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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7일 [연중 제18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능력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기적의 은총을 주기를 거부하는 모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희망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가나안 부임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부모는 자신을 낳았으면 분명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믿음이 있고, 또 자신을 낳았으면 키울 능력이 있는 분이란 믿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낳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있다면 키울 능력도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자는 사랑이셔야 하고 능력자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그래서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은 그 능력과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다 사랑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폭력이나 속임수 등을 써서 성공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공한 이들 중에 많은 수는 사랑이 커져서 능력도 커진 경우가 많습니다.
2014년 이전 현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대표 박지형은 중소기업의 기업가로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회사가 20~30억의 매출로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024년 위장암과 판막 전이로 4기 진단받았고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6개월 뒤에 어렵게 가진 딸이 태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딸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돈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보험회사였습니다.
자신은 6개월 뒤에 죽을 것이 확실하니 6개월 치 이자를 제하고 사망보험금을 미리 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 청에 보험회사 직원들이 몰려와서 조사해보고는 정말 보험금을 주었습니다.
보험금이 생기자 아내와 딸이 먹고살 수 있는 더 큰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줌줄을 차고 그는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3년 뒤 복막을 어찌할 수 없지만, 위는 절제할 수 있어서 수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 말기 환자로 백 차례가 넘는 항암을 맞았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10년 만에 부동산만 600억이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이전에 하던 스크린골프회사까지 합치면 약 800억에 가까운 자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 하나씩 가지게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능력도 향상했습니다.
박지형 대표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능력의 향상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하는 마음은 또한 능력의 향상도 가져옵니다.
이것이 혼자 살거나 많은 자녀를 키우며 살거나
결국 나이가 들면 재산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동기가 없으면 일도 하기 싫어집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 합시다.
그러면 더 큰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린 브로커비치도 생각해 봅시다.
영화로도 유명한 이 실화는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던 PG&E에 대한 분노,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모성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6년에 3억 3,300만 달러의 합의금이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직접 소송 합의금이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는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존감을 가지게 하고 그 자존감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제 딸만 살려주신다면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강론>
(2024. 8. 7. 수)(마태 15,21-28)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이방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 진주’는 ‘복음, 성사’ 등을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상 “줄 수 없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개들’은 주로 ‘들개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강아지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자가 마음의 상처를 덜 받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신 것 같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4-15).”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묵시 21,6ㄷ-8).”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러면 우상 숭배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숭배하는 우상을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우선 먼저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로도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자녀가 되면 됩니다.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4) 예수님께서 처음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청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태도로) 예수님께 청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모독죄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제가 강아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의 겸손한 고백과 회개와 변화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이 왔던 여자가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록 딸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회개했고,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청했던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았던 더 큰 은총도 받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은총이고, 가장 중요한 은총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