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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베이스 위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큰 흥미를 느낀다. 야구는 도처에서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경기이지만 베이스러닝(주루)만은 가장 운과 관계없는 대목이다. 도루를 하거나 후속장타 또는 아웃이 발생했을 때 한 베이스를 더 ??못 가는 것은 순전히 선수 자신의 능력일 따름이다. 주루에는 선수의 마음가짐과 기술, 그리고 스피드만이 성패를 좌우하는데 이런 것들은 슬럼프 없이 항상 일정하다.
베이스러닝은 가장 직감이 요구되는 기술이다. 위대한 주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며 후천적으로 능력을 계발한다 하더라도 야구를 배우기 시작하는 초기에 올바른 지도를 받아야 효과가 있다. 언제는 뛰어야 하고, 언제는 뛰어선 안된다는 것은 말로는 누구?道?쉽게 한다. 그러나 ▲순간적인 상황포착 ▲정지상태에서 첫걸음부터 곧바로 전력질주할 수 있는 순발력 등 두 가지 기술은 애당초 천부적으로 타고나지 않으면 몇년씩 훈련해도 별로 발전이 없다.
도루는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무더기로 쳐내기 시작한 1920년대 이전만 해도 공격수단의 으뜸이었다. 그 시대에 사용되던 야구공은 원자재도 나빴고 분실할 때까지 장기간 사용했기 때문에 요즘 공보다 훨씬 반발력이 적어 타구가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득점도 적었다. 1점의 비중은 상당히 컸으며 홈런은 거의 없었다. 득점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1루에 출루한 주자가 2루를 훔??후속 안타로 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투포수는 도루를 저지하는 기술을 강화하는 데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그렇더라도 공격측에서 본다면 도루는 해볼 만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2루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득점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공을 받고 던질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그 당시는 발이 느린 선수까지도 누구나 도루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베이브 루스는 이런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루스는 장쾌한 홈런을 터뜨림으로써, 그리고 그런 홈런을 수시로 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단주들로 하여금 더욱 반발력이 좋은 공을 공급하게끔 해놓았고, 이에 따라 많은 선수들이 홈런타자 대열에 발돋움할 수 있었다. 홈런이 자주 나오자 도루는 반비례적으로 줄어들었다. 타석에 있는 타자가 2점홈런을 때릴 수도 있으므로 2루로 뛰다 죽는 모험을 걸어볼 가??줄어들었다. 도루의 사용빈도가 줄자 이 기술을 습득할 필요성도 사라졌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양대리그를 통틀어 이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몇몇 도루전문가에 지나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개인통산타율을 기록한 타이 캅 Ty Cobb이 (1905년부터 선수생활을 시작, 0. 367을 남겼다) 최고의 도루전문가이기도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에는 출루와 도루라는 두 가지가 병존하는 무기였다. 마치 후세대의 위대한 타자들이 (예를 들면 메이즈, 맨틀, 윌리엄스, 디마지오, 에런, 뮤지얼 등) 고타율과 홈런포를 함께 갖추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타이 캅은 누구보다 자주 베이스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누구보다 도루할 기회가 많았고 또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도 타이 캅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요즘은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지만 그 유명한 1926년 월드시리즈에서의 일화는 이 자리에서 음미해 볼 가??있다. 도루에 대한 관점이 그 당시와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를 엿볼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해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벌어진 이 도루실패는 야구사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사건 중의 하나다. 뉴욕 양키스는 미처 완공되지 않은 양키 스타디움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월드시리즈를 펼쳤다(양키 스타디움은 1923년에 개장됐다). 카디널스는 창단 이래 처음 내셔널리그 우승을 따내고 월드시리즈에 진출, 3승3패를 기록하고 마지막 7차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가장 위대한 투수의 하나로 군림하다가 이제 야구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39세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Grover Cleveland Alexander가 6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모든 팬들의 관심은 이 7차전에 집중돼 있었다. 전날 완투승을 거둔 알렉산더는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됐듯이) 7차전에서 7회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당당히 불펜에서 걸어나와 토니 라제리 Tony Lazzeri를 삼진으로 잡아내 양키스를 따돌리고 영광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수훈을 세웠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어지간한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카디널스가 3-2로 앞선 가운데 양키스 공격 7회말 2사만루에서 알렉산더는 제스 헤인즈 Jess Haines를 구원, 급한 불을 껐다(영화에서는 뒷날 대통령에 오른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이 알렉산더 역을 맡았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 뒤에 있었던 일이다. 아까 라제리가 헛스윙으로 삼진당한 것은 7회에 있었던 일이고 9회의 상황은 아니다. 알렉산더는 8회를 무사히 넘기고 9회말에는 투아웃을 잡은 후 베이브 루스를 포볼로 내보냈다. 루스는 이 시리즈에서만 4개의 홈런을 터뜨렸기 때문에 정면승부를 펼칠 수 없었다. 스코어는 여전히 3-2. 홈런 한방이면 양키스가 역전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전년도 흠런왕 밥 뮤절 Bob Meusel이었다.
