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사적 제191호)은 경기 고양 덕양 원당동 산65-1,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생몰: 1345~1394, 재위기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의 무덤은 이곳뿐만 아니라 그가 살해된 삼척 지역에도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시도기념물 제71호)은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번지,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재위 1389∼1392)의 묘로 전하는 곳이다.
공양왕(恭讓王)은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폐위되었고, 태조 3년(1394)에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삼척으로 간 뒤 교살되었다.
공양왕릉(恭讓王陵)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양시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하고, 삼척시의 능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나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현종 3년(1662) 삼척부사 허목의『척주지(陟州誌)』와 철종 6년(1855) 김구혁의『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이 있다. 그리고 3년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는데 임금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살해재, 왕자 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등이 그것이다. 삼척의 공양왕릉은 봉분이 모두 4기인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 2기는 두 왕자, 나머지 하나는 시녀 또는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
✺ 고려 공양왕은 한 명인데 왕릉은 두 곳에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행정동 이름이 식사동이 있다. 칠백여 년 전 ‘식사’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한 끼가 간절했던 곳이다. 왕족도 끼니를 걱정했던 장소인 까닭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등극(1389년)하고 또 퇴위(1392년)당했다. 그 와중에 잠시 피신까지 하던 시절 그에게 하루 세끼 밥을 제공한 곳은 인근 사찰이다. 그래서 ‘밥절’ 즉 식사(食寺)가 되었다. 절은 이야기만 남긴 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연의 주인공은 인근에 무덤을 남겼다. 새 왕조 조선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서 고려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태종 이방원은 1416년 공양왕(恭讓王·왕위를 공손하게 양보한 왕)이란 이름으로 능을 다시 정비했다.
종묘(宗廟, JONGMYO)의 향대청 일원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이 있다. 고려(高麗) 제31대 공민왕(恭愍王)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펼쳤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 이였다. 사진처럼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영정이 한 그림 속에 있는 것이 특이하고 왼쪽에 보이는 그림 세 폭은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하는 말 그림인 준마도(駿馬圖)가 사당 안에 있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배지를 강원도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으로 옮겨야 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에 마침내 삼척 근덕면 궁촌(宮村)에서 1394년 생애를 인위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이를 애달피 여긴 주민들의 노력으로 숨겨둔 묫자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배롱나무 꽃이 일렬로 줄지어 흐드러지게 핀 끝자리에 안장된 무덤은 총 4기였다. 두 왕자를 포함하여 타고 왔던 말(혹은 시녀 무덤)까지 함께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지역사회 안내문에는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공양왕릉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문헌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진짜 왕릉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도권 왕릉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를 지금까지도 거두지 않고 있다.
만약 이장했다면 매장 후 12년 뒤 일이다. 설사 이장했다고 할지라도 원래 무덤 자리는 지역민에게 의미 있는 가치가 그대로 부여된다. 왜냐하면 왕릉의 존재는 처음과 다름없이 그대로 같은 정서로 남기 때문이다.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봉토를 새로 조성했고(허목 ‘척주지’), 일제강점기인 1942년 김기덕(金基悳) 근덕면장은 고려왕릉봉찬회를 구성하여 매년 제향을 올렸으며, 1977년 최문각 근덕면장은 군수의 지시로 묘역을 재단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한 인물에 두 무덤은 전쟁 와중에 더러 있는 일이다. 소설 삼국지의 관운장도 묘가 두 곳이다. 하남성 낙양의 관림(關林·머리 무덤)과 호북성 담양의 관릉(關陵·몸 무덤)이 그것이다.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申崇謙·?~927) 장군의 무덤도 복수다. 춘천 서면의 공식 몸 무덤과 비공식적인 전남 곡성의 머리 무덤 두 곳이 전해온다. 말이 머리를 물고서 고향 땅으로 가져온 것을 태안사 스님네가 거두어 모셨다고 한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공양왕과 같은 시대를 산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43) 선사의 부도(무덤 격)는 정수사(강화) 현등사(가평) 봉암사(문경) 등 3곳에 전해온다. 무학 대사의 제자이며 절집 안에서 교과서급 사랑을 받고 있는 ’금강경오가해’를 편집한 공덕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두 무덤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 무덤도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관(官)은 관대로 공식 역할이 있고 백성은 백성대로 민심이라는 것이 있다. 또 절집은 절집대로 그 몫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공식 기록과 구전을 아우른다면 보이지 않는 사연까지 살필 기회가 된다.
✺ 고려 공민왕신당이 조선왕조 최고 사당 종묘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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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조선일보 2022년 08년 12일(금) 오피니언 〉 전문가칼럼 [東語西話(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강화 가릉(江華 嘉陵, 사적 제370호)은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고려 원종(高麗 元宗, 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王妃 順敬太后)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강화 곤릉(江華 坤陵, 사적 제371호)은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번지, 고려 강종(高麗 康宗, 재위 1211∼1213)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劉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강화 석릉(江華 碩陵, 사적 제369호)은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번지, 고려 제21대 희종(高麗 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왕영(王韺), 초명은 왕덕(王悳). 자는 불피(不陂). 신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화태후(靖和太后) 김씨(金氏)이며, 비(妃)는 영인후 왕진(寧仁侯 王稹)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石室墳)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 문화유산채널 영상관 - 궁예와 공양왕 고려의 시작과 끝:
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803002-002-V00007@N2R:1
▒ Hch 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