리 짓기 좋아하고, 남에게 떠넘기기 잘하는 엉터리들 일수록 발탁되기 위해 기를 썼다.
최고학술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을 설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82명으로 구성된 원사(院士)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계의 권위자들이 꼴불견을 연출했다. 예치쑨은 흠 잡을 데 없는 과학자이며 순수한 교육자였다. 중국물리학회 회장이다 보니 원사 자리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다.
예치쑨은 주자화가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원장시절 연구원 총간사(總幹事)를 지낸 적이 있었다. 중앙연구원 총간사는 명(命) 짧기로 유명했다. 한 명은 암살당하고, 다른 한 명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연구원 산하 수십 개 연구소를 좌지우지하고, 엄청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2 미국 유학을 마치고 둥난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한 예치쑨(두번째 줄 왼쪽 여덟번 째). 1924년 3월, 난징
예치쑨에게 칭화대학은 인생의 모두였다. 칭화대학이라는 무대에서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우수한 교수들을 영입했다. 주자화와도 미국 유학을 같이 떠난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위원회에서 조사받을 때 작성한 자술서를 소개한다.
“1918년 8월, 주자화와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주자화는 베이징대학을 다녔다.칭화대학이 파견한 유학생이 아니다 보니 초면이었다. 목적지도 주자화는 뉴욕, 나는 시카고였다. 주자화는 미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독일로 갔다. 같은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보니 그저 알기만 할 뿐, 편지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1924년 3월, 나는 6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난징(南京) 둥난(東南)대학 물리학과에 있을 때 주자화가 베이징대학 지질학과 교수로 부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1934년, 중앙연구원 평의회에 참석했다가 지질조(地質組)에 속해있던 주자화를 만났다. 본격적인 왕래는 항일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봄부터 시작됐다.”
3 2016년 5월, 중국은 예치쑨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사진 김명호 제공]
예치쑨이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수락한 이유는 신임원장 주자화의 성의 때문이었다. 1941년 봄, 장제스는 주자화를 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했다. 국민당 조직부장을 겸하던 주자화는 연구원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원장 대신 업무를 처리할 인물을 물색했다. 예치쑨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유일한 원사였다. 연구업적도 시비대상이 못될 정도로 탁월했다.
주자화는 오랜 기간 눈 여겨 본 예치쑨을 자유주의자로 단정했다.
“자유, 평등, 정의를 모든 가치의 위에 두는 사람. 재물보다 인간을 존중하지만, 재물이 인류의 교양과 복지촉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변덕이 심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불신하는 사람. 권위가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진리, 이성, 사실을 존중하는 사람. 변화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 타협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 과학구국(科學救國)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인재 양성을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사람”이라며 총간사 영입에 나섰다.
주자화는 예치쑨에게 총간사 직을 수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절하는 답장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유도 분명했다. “나는 칭화대학 소속이다. 칭화대학 총장과 의논해라. 총장이 수락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7. 예치쑨, 칭화대엔 휴가계 내고 무기 개발 몰두
곡절 끝 중앙연구원 총간사 부임 - “모든 역량 항일전쟁에 쏟아라” - 과학자들에게 탄약 연구 독려
1 중앙연구원 성립 20주년 기념식을 마친 중앙연구원 원사(院士)들. 셋째줄 오른쪽 둘째가 예치쑨. 1947년 4월 난징. 이들 모두가 중국과 대만의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이다. 앞줄 정 중앙이 주자화.
인간에게 질병과 기아, 전쟁을 능가할 공포는 없다. 의료시설의 발달로 역술가와 구분하기 힘들었던, 용한 명의(名醫)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굶주림도 일부 지역 외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전쟁의 공포는 여전하다. 준비할 시기를 놓친 나라들은 주변국 눈치 보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전쟁은 예고편이 있기 마련이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했을 때 중국 국민정부는 잠시 내준 셈쳤다. 상하이와 허베이(河北) 지역을 집적거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부의 적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내부 안정이 필수”라며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정책을 고수했다.