그러나 뮤절은 배트를 휘둘러볼 기회도 없었다. 루스는 알렉산더의 초구때 2루도루를 시도하다 태그아웃 당해 그걸로 월드시리즈는 완전히 끝장이 났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베이브 루스 같은 주자가 도루를 시도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감독이 그런 작전을 펴려고 했다면 적어도 대주자를 기용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그게 정석이었다. 1루주자는 일단 2루를 훔쳐놓는 것. 게임이 끝난 후 루스는 라커룸에서 톰 미니 Tom Meany라는 젊은 기자(나중에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자가 됨)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기선 우리 팀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거든."
거기란 1루를 가리킨다.
홈런을 신무기로 등장시킨 '루스 혁명'이 일어난 후 가장 위축된 부분이 도루기술이지만 베이스러닝의 전반적인 기술도 약간씩 퇴보했다. 즉 히트앤드런 작전의 비중이 줄어든 것이다. 이는 주자들의 탓이라기보다는 타자들이 펜스를 겨냥한 큰 스윙만 하는 나머지 히트앤드런 작전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탓이 더 크다. (주자쪽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히트앤드런 작전을 펼쳤을 때 타자가 헛스윙한다면 주자는 단독스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단타를 때린 뒤 그것을 2루타로 만들려는 과감성도 줄어들었다. 후속홈런이 터지면 1루에서도 너끈히 홈까지 들어올 수 있는데 아웃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2루까지 달리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1루주자가 후속안타로 3루까지 뛰는 노력은 예전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이라도 미심쩍으면 모험을 피하고 2루에서 멈추려는 경향이 생겼다.
다시 말해서 베이스러닝은 '최대한 멀리' 달리는 데에서 '최대한 많은 주자를' 내보내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즉 장타를 만들려다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보다는 후속 홈런에 의한 싹쓸이 득점을 염두에 두고 되도록이면 많은 주자를 안전한 위치에 확보하는 데에 비중을 두었다. 주자가 폭주로 아웃당하면 두 가지가 손해다. 주자 한명이 없어질 뿐 아니라 아웃카운트가 늘어나 타순상으로 뒤에 홈런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모든 변화가 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도 매우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반발력 좋은 볼이 도입된 지 10년이 지나고도 그라운드를 누비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은(앞서 말한 베이브 루스의 예처럼) 종래의 스타일에 젖어 있었다. 1930년대 중반이 돼서야 메이저리그 안의 선수 대부분이 베이스러닝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사람들로 물갈이됐으며, 19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도루라는 게 그저 재키 로빈슨 Jackie Robinson 같은 일부 스타들이나 하는 특출한 묘기로 비쳐지게 됐다.
그러다가 1960년대를 맞으면서 28살된 어느 깡마르고 왜소한 선수가 나타나 퇴색해 버린 도루라는 기예를 부활시켰다. 그의 이름은 모리스 모닝 윌스 Maurice Morning Wills. 프로에 들어와 거의 10년 동안 무명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사람이었다. 1915년에 타이 캅이 기록한 96도루는 시즌최다기록으로서 영구불멸하리라고 예상됐다. 게임의 양상이 너무나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928년~1959년에 캅의 96도루에 그나마 '절반'이라도 넘겨본 선수는 3명(그 중 1명은 2번) 뿐이었다. 그러다가 아메리칸리그 소속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베네수엘라 출신 루이스 아파리치오 Luis Aparicio가 1959년에 56개로 처음 50도루를 넘어섰다.
그러나 아파리치오의 50도루 돌파는 야구계에 강한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의 시즌도루수가 많았다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리 윌스는 1960년에 50개로 처음 도루왕이 됐는데 이는 내셔널리그에서 보면 (윌스가 태어나기 9년 전인) 1923년 이래 가장 많은 숫자였다. 2년 뒤(1962년) 윌스가 그 두 배가 넘는 도루를 기록하자 야구전문가들은 그 전해(1961년)에 로저 매리스 Roger Maris가 베이브 루스의 시즌 60홈런을 돌파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모리 윌스의 성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인간승리였다. 그의 인생개척은 많은 야구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주변 선수들이 게임에 임하는 태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감독들에게도 어떤 유형의 선수는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예시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됐으며, 팬들이나 기자들에게 베이스러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모리 윌스가 야구의 양상을 베이브 루스 이전시대로 되돌려 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야구에서 강조해야 할 사항을 바꿔놓았다. 그의 도루 기술은 동료선수들에게 전파됐으며, 다저스가 그 기술을 활용한 끝에 1963년과 1965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하자 다른 팀에까지 퍼져나갔다.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윌스는 19세도 안된 어린 나이에 다저스 산하의 최하위 마이너그팀인 뉴욕주 호넬팀에 입단했다. 우투우타인 그는 내야수였지만 이따금 투수로 뛰었으며 성적도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1년이라면 흑인선수가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의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게 불과 4년 전이었다). 그해 윌리 메이즈가 뉴욕 자이언츠로 올라간 것을 비롯, 돈 뉴컴 Don Newcombe(브루클린 다저스 투수), 래리 도비 Lary Doby(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외야수)가 끼어들어 인종차별의 벽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암암리에 흑인에 대한 인원제한을 두고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백인선수를 확실히 능가하는 기량을 갖췄다면 별문제지만 엇비슷한 실력이라면 흑인에게 설 땅이 없던 때였다.
