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만 차리면
경봉대선사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고 이르셨다.]
살다가 아주 큰 어려움이 닥치거나 실패를 하게 되더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나는 이제 끝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바꾸어 생생한 산 정신으로 임하면 ‘절후(絶後)에 갱생(更生)이라’,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사는 수가 있다.
근심걱정을 하고 ‘죽겠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다시 정성을 기울이면 반드시 극락과 같은 삶을 만들어 낼 수가 있으니, 마음을 잘 모아서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연극 한바탕 멋지게 하기 바란다.
홍수 때 강아지를 업고 온 사람
1950년대 중반에 나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봉사 주지로 있었다. 그때 홍수로 밀양 남천의 강물이 불어나서 다리가 떠내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강 건너 마을인 삼문동에 사는 사람들은 범람 직전까지 갔다.
“다리가 떠내려가기 전에 읍내로 들어가자.”
그래서 중요한 것들과 아이를 업고 나왔는데, 한사람은 워낙 급해 가지고 아이를 업고 온다는 것이 강아지를 업고 건너왔다. 강을 건너와서 보니 강아지여서 혼비백산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할지라도 정신만 차리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죽은 정신으로 급하게 서두르니 무엇이 제대로 되겠는가?
평소에 정신을 못 차리고 죽은 정신으로 살다 보니, 강아지인지 어린애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업고 나온 허물을 범하게 된 것이다.
죽기 전에 그때를 생각하여라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영산대학교의 이사장을 지낸 박용숙(1920-2020) 보살은 이북 출신으로, 6·25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뒤 온갖 고생을 다해서 사업을 크게 이루었는데, 부도를 맞아 망하게 되자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몸과 마음이 모두 허해진 그녀는 자살을 하겠다고 부산 태종대의 자살바위로 가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경봉스님은 도인이시니, 도인스님께 한 말씀 들은 다음 죽어야겠다.”
그래서 통도사 극락암으로 나를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물었다.
“남쪽으로 피난을 올 때의 상황은 어떠했느냐?”
“옆 사람이 포탄을 맞아 죽는 것도 보았고,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시체를 수도 없이 넘으며 왔습니다.”
“그때를 생각하여라.”
대화를 나눈 박용숙 보살은 죽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후 영산대학교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정신만 차리면 돼
부산에서 큰 사업을 했던 처사가 부도가 나서 침식을 전폐하고 누워있었는데, 아내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그때 처사에게 말했다.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는 경봉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는데, 오늘이 그날입니다. 바람도 쐴 겸 극락암으로 법문이나 들으러 갑시다.”
법회가 끝나자 아내는 또 권하였다.
“이왕 온 김에 큰스님을 친견하고 갑시다.”
이렇게 하여 나를 만나게 되었다.
“어디서 산 송장 하나가 왔노? 오장육부에 열이 꽉 차 있구나!”
처사는 사연을 이야기하였고, 나는 호되게 일러주었다.
“그동안 돈 좀 모아서 잘 살다가 재산 좀 잃었다고 화병이 들어? 아직 어진 마누라가 건강하게 있고 집도 있는데, 부도가 나서 재산 좀 날렸다고 산 송장이 되어서야 어디에 쓰겠느냐?
6·25사변 터지고 숟가락 젓가락 하나 없이 빈 몸으로 내려왔는데도 자수성가를 해서 그동안 잘 살지 않았느냐? 다시 정신을 차려서 일어나거라.
정신만 차리면 돼!”
나의 말을 들은 처사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면서 열심히 일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만회하였다.
----------------------------------
낙엽을 보라. 낙엽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사람도 밟고 개도 밟고 지나간다. 가치라고는 조금도 없지만, 그 낙엽도 비바람을 타고 벽공을 활기롭게 날 때가 있다.
낙엽도 벽공을 풀풀 날면서 한껏 멋을 내는데, 만물 중에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 실패했다고 해서 근심걱정에 잠겨 있대서야 되겠느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내어야 한다.
서산대사가 사명대사에게 준 가르침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승려들을 소집하여 나라를 구하게 하였고, 나이가 80인데도 직접 전쟁터로 나가서 왜적이 점령한 평양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 그리고 상좌인 사명대사(泗冥大師)에게 명하여 선조 임금을 보필하게 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파천한 선조 임금은 조정의 중신들을 불러놓고 국가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의견을 자주 물었는데, 그때 한음(漢陰) 이덕형과 오성(鰲城) 이항복과 서애(西厓) 류성룡 등의 명재상들 말보다 사명대사의 의견을 더 신임하였다. 그래서 선조대왕이 말하였다.