내부 안정은 장정(長征)으로 진이 빠진 공산당 소탕이었다. 누가 봐도 시비 걸 수 없는 정책이지만 국민당은 선전에 약했다. “왜적에게 국토를 헌납하고, 동족에게 총 뿌리 겨누는 매국정권”이라는 공산당의 매도에 총으로 응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공합작’이라는 독배를 마셔버렸다. 어거지로 성사시킨 합작이다 보니 세상은 더 복잡해졌다.
중국의 1세대 과학자 중에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 많았다.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은 과학구국 외에는 관심이 없던 과학자들을 대표했다. 중앙연구원 원장 주자화(朱家驊·주가화)가 제의한 연구원 총간사 직을 선뜻 수락하지 못한 이유도 단순했다.
일본군이 중국을 저울질할 때 칭화대학은 농업·항공·무선전신 전문연구소를 설립했다. 일본과 전면전이 임박하자 대학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전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학내에 국정조사와 전쟁 지원을 위한 금속관련 연구소를 따로 차렸다.
없는 돈에 5개 연구소 꾸려나가기가 힘들었다. 통합시켜 특종연구사업위원회(特種硏究事業委員會)를 발족시켰다. 예치쑨은 특종연구소 주임이었다. 주자화의 청을 일단 거절하면서 교장 메이이치(梅貽琦·매이기)와 의논하라는 내용을 첨부했다.
메이이치도 교수치교(敎授治校)의 신봉자였다. 주자화에게 간략한 편지를 보냈다. “대학 사정상, 예치쑨이 충칭(重慶)에 머무르며 중앙연구원 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칭화대학을 떠나지 않고 연구원 총간사직을 겸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다.”
2 주자화(왼쪽)는 한국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연도·장소 미상. [사진 김명호 제공
주자화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연구원 규정에 전임직은 겸임이 불가능했다. 행정원장을 역임한 중국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翁文灝·옹문호), 훗날 대만대학(臺灣大學) 총장을 지내며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푸쓰녠(傅斯年·부사년)등과 머리를 맞댔다.
규정을 바꾸지 않는 한 묘책이 없었다. 웡원하오가 메이이치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앙연구원 총간사는 전국의 연구기관을 총괄하는 중책이다. 전 총간사도 베이징대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예치쑨을 교수직에서 해임시켜라. 명예교수 위촉은 무방하다.”
메이이치는 패권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며 발끈했다.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출장 차 충칭에 갔을때 주자화와 웡원하오를 방문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만날 때마다 예치쑨 문제로 시간을 허비했다.
일기도 남겼다. “저녁 무렵 웡원하오를 만났다. 예치쑨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난감했다.” “당 중앙조직부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부장과 마주쳤다. 예치쑨 외에는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며 하소연했다. 중앙당 조직부장의 정중한 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푸쓰녠은 입원중 이었다. 편도선을 반이상 절개하는 바람에 말을 못했다. 종이에 예치쑨의 이름을 써서 메이이치에게 들이밀었다. 메이이치는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메이이치는 세 사람의 간절한 요구를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동의나 다름없는 메모를 보냈다. “예치쑨이 장기 휴가를 요청하면 허락하겠다. 휴가기간에 무슨 일을 하건 관여하지 않겠다.” 주자화와 웡원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푸쓰녠은 양손으로 목을 감싼 채 한동안 끼득거렸다.
메이이치는 예치쑨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선생이 중앙연구원으로 가는 것은 칭화대학의 큰 손실이다.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다. 중요한 학술기관의 발전을 보며 슬픔을 달래겠다. 정식으로 휴가원을 제출해주기 바란다.”
중앙연구원은 충칭시 한복판에 있었다. 부설 연구소들은 교외에 흩어져있었다. 총간사에 부임한 예치쑨은 원장 주자화에게 유일한 요구를 했다. “원장은 국민당 조직부장을 겸하고 있다. 나는 경비가 삼엄한 조직부에 보고하러 가기가 싫다. 정기적으로 연구원에 와서 보고 받고 지시해 주기 바란다.” 주자화는 군 말없이 수락했다.