모리 윌스에게는?이렇다할 장기가 없었다. 그는 D급팀으로 올라간 첫해에 2할8푼, 이듬해에 3할 타율을 마크했다. 그러나 장타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던 터라 다저스 구단관계자들의 시선을 끌 수는 없었다. 아담 사이즈의 에베츠필드 Ebbetts Field를 홈구장으로 쓰는 다저스는 주전선수 가운데 무려 8명이 홈런타자였다. 윌스는 푸에블로에서 마이애미로, 다시 푸에블로로 갔다가 포트워스로, 다시 푸에블로로 갔다가 마침내 메이저리그 바로 아래 단계인 트리플A의 시애틀로 올라갔다. 그의 타격성적은 늘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파워부족이 걸림돌이었다. 이 무렵 유격수로 정착한 윌스는 수비력이 쓸만했지만 그렇다고 발군이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1958년 야구계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다저스가 브루클린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이동한 것이다. 다저스는 컬리시엄 Coliseum이라는 미식축구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빌려 썼는데 직사각형으로 생긴 탓에 레프트 펜스는 거의 코앞에 있다시피 했고 라이트 펜스는 끝도 없이 멀었다. 거기에 덧붙여 3루수 재키 로빈슨이 은퇴했다. 피 위 리즈 Pee Wee Reese는 주전 유격수로서의 수명이 끝났다. 포수 로이 캄파넬라 Roy Campanellas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됐다. 1루수 길 하지스 Gil Hodges와 칼 푸리요 Carl Furillos는 노쇠했다. 바야흐로 다저스 팀내의 세대교체가 절실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다저스의 최고위 마이너리그팀은 스포케인이었고 윌스는 거기에 소속돼 있었다. 이 팀의 감독은 메이저리그 2개팀에서 감독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보비 브라겐 Bobby Bragan이었다. 다저스는 여전히 윌스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그를 트레이드해 가라는 제의를 뿌리쳤다. 모리 윌스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구단은 당시 5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받은 신인 유망주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윌스의 연봉은 그 무렵 고작 7천 달러 정도였다. 그리고 스포케인이 끼어 있는 퍼시픽코스트리그(트리플A급 리그)를 벗어나면 모리 윌스라는 이름을 알아주는 야구팬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때 브라겐 감독이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윌스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발이었다. 또 배트 컨트롤과 공에다 배트를 갖다맞히는 재주도 뛰어났다. 기복없는 그의 타격성적이 그것을 입증했다.
"그러니까 스위치히터가 돼보면 어떻겠나?" 전체의 4분의 3을 좌타석에서 치면(우완투수가 전체의 4분의 3이므로) 그의 빠른 발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1루가 가까우므로 내야땅볼을 안타로 만들 수 있다. 안타를 만들기 위한 세이프티 번트를 훨씬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1루에 좀더 자주 살아나간다면 도루할 기회가 더 늘어나지 않느냐...
윌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서 타격편에서 얘기했듯이 프로물을 8년씩이나 먹은 사람이 새삼 그런 변신을 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재능만으로는 전혀 설 곳이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 윌스는 여느 선수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굳은 결심을 했다. 윌스는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남달리 강했다. 신체적 조건은 프로선수로서 최저선에 머물러 있었지만 정신적 결의, 완벽주의, 경각심,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려는 의욕 등은 그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길잡이가 됐다.
그는 왼손타법을 익혔다. 원래 파워와는 담을 쌓았던 그는 강하게 때리는 데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내야수 사이를 빠져나가도록 날카롭게 끊어치는 데 주력했으며 타구가 약할 때는 빠른 발을 살려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내야의 땅이 단단한 구장에서는 다운스윙으로 내리찍어 바운드된 공이 한참 동안 공중에 떠있도록 하는 타법도 익혔다. 내야수들이 튀어오른 공이 밑으로 내려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윌스는 1루에 안착하곤 했다.
그러나 모리 윌스가 이런 타격을 하기 위해서는 투수연구에 1인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약점이나 타격스타일을 놓고볼 때 그는 천부적인 감각보다 머리에 의존해야만 했다. 즉 모든 투수의 동작과 투구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확고한 감각을 유지해야 했다. 이런 것들은 대단한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윌스는 이런 관찰을 베이스러닝에도 적용시켰다.
타자들이 투수의 피칭 모션을 연구하듯이 윌스는 상대투수들의 1루 견제동작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비밀 장부'가 있었다. 윌스는 상대투수가 어떤 동작을 취할 때는 1루로 견제구를 던지고, 어떤 동작일 때는 그냥 모션에 그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어떤 동작일 때 홈으로 피칭하는지를 투수 개인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지식을 갖춘 데다 엇비슷한 행동에서 극히 미세한 동작의 차이까지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 모리 윌스는 견제구에 걸리지 않으면서 누구보다 크게 리드할 수 있었고, 도루할 때는 누구보다 먼저 2루를 향해 스타트할 수 있었다.