“고기 먹고 술 먹는 신하들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 산중에서 나물이나 죽순을 먹은 입에서 나온 말이 훨씬 깨끗하고 특수하다,”
서산대사가 젊은 사명을 교육시키고 길러낼 때 준 글이 있다.
一隻沙門眼 외짝 사문(沙門)의 눈이여
光明照八垓 광명이 팔방으로 빛난다.
卓如王秉劍 늠름하기는 칼을 쥔 왕과 같이 하고
虛若明鏡臺 마음을 비우기를 밝은 거울 같이 하여
雲外拏龍去 구름 밖의 용을 낚아채고
空中打鳳來 허공 중의 봉황을 두들겨 잡아라
通方能殺活 어디서든지 살리고 죽임이 자재하면
天地亦塵埃 하늘과 땅 또한 한낱 티끌이니라.
‘늠름하기는 임금이 칼을 잡고 있는 것과 같이 하라.’
이 구절은, 백성의 생명을 맡아 가지고 있는 임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위풍이 늠름한데, 칼까지 잡고 나서면 아무도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다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기를 밝은 거울을 걸어 놓은 것과 같이 하라.’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울 자체는 밝은 것이지만,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무엇을 비추어도 다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자리도 본래 맑고 밝은 것이지만, 근본무명(根本無明)인 탐진치(貪瞋痴) 때문에 말과 행동이 컴컴해져서 밝은 거울에 때가 낀것처럼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다음 구절은, 구름 밖으로 용이 날아가더라도 용기를 내어서 용의 목을 움켜잡을 수 있어야 하고, 허공에서 날갯짓 한 번에 몇만 리를 날아가는 봉새에게 한 방망이 먹일 수 있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라. 내 정신이 살아 있어야 남의 정신도 살리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서산대사가 사명대사에게 준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제일 보배
사명대사 일화 하나를 살펴보자.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가서 스님들을 묶어 놓고 때리면서 행패를 부렸다. 그때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승복을 입은 사명대사한테 물었다.
“너희 나라의 제일가는 보배는 무엇이냐?”
“우리나라 제일 보배는 일본에 있다.”
“너의 나라 보내가 일본에 있을 턱이 있느냐?”
“너의 머리가 우리나라 제일 보배이다.”
“내 머리가 어째서 너희 나라 제일 보배냐?”
“너의 머리만 베어 오면 천금(千金)의 돈과 만호후(萬戶侯)의 벼슬은 준다고 했으니, 너의 머리가 제일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창과 검을 쥐고 삼엄(森嚴)하게 에워싸고 있고, 쏘기만 하면 사람이 죽는 조총(鳥銃)을 지닌 왜적들. 그 왜적들 앞에서 사명대사는 총사령관인 가등청정에게 거침없이 말을 하였다. 이에 격분을 한 부하 장수들이 사명대사를 죽이려고 하자, 당당한 대사에게 깊은 존경심이 생겨난 가등청정은 말렸다.
“절대 그러지 말라. 이런 말 하는 사람을 너희가 여기서 죽이면 큰일이 난다.”
그때부터 사명대사는 혀가 보배인 승려라 하여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고 불리었다. 어릴 때부터 정신을 단련하면서 살아온 사명대사였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대답을 한 것이다.
---------------------------------
무엇을 하든지 ‘나’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된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미루거나 뒤로 미룰것이 아니다. ‘내가 이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국가로 빛나게 하리라’는 국가관, 조국관을 가슴에 품고 일을 해야 하며, 그리고 이웃에 헌신하고 보살의 행원(行願)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 있는 정신과 살려 가는 정신으로 살아가면 자연히 일이 성취되고 많은 동지들이 생겨난다.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이는 크기가 참깨알만 하다. 옷에 붙어 있는 것을 잡아내려고 하면 죽기는 싫고 급해서 떼굴떼굴 구른다. 이런 놈을 손톱으로 탁 터뜨리면 피를 뿜으면서 죽는다.
이가 이토록 가치 없는 미물이지만, 이놈이 장사의 엉덩이에 붙어 가지고 물고 차고 하면, 장사도 무엇이 이렇게 하는가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우리도 사명대사처럼 정신을 독특하게 가지면 어떠한 난관이라도 돌파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 정신을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부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자꾸 닦고 단련해서 탐진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가 뚝 떨어진, 마음속의 때가 없는 그 자리로 돌아가서 대해탈을 이루고, 중생을 위해 팔만대장경의 법문을 다 토해내신 것이다.
‘할(喝)’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법공양> 통권 354호 불기 2568년 7월
-불교신행연구원-
첫댓글 고맙습니다. 매월 첫 일요일에 극락암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연극 한바탕 잘 하고가거라'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찌왔노?'
항상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_()()()_
_()()()_
_()()()_
_()()()_
_()()()_
_()()()_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