예치쑨은 젊은 연구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1년이 지나자 두각을 나타내는 연구원들이 속출했다. 과학자들에게는 직접 요구했다. “과학자는 단순해야 한다. 머리가 복잡한 사람은 과학자 자격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다. 모든 역량을 항일전쟁에 쏟아 부어라. 적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 개발 외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예치쑨은 충칭 교외에 있는 미사일 연구소를 자주 찾아갔다. 한번 가면 며칠씩 머물곤 했다. 연구인원 대부분이 제자들이었다. <계속>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8. “예치쑨은 도도히 흐르는 大河” 사후 9년 만에 명예 회복
지식인들 사상개조운동에 냉소적 - 대학 책임자서 평교수로 전락
교육과 독서, 인재양성에만 몰두 - 국민당 특무 문제로 온갖 고초
원폭 유공자 대부분이 예치쑨 제자
1 칭화대학은 예치쑨(오른쪽 셋째)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이 없던 예치쑨의 집은 당대 명교수들의 휴게실이었다. 1928년 봄 칭화대학 예치쑨 집 문전.
신중국 수립을 선포한 중공은 대학조정에 착수했다. 구미에 맞는 사람은 남겨 두고, 맘에 안 드는 교수들은 “책 편집이나 하라”며 출판사로 보냈다. 교육부는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의 공헌과 영향력에 인색하지 않았다. 칭화대학 교무위원회 주석에 임명했다.
예치쑨은 당이 요구하는 조정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 교수치교(敎授治校)를 견지했다. 지식인들 대상으로 사상개조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개조에 냉소적이었다. 상급기관이 대륙을 떠난 전 교장 메이이치(梅貽琦·매이기)를 적으로 규정했다.
메이이치 비판운동으로 학계가 떠들썩했다. 예치쑨은 메이이치를 두둔했다. “적과 동지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라며 바보 취급받았다. 동료 과학자가 비판대에 올랐을 때도 거꾸로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과학계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발표했다. 결과는 격렬한 질책과 혹독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교육부는 예치쑨을 베이징대학 물리학과로 전임시켰다. 예치쑨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의 책임자에서 평교수로 전락했다. 나는 이미 낙오자다. 사상이 다른 사람들의 지시에 맞장구쳐야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교육과 연구에 주력하려면 맹종하는 수밖에 없다.”
예치쑨은 교육과 독서, 인재 양성에만 몰두했다. 언쟁을 피하고 학술회의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인대 대표에 선출됐지만, 정치 문제에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문혁 초기만 해도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다리 부러진 것 외에는 남들 보다 덜 얻어맞고 풀려났다.
베이징대학은 학교로 돌아온 예치쑨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국민당 특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며 심문을 계속했다. 제자가 구술을 남겼다. “반동학자의 소굴이었던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역임했고, 연구원 원장 주자화(朱家驊·주가화)는 국민당 특무조직 중통(中統·중앙조사통계국)의 책임자였다.
예치쑨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대학 측은 가택수색과 월급지불을 중지했다. 매달 소액의 생활비만 지급하고 거처도 학생 기숙사로 제한했다. 당시 베이징대학 인근에서 예치쑨을 봤다는 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첸창차오(錢昌照·전창조)도 기록을 남겼다.
“출옥한 예치쑨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다. 병들고 허약한 고독한 노인이었다. 거리에 나갔다가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굽은 허리에 초라한 복장, 해진 신발 신은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힘든 걸음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예치쑨 선생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능금을 우물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걸인과 다를 바 없었다.
젊은 학생이 지나가자 돈이 있으면 몇 푼만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물리학계의 대선배이며, 중국 물리학의 발전에 누구도 범접 못할 공을 세운 선생의 비극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모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학자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세월이 지나서야 안 사실이 있다. 예치쑨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
2 학술회의에 참석해 첸쉐썬(錢學森)과 환담하는 우요쉰(吳有訓·왼쪽). 연도 미상.