'도루는 투수로부터 뺏는 것이지 포수로부터 뺏는 게 아니다'라는 야구격언이 있다. 고급야구가 아닌 데에서는 이런 격언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포수의 어깨가 약하거나 송구가 부정확할 때는 주자의 스타트가 다소 늦더라도 세이프될 수 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포수들은 유별나게 강한 어깨를 자랑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도루저지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예 처음부터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루의 성패는 주자가 얼마나 빨리 스타트하느냐, 즉 얼마나 리드를 많이 하고 일찍 스타트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자를 베이스에 가까이 묶어놓는 것은 투수의 책임이다. 투수가 1루에 견제구를 던지는 것은 주자를 잡겠다는 것보다는 너무 리드가 큰 주자를 베이스로 몰아넣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리고 노련한 투수는 고개를 돌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주자를 꼼짝못하게 묶어둘 수 있다. 보크 룰에 걸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투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1루로 견제구를 던질 듯한 기색을 보이다가 재빠른 동작으로 홈으로 투구한다면 주자는 '지금 뛴다'는 결정을 내리고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고 최고 스피드를 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루의 성공 여부는 포수가 악송구하지 않는 한 도루의 첫걸음에 달린 것이지 마지막 걸음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윌스는 이 기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첫걸음'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이런 순발력은 농구선수나 미식축구의 러닝백에게도?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 그리고 그는 그 재능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완전하게 계발한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런 베이스러닝을 할 수 있게끔 끊임없는 관찰과 정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더욱 드물다. 1959시즌 중반이 되자 윌스는 다저스의 일원이 돼 있었다. 그해 10월에는 월드시리즈에 출전했고 1962년에는 스타가 됐다.
그리고 1966년까지 다저스가 4년 사이 3차례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모리 윌스는 야구계의 흐름까지 바꿔놓았다. 다른 선수들도 도루의 효용을 재인식하게 됐고 감독들은 도루를 허용하다 못해 권장하기에 이르렀으며 도루능력을 가진 선수를 발벗고 찾아 나섰다. 마침내 루 브록 Lou Brock, 그 다음에는 리키 헨더슨 Rickey Henderson 등이 차례로 윌스의 기록을 뛰어넘었고 그밖에 연례적으로 10여명의 선수가 50개 안팎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게임을 지휘하는 감독들의 자세에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처크 태너 Chuck Tanner, 화이티 허조그 Whitey Herzog, 빌리 마틴 Billy Martion 등 세 감독은 '뛰는 야구'를 더욱 강조했다.
모리 윌스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기동력의 야구가 강조되는 추세를 몰고 왔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1970년대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얼 위버 Earl Weaver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 달리 '한꺼번에 대량득점하기'와 '3점 홈런 애용자'로 정평이 나 있었고 실제로 그런 플레이를 할 능력을 갖춘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위버감독만이 그런 야구철학을 갖고 있었다고 꼬집어 말하는 자체가 전체 야구의 흐름이 달라졌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구태여 이런 언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반적인 게임의 양상이 그랬기 때문이다.
기동력의 야구가 가져오는 이점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가지 변화가 뒤따랐다. 하나는 구장이고 또하나는 사람이다. 주자가 달리는 주루선에도 인조잔디가 깔림에 따라 주자의 스피드가 증진됐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이 불어났다. 1, 2루간 거리는 과거와 똑같다. 투수에서 포수, 포수에서 2루까지 가는 송구 거리도 과거와 똑같다. 그러나 주자가 평균적으로 한걸음 또는 그 이상 빨라졌다면 도루성공 여부는 주자쪽에게 유리하게 변한 셈이다.
그래서 게임의 양상은 다시 바뀌었다(다시 말하지만 매우 점진적으로). 1919년에는 100게임당 도루는 186개, 홈런은 39개였다. 1949년에는 도루는 겨우 59개에 홈런은 138개로 역전됐다. 1959년만 해도 도루는 69개에 불과했고 홈런은 182개였다. 그러나 1979년에는 도루가 142개로 불어났으며 홈런도 여전히 적지 않은 164개였다. 오늘날의 야구는 도루와 홈런수는 종전보다 훨씬 엇비슷하게 균형이 잡혀가고 있다. 이 두가지는 활달한 액션을 보여주면서 스코어를 늘려주기 때문에 관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모리 윌스는 이런 흐름을 불러온 주인공이다. 하긴 윌스가 출현하지 않았더라도 앞서 지적한 대로 선수들의 주력증가와 구장 표면의 변화로 인해 언젠가는 그런 식의 변화가 일어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기가 무르익으면서 윌스가 그런 조류 형성에 강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윌스의 성공 뒤에는 정신력과 의지력에 이은 제3의 요소가 있었다. 도루는 슬라이딩을 뜻하며, 슬라이딩은 고통을 수반하고, 잔부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부상들은 나아가 중상을 부를 위험을 안고 있다. 윌스식으로 야구를 하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뛰어야 하고 그러려면 신체적 고통을 이겨내면서 적극적으로 대들어야 한다. 이는 부상 중에도 뛰어야 하고, 찰과상이나 접질린 발목이 다 낫기 전에도 뛰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베이스에 슬라이딩해 들어가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를 가로막는 야수와 충돌하거나 걷어차이는 횟수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여기서 화제를 돌려 도루의 단계를 살펴보자.
