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박인환
[1]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2]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3]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선집>(1955)-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주지적, 애상적, 허무적, 감각적, 상징적, 체념적, 감상적
◆ 표현 : 산문체이면서도 리듬감이 느껴짐.
도시적 서정과 보헤미안적 기질이 짙음.
◆ 중요 시어 및 시구
*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 의식의 흐름에 중점을 둔 내면 묘사의 소설을 주로 발표한
영국 소설가로, 전후의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강박관념에
시달려 결국 템즈강에 투신 자살함.
* 목마 → 떠나가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매개체이다. 또한 가벼운 애수와 상실감을 상징하며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와 전후의 허무 의식을 연결시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별 → 삶의 행로를 밝히는 시대의 좌표와 희망의 상징
* 가벼웁게 부서진다 → 상실의 이미지, 부정의 현실과 연결되는 표현.
*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모든
가치있는 것이 소멸된 전후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표현
* 늙은 여류작가의 눈 → 삶의 열정을 읽어 버린 작가의 눈. 절망과 비애와 허무의 표출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 길잡이가 없는, 즉 삶의 지향성을 상실한 허무와
불안의 시대
* 페시미즘 → 비관주의, 염세주의 (목마의 직접적 의미)
* 작별하여야 한다, 바라다 보아야 한다. 기억하여야 한다. 들어야 한다. 마셔야 한다
→ 절망적 현실
에서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는 표현을 통해
위장하고 있음.
* 뱀 → 통속적인 욕정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인생이란 통속잡지의
표지처럼 별반 의미도 없고 특별히 외로워할 무엇도 없는,그저 세월의 흐름에 맡기는
수동적인 삶임을 말함.
* 가을 바람 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
(애상적)가 집약적으로 표현된 부분
◆ 주제 ⇒ 모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애상과 허무감
◆ 특징 : 전후의 허무주의적 색채가 짙음. 의미보다는 분위기의 강도가 큼.
[시상의 흐름(짜임)]
◆ [1] :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허무와 절망감
◆ [2] : 절망한 현실에 대한 체념과 삶의 위안
◆ [3] : 인생에 대한 애상적 통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것으로, 6.25전쟁이 가져다 준 전후의 폐허와 정신의 황폐함, 비정한 분위기에서 도시의 서정성을 노래하였다. 전쟁 직후의 시적 정조는 자연히 감상적, 허무적, 체념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밖에 없다.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목마, 별, 소녀, 늙은 여류작가, 등대, 페시미즘, 술병" 등을 동원해서 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이 시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절망감이나 도시적 감상성은 퇴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감미로운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박인환의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시는 시어나 시구가 지니는 각각의 의미를 분석하거나 그것들의 의미 상황을 추적하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적 방법인 우연성에 의한 시어의 자유 분방한 표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환의 이러한 언어 감각이 이 작품을 '분위기'로 느끼게 하는 주된 요인이며, 허무적이고 감상적인 정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6·25의 비극적 체험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 가치의 전도(顚倒)와 혼란, 문명화,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등으로 인해 개인주의적, 감상적, 허무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 작품에 나타난 허무 의식과 센티멘탈리즘 역시 전후의 정신적 황폐함과 불안 의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소개]
박인환 : 시인
출생 : 1926. 8. 15. 강원도 인제
사망 : 1956. 3. 20.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데뷔 : 1946년 국제신보 등단
경력 : 1952 대한해운공사
1951 육군 종군 작가단 종군 기자
1948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작품 : 도서 72건
<정의>
해방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을 저술한 시인.개설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목마와 숙녀와 별과 사랑』(이동하 외,문학세계사,1986)『현대한국시인연구』(김해성,대학문화사,1985)『박인환평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윤석산,영학출판사,1983)『시인박인환과 문학과 그 주변』(김광균 외,근역서재,1982)『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국민서관,1973)「박인환론」(박철석,『현대시학』,1981.2.)「잊을 수 없는 시인의 회상」(안도섭,『자유신문』,1957.9.2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인환(朴寅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