4년간 예치쑨을 조사한 대학 측은 결론을 내렸다. “예치쑨이 특무였다는 소문은 낭설이다. 중통은 칭화대학에 침투한 적이 없다.” 예치쑨은 교수자격을 회복했다. 숙소도 배정 받았다. 문혁이 끝나자 칭화대학 시절 동료들이 찾아왔다. 허리가 굽어 침상에 눕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잠자는 예치쑨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예치쑨의 건강은 하루가 달랐다. 전립선 비대증이 심각했다. 걷지도 못하고 소변도 가누지 못했다. 방안에 악취가 진동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권해도 막무가내였다. 치료도 거절했다. “내버려 둬라.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몇 년 더 살아 봤자 의미가 없다. 내게 관심 갖지 말고 문병도 오지 마라.”
1977년 1월 10일, 예치쑨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친구들이 수레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측은 고약했다. 신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며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반나절을 기다리다 아는 의사 통해 뒷문으로, 그것도 몰래 들어가서 겨우 입원했다.
예치쑨은 입원 3일 만에 눈을 감았다. 당 선전부는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도를 금지시켰다. 1주일 후, 초라한 추도회가 열렸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추도사를 읽었다. 중국 과학과 과학인재 양성에 거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언급이 없었다. 보다 못한 물리학자 우요쉰(吳有訓·오유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 억울한 일이 있느냐며 통곡을 해 댔다.
사망 9년 후, 예치쑨은 명예를 회복했다. 찬사가 쏟아졌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 “예치쑨은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였다. 1925년 예치쑨이 과학인재 양성을 시작한 지 39년 만에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하고, 45년 만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중국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1999년 9월, 중국은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 공로자 2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거의가 예치쑨의 제자들이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교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 중앙Sunday
[출처] 중국의 핵무기 개발 [중국근현대의 인물]|작성자 ohyh45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신 강어님 고맙습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성에 흐믓한 마음을 갖게해 준 글이군요.
편향된 사고방식이 갖는 문제점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위대한 인물이 뭇 사람들의 편향된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 인물의 위해성을 인정하는 비극은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생각하면
가슴 아픕니다.
인간의 한계일까요?
이렇키나 대단한 헥탄 수탄 미샬 과 더하기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들을 우리는 하나에반쪽이가 이룩했단 말씀? 나머지 반쪽은 머하고 계시낭
"“원자탄을 반대하려면 원자탄을 보유해야 한다." 모택동 어록중에서 .
좋은 글입니다. 중국이 핵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훼방을 받고 어떤 방식으로 극복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했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망상에 빠져 궤변과 사기를 일삼는 이남의 사기꾼 정치인들, 과학자들, 밥통 유권자들이 조금이라도 좀 각성을 하도록 말입니다.
시의적절한 펌글 좋네요.^^.
"8. “예치쑨은 도도히 흐르는 大河” 사후 9년 만에 명예 회복
지식인들 사상개조운동에 냉소적 - 대학 책임자서 평교수로 전락
교육과 독서, 인재양성에만 몰두 - 국민당 특무 문제로 온갖 고초
원폭 유공자 대부분이 예치쑨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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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치쑨의 활동공간을 보장해준 중국정부..
어찌보면..
이순신장군의 신념에 대한..
조선 조종의 대응과도 상당히 비슷한..
일맥상통한 중국의 핵 개발사 인듯 싶네요.
위 펌글로써..
중국에 대한 오해가..
약간이나마 풀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중국이 꼭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중요하겠죠...
정확한 사실적인 글인지는 저도 모릅니다.(한편으로 보면 될 듯 합니다)
독일에서 파생된 원자력 기술로... 러시아와 미국은 쉽게 얻은 듯 하구요.(승전국)
영국은 독일 비슷한 시기에 개발을 하고 있었다 보여지며, 영국과 프랑스도
차후에...미국의 도움(자국의 과학자)이 있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핵개발을 반대했다고 하는데...겉으로만 그런 게 아닌지...
아메리카 식민지였던 미국은 그 뿌리가 영국과 프랑스...제 생각.
흥미롭게 읽었어요.
수고 스럽더라도 하나 씩 올려 주신다면 더 보기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