①우선 출루하라. 1루는 훔칠 수 없다.
②투수의 동작을 파악하라.
③투수의 집중력이 잠시나마 허물어지는 시점을 포착, 그것을 최대한으로 할용하라.
④투구배합을 살펴 도루하기 가장 좋은 투구를 골라라. 그리고 피치아웃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라.
⑤스타트를 빨리 하라.
⑥슬라이딩 요령을 배우고, 볼이 먼저 도달하더라도 태그를 피하는 방법을 연구하라.
이런 것들은 연습을 통해 처음부터 새로 익힐 수 있으며 이미 갖춘 기본재능을 좀더 향상시킬 수도 있다. 출루횟수를 늘리려면 선구안을 길러 포볼을 많이 골라 나가거나 공을 박살낼 듯이 때리지 않고 갖다 맞히는 데 주력하면 된다. 투수를 연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밀히 지켜보고 연구하면 되는 것이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슬라이딩 요령은 연습을 통해 길러진다. 물론 매우 힘들고 괴로움이 뒤따른다. 슬라이딩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공과 야수의 위치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즉 야수가 태그할 수 있는 타깃을 최소화하면서 발이나 손으로 베이스를 짚고 들어가는 것이 요령이다.
도루하기 좋은 공을 고른다는 것은 팀플레이와도 관련이 있다. 윌스의 경우 그가 도루할 때 타석에서 호흡을 맞춰주는 동료선수가 있었다. 감독도 윌스가 스스로 판단해서 뛸 수 있도록 자율권을 줬다. 보통선수는 감독의 허락 없이는 도루할 수 없다. '허락'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타자에게 때리라는 사인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뛰라는 '명령'이 아니라 뛸 수 있다고 판단되면 뛰어도 좋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주자는 물론 누구나 자부심을 갖고 있으므로 도루사인이 떨어지면 십중팔구 뛰게 마련이다.
'뛰기 좋은 공'은 타자에 대한 볼카운트, 투수가 즐겨 사용하는 투구패턴, 주자와 투수 사이의 심리전(포수도 투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자와 포수의 심리전도 곁들여진다) 등과 연관이 있다. 볼카운트가 2-0이라면 도루를 시도하기에 매우 나쁜 타이밍이다. 포수는 부담없이 피치아웃 사인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피치아웃이란 타자가 치지 못하도록 공을 옆으로 빼서 포수가 방해받지 않고 재빨리 2루로 송구할 수 있도록 투구하는 것이다). 그런 볼카운트에서는 투수가 볼 한 개, 또는 두 개까지도 버릴 수 있다. 거꾸로 볼카운트가 0-2라면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지기에 급급하므로 주자가 뛸 수 있는 기회다. 더구나 타자는 고의로 헛스윙해서 주자를 도와줄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원 스트라이크를 먹으면서 포수의 2루송구를 약간이나마 방해할 수 있다.
투구의 종류에 따라서도 도루성공 여부에 큰 차이가 나타난다. 너클볼은 주자에게 "어서 도루하십시오"하고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포수는 2루송구는 고사하고 볼을 잡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슬로볼은 어떤 구질을 막론하고 빠른 직구보다 도루를 허용할 확률이 크다. 볼이 포수 미트에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낮게 떨어지는 커브도 공이 포수에게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 뿐 아니라 포수가 몸을 낮춰야 하는 어려움까지 가중되기 때문에 도루하기가 편하다.
좌타자가 타석에 서 있으면 1루주자는 약간이나마 포수의 시야에서 가려지는 이점을 안게 된다(우타자일 때 3루주자도 마찬가지다). 투구가 바깥쪽으로 낮게 들어올 경우 오른손잡이인 포수는 안쪽으로 들어올 때보다 단 몇십분의 1초라도 송구자세를 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 (왜 포수는 모두 오른손잡이일까? 대부분의 타자가 우타자이므로 포수가 송구를 방해받지 않으려면 오른손으로 던지는 편이 유리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굳이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전통적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 )주자는 타자나 투·포수와 똑같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도루하기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찾아낼 수 있다.
앞에서 빠뜨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이제 밝히겠다. 도루나 베이스러닝을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이 빨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물론 평균보다 발이 느려서는 곤란하겠지만 어느 팀에나 가장 베이스러닝을 잘하는 선수보다도 발이 빠른 사람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주로 투수들 중에 있다). 베이스러닝은 주력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아무리 단거리전문 육상선수라도 베이스러닝은 엉망일 수 있다. 도루는 뛸 시기를 정확히 포착해서 스타트를 빨리 하고 슬라이딩을 잘하는 데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공률이 얼마나 높으냐에 있다. 절반은 살고 절반은 죽는다면 팀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득?銹만?줄여놓는 손해를 끼칠 뿐이다. 좋은 주자라면 도루성공률이 적어도 70%는 넘어야 한다. 즉 10번 뛰면 7번 이상 세이프될 수 있어야 한다.
