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루카 18,9-14
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소크라테스만큼 유명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그날도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머리를 닦으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라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소크라테스도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더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내의 분노에 초연할 줄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또한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그때 맞서 싸웠다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아내와 같은 수준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청하는 세리도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 같은 사람들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자신의 자세를 뉘우칩니다.
바리사이는 이웃보다 잘살고 있으면 잘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웃보다 잘살고 있음을 알려면 이웃을 평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그를 깎아내리면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바리사이가 뭐라 해도 발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원래 부족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라고 하십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인의 심판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그냥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내가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심판한다고 분노에 차서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심판받으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당신께서 다른 수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응하면 같은 수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의 본성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육체의 인간으로 살고 있어서
세상의 심판에 아주 무관하게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그렇더라도 자주 내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이웃의 심판에 자유롭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8,9-14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내면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속시원한 사이다 같은 거침없는 언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세리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에 많는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는 예수님의 모습에 전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에 거슬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서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 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강론>
(2024. 3. 9. 토)(루카 18,9-14)
<회개>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여기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진짜 의인도 아니면서 “나는 의인이다.” 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교만한 위선자들’입니다.
<진짜 의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늘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의식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서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바로 그 교만 때문에 성인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을 향해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바오로 사도처럼 진실한 사람도 일부 있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들이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다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회개했고, 죄가 되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마태오 사도’와(마태 9,9)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루카 19,8)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떻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 4,17).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진실하게 회개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고, 바리사이는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면서, 회개하지 않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사이와 세리를 비교하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을 대조하는 비유이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너는 지금 어느 쪽에 있느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꼿꼿이 서서’ 라는 말은 그 바리사이가 거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혼잣말로’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서’인데, 그 바리사이가 하느님께 기도드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뜻이 아니라, 번역되어 있는 그대로 혼잣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강도짓, 불의, 간음을 하지 않은 것과 단식을 자주 하고 십일조를 잘 바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를 생각하면, 그는 겉으로는 죄를 안 짓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자입니다.
그의 말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 라는 말과 ‘저 세리와도 같지 않다.’ 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더 선하다, 또는 더 악하다.” 라는 평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과 악은 그 자체로 평가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나는 너보다 선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그는 교만과 위선과 신성 모독죄 때문에,
또 자기는 다 잘하고 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 착각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속으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만 죄인이라고 하고,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세리가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죄의 삶’을 청산하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즉 ‘온 삶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14절의 ‘의롭게 되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의로움을 인정해 주셨다.” 라는 뜻이고, 이 말은 “구원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는
“스스로 의인인 척 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이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는 “진실하게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