윌스를 비롯한 도루전문가들은 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팀을 간접지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로빈슨, 윌스, 메이즈, 아파리치오, 브록, 헨더슨 같은 위협적인 주자들은 투수를 괴롭힌다. 그들이 누상에 나가면 투수는 불안해져 견제구를 던지고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은 타자에 대한 투수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즉 주자가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투수의 초점이 흐려져 타자??포볼을 내주거나 홈런을 얻어맞기도 한다.
도루 활성화에 따른 야구의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뤄졌다. 1930∼70년 사이 홈런이 많아지면서 베이스러닝이 퇴보하자 투수들도 1900∼30년대에는 필수적이던 주자견제 기술을 외면하게끔 됐다. 따라서 모리 윌스나 루이스 아파리치오 등이 '구식 무기'를 다시 들고나왔을 때만 해도 많은 투수들이 주자에게?신경쓰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아 집중력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도루가 일반화되면서 발빠른 주자들이 많이 나타나자 투수들은 주자에 더많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엄격해진 보크 룰에 걸려들거나 홈런을 맞을 위험이 커지는 바람에 정신적 부담감이 더 늘어나게 됐다. 현대야구의 경기시간이 유난히 길어진 것도 투수들이 주자 리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데에 원인이 있다.
팀에 대한 두번째 간접지원은 우수한 주자일수록 1루수를 베이스에 묶어두는 시간이 다소나마 더 길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라이트 앞으로 타구가 빠져나갈 공간이 그만큼 넓어진다. 또 유격수와 2루수를 2루쪽으로 좀더 가깝게 모아놓는 이점도 있다. 더블플레이를 하려면 내야수들이 약간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유격수와 2루수가 베이스쪽으로 붙을수록 땅볼타구가 외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것들은 몇㎝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몇㎝가 게임의 승부를 좌우한다.
세번째 간접지원. 유능한 주자는 성공적인 뜀박질로 공격의 효율성을 높인다. 똑같은 안타수로도 더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네번째, 상대 수비망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 야수들은 송구와 중계플레이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고 땅볼타구를 처리할 때 마음이 조급해진다. 포수는 번트나 단독스틸을 처리하거나 픽오프를 하면서 서두르다 엉뚱한 데로 악송구하는 수가 자주 생긴다. 이런 실수가 어쩌다 한두번만이라도 나오면 수비의 안정에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다.
다섯번째는 바로 이것과 앞뒤관계를 이룬다. 주자가 활발하고 과감하게 달림으로써 팀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고 동료들은 더욱 열심히 게임에 임하게 된다. 공격적인 의욕이 팀 전체에 깔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도루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사실 도루는 재조명을 받으며 많은 선수들이 애용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몇몇 선수만이 장기를 발휘하는 전문기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은 스코어로 승부가 결정되던 시절에는 도루가 더욱 긴요하고 모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탄력없는 볼을 사용하던 시절에 도루기술이 발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선수가 몇몇에 국한돼 있듯이 연간 40개 정도의 도루를 착실히 해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선수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베이스러닝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차원이 다르다.
1·3루코치는 주자의 베이스러닝을 돕기 위해 코치박스에 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타구가 어디로 날아갔고, 그래서 어디까지 진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주자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타구를 처리하는 야수의 어깨, 볼을 잡아 던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자신의 주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어디까지 뛸 것인지를(리드한 거리까지 계산에 넣어) 결정한다.
주자는 또 현재의 스코어, 아웃카운트를 고려해서 과연 위험을 무릅쓰고 더 많이 진루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4점차로 뒤진 9회말 1사 상황이라면 안타가 터졌다 해서 1루주자가 3루까지 무리하게 뛸 이유는 없다. 승부를 좌우하는 득점은 그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아웃당할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1점차로 뒤쫓고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그런 모험을 해볼 가치가 있다. 그 뒤에 적당한 땅볼만 나오더라도 동점을 뽑아 당장 눈앞에 닥친 패배를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덩치가 크거나 작거나, 영리하거나 우둔하거나 어쨌든 모든 주자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더블플레이를 방지하는 것이다. 야구에는 몸을부딪치며 힘을 겨루는 장면이 별로 없지만 바로 더블플레이만은 그런 육탄대결도 불사해야 하는 대목이다. 1루주자는 병살이 될만한 타구가 나왔을 때 피봇맨이 1루로 정확하게 송구하지 못하도록 힘껏 슬라이딩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조금이라도 빨리 그 위치로 달려가야 하며 베이스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야수를 겨냥해야 한다.
근년에는 베이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눈에 띄게 야수를 걷어차고 들어갈 경우 심판에 의해 제재를 받지만(자동 병살로 처리한다) 베이스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는 야수를 방해하는 것이 허용된다. 어쨌든 주자는 심판이 아니다. 나중에 판정이 어떻게 나오건 간에 주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는 최대한 살려야 한다. 게임의 승패, 나아가 패넌트레이스 우승 여부는 바로 더블플레이를 저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주루플레이가 또하나 있다. 무사1, 3루에서 타자가 3루수앞 또는 투수앞 땅볼을 때렸을 경우 3루주자는 '반드시' 홈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방이 2루→1루로 더블플레이를 연결하는 동안 3루주자는 아무 소득없이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결과가 된다.
3루주자가 홈으로 뛴다면 상대방은 실점하지 않으려고 홈으로 송구할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아웃당하겠지만 1사1, 2루로 득점 찬스가 이어진다. 이는 2사3루보다 유리하다. 3루주자가 좀더 영리하다면 일부러 협살에 걸려 다른 주자들이 2, 3루로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다. 다른 주자에게 추가진루할 시간을 벌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주자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다.
진루를 위한 주자의 판단에는 미묘한 이해득실이 얽혀 있다. 공격적인 주루를 하면 한 베이스라도 더 진루할 수 있고, 좀더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고, 상대방의 실수를 이끌어내는 등 어마어마한 이득을 낳는다. 그러나 자칫 도가 지나쳐 무모한 주루가 돼버리면 아까운 아웃 하나만 허비하면서 상대방의 골칫거리를 제거해 주는 이적행위가 되고 동료의 안타를 헛수고로 만들어 버린다. 관중들은 결과를 놓고 무모한 주루플레이를 한 선수를 몹시 나무라지만 선수들은 그라운드의 비입체적인 평면상으로 모든 플레이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꾸중할 일만은 아니다.
모든 주자가 지켜야 할 또하나의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예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 즉 자기에게 내려진 사인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타자가 보내기번트 또는 히트앤드런을 한다면 주자도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타자는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을 3루코치를 통해 전달받으며 주자는 3루코치나 벤치, 또는 타자로부터 사인을 받는다.
주자가 사인을 놓치면 즉각 엄청난 낭패를 보게 된다. 타자가 번트했는데 주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면 괜히 아까운 아웃만 허비하는 셈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블플레이까지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주자가 번트사인으로 잘못보고 뛰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작전을 내리는 감독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루나 히트앤드런은 주자를 '스타트'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어떤 투구, 어떤 상황에서는 굳이 히트앤드런을 걸지 않더라도 주자가 뛰어줬으면 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병살을 막거나 안타가 나왔을 때는 한 베이스라도 더 진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 플레이에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계산에 넣고 있다. 즉 주자의 스피드, 투수의 능력, 게임의 진행상황, 야수들의 위치, 예상되는 구질 등이 그것이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자동적으로 1루주자가 스타트하는 상황이 하나 있다. 즉 투아웃 볼카운트 2-3일 때다. 이런 경우 1루주자는 투수가 일단 투구동작에 들어가면 스타트해도 아웃당할 염려가 없다. 타자가 포볼을 골라내거나 파울볼, 안타, 범타를 기록하거나 삼진당함으로써 타격의 결말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하게 자동 스타트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감독은 때때로 어떤 목적을 위해 주자를 스타트시키는 수가 있다. 그런데 타자가 너무 강타만 노리다가 헛스윙하는 바람에 주자를 객사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감독이 분통을 터뜨리는 게 바로 이럴 때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1루주자에 관련된 내용만 살펴봤다. 대다수의 행동이 일어나는 곳, 그리고 어떤 선택이 필요한 곳이 1루이기 때문이다. 2루주자는 어지간하면 3루를 훔치려 들지 않는다. 3루를 훔쳐서 얻는 이득이 없지는 않지만 (후속타가 반드시 안타가 아니더라도 득점할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다) 그 이득이라는 게 태그아웃당하는 손해를 상쇄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후속안타로 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2루에 있을 때나 3루에 있을 때나 엇비슷하다. 또 포수-2루의 거리가 127피트(38. 7m)인데 비해 홈-3루는 90피트(27. 43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3루도루는 주자에게 훨씬 불리하다. 그리고 홈스틸은 필사적인 모험이 필요한 상황에서 감행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저 관중을 의식한 재주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윌스는 "별로 필요하지 않을 때도 냅다 도루한다"거나 "너무 관중을 의식한 플레이를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았다. 이런 비난 속에는 야구계에 아직 남아 있는 인종차별의 냄새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윌스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있는 야구이론으로 반박한다.
"나의 야구는 뛰는 야구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뛰어야 한다. 그 이유는 내 자신이 무뎌지지 않도록 기민성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조바심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득점을 너무 많이 올렸다고 손해볼 일이 어디 있는가? 스코어가 10-1이 되고난 후 홈런타자가 홈런을 때렸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가? 우리 팀이 10-1로 이기고 있다면 나는 내 방식대로 도루해서 스코어링 포지션을 점령했다가 11-1을 만들고 싶다. 흔치는 않지만 상대방이 한꺼번에 9점을 뽑아 경기를 뒤집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강조하는 야구란 그런 것이다.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지금 이 시점에서' 최선의 플레이를 해야 하며 그 뒤의 어줍잖은 비난이 두려워 적당히 어물거려서는 안된다.
반면에 도루할 능력이 있더라도 '도루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키 맨틀이었다. 빼어난 주력을 유지했던 맨틀은 고도의 베이스러닝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도루를 삼갔기 때문에 그의 도루가 승리와 직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미키 맨틀의 야구인생은 다리부상으로 점철돼 있었다. 그런 선수??도루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충격과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도루하다가 부상당하는 바람에 2주 정도 전열에서 빠져야 한다면 그의 다른 재능, 즉 장타력과 폭넓은 수비를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1990년의 호세 칸세코에게도 이런 문제가 제기됐었다. 그는 1988년 42홈런에 도루 40개를 곁들여 사상 최초로 40-40클럽을 개설하면서 만능선수로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해 6월 그는 향후 5년간 2천3백50만 달러를 받는다는 (그 당시로는) 사상 최고액 연봉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칸세코는 공교롭게도 그런 협상을 벌이던 중 등허리부상을 입어 출장불능선수 명단에 올라가야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언젠가는 50-50클럽을 여는 해가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런 고액선수가 (게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기록 수립을 위해 도루하다가 다쳐 게임을 뛸 수 없게 된다면 그 자신이나 구단 모두가 용서받지 못할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차 도루왕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는 리키 헨더슨 Rickey Henderson은 (다른 재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모험만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야구의 전부였다. 그러나 칸세코의 대표적인 재능은 장타력에 있으므로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뛰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짓이다.
현대의 칸세코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맨틀은 즐비한 장거리 타자들 속에서 뛰었으므로 그런 타선을 고려한다면 무리하게 도루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었다.
윌리 메이즈는 맨틀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베이스러닝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메이즈는 잦은 부상에 신음한 맨틀과 달리 신의 축복이랄 만한 건강을 자랑했다. 메이즈는 윌스가 출현하기 전 내셔널리그를 주름잡는 도루왕이었는데 그때 그가 몸담은 자이언츠 타선은 다른 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자이언츠 타선이 올란도 세페다 Orlando Cepeda, 윌리 매카비 Willie McCovey 같은 슬러거들로 보강되면서 장거리포로 쉽사리 메이즈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되자 메이즈는 팀을 위해 다리로 모험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그의 도루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윌스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다리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뛰는 것이야말로 그가 팀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쳐서 뛸 수 없다면 그의 존재가치는 없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그가 건강하면서도 뛰지 않는다면 존재가치가 없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맨틀이나 메이즈나 행크 에런 같은 선수들은 워낙 타력이 빼어나기 때문에 설사 도루능력이 탁월하더라도 뛰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뛰는 야구'의 부활은(그렇다고 홈런시대를 뒤집는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가치평가가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투수력이 강해지고 외야가 넓은 대형경기장이 속출하는 데에 따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과거의 단타-번트-도루-단타의 득점전술은 투수력이 막강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구나 반발력이 적은 공을 쓰던 시절에는 득점수가 적었다. 그러나 1920년 이래 공의 성능이 병화된 시대를 맞고나서는 트릭피칭이 통하지 않게 되고, 언제든지 새하얀 공이 새로 투입되고, 구장펜스가 상대적으로 짧아짐에 따라 오히려 투수가 수세에 몰리게 됐다. 이 시기에는 홈런을 노리는 스윙의 가치가 컸으므로 굳이 도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다시 투수쪽이 유리하게 균형이 역전됐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감독을 역임하고 야구이론에도 일가견이 있는 에디 스탱키 Eddie Stanky는 이렇게 명쾌하게 답변한다.
"피칭은 타격보다 교육성과가 좋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고 연습과 트레이닝도 제대로 하고 있다. 우리는 투수에게나 타자에게나 똑같이 지도를 아끼지 않지만 야구의 생리상 타자보다는 투수가 더 발전하는 폭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투수열세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특출한 투수는 예나 지금이나 희귀하지만 전반적인 투수층은 점점 향상되고 있다."
게다가 구원투수 활용이 보편화한 것도 그런 현상을 가속시켰다.
피칭이 좋아지면 득점하기가 어려워진다. 득점수가 줄어들면 다른 공격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다저 스타디움이나 캔들스틱 파크(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 애스트로돔(휴스턴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뉴욕 메츠 홈구장) 등은 과거 에베츠필드, 폴로 그라운드, 부시 스타디움에 비해 홈런을 뽑기가 어려워졌다.
윌스의 도루가 돋보인 것은 다저스의 투수진이 막강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자니 파드레스 Johnny Podres, 론 페라노스키 Ron Perranoski 등으로 이뤄진 마운드는 연방 완봉이나 1점, 2점차 게임을 연출해 냈다. 그런 투수들이 버티고 있는 한 1, 2점만 얻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으며 윌스식 공격은 1, 2점을 뽑는 데 긴요했다. 만약 윌스가 소속된 다저스의 마운드가 허약해서 게임마다 번번히 5, 6점씩 손쉽게 내주곤 했더라면 상대방은 그의 도루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3점차로 뒤지고 있는 게임에서 윌스가 뛰어봤자 승부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도루기록이야 남겠지만 자기팀 투수가 상대방을 저실점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한 윌스식 야구는 승리를 자아내는 데 별다른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베이스러닝은 야구에서 가장 솔직한 행동이고, 배트나 볼처럼 컨트롤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몸과 의지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베이스러닝의 한걸음 한걸음은 곧 팀의 전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브랜치 리키 Branch Rickey가 즐겨 지적한 대로 "개인의 임무와 팀이 얻는 효과가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야구를 모든 단체운동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스포츠로 만드는 요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