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165]春風大雅,秋水文章
추사가 쓴 對聯句 작품 ‘自題聯’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추사
등석여
이 문장은 원래 淸나라 서예가인 鄧石如(1743∼1805)의 ‘自題聯’을 추사가 다시 쓴 작품인데,
예산의 추사고택에는 이 문장의 해석이 다음과 같이 걸려 있다.
春風大雅能容物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다 용납하고,
秋水文章不染塵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듯하지만,
막상 그 뜻을 헤아리려면 무슨 뜻인지 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해석이다.
위 해석은 그야말로 字句의 해석에 그친 경우인데,
막상 ‘大雅’가 <詩經>의 한 篇名임과
‘秋水’가 <莊子>의 한 편명임을 알고 나면,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이 쉽게 풀어 쓸 수 있다.
春風大雅能容物 봄바람 같은 유교의 가르침은 만물을 포용하고,
秋水文章不染塵 가을 물 같은 도교의 가르침은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
한문은 이처럼 그 표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면
쉽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이를 ‘典故(典例와 故事)’라 하는데 이것이 한문공부가 어려운 이유이다.
[참고]
-이하 김병기교수의 글-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6.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傳추사 김정희의 글씨(12)
‘사성상동’ 대구, 온화한 인품 예찬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처럼 온화한 인품(아량)은 만물을 다 용납할 수 있고,
가을 물처럼 냉철한 문장은 먼지(세속)에 물들지 않을레라.
春:봄 춘/ 風:바람 풍/ 雅:맑을 아, 바를 아/ 能:능할 능, 능히 능/ 容:얼굴 용, 용납할 용/ 物물건 물,
秋:가을 추/ 章:글 장/ 染:물들 염/ 塵:티끌 진, 먼지 진
이 작품은 글씨도 글씨려니와 문장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작품이다.
이 문장의 해석에 이견이 많은 이유는 ‘大雅(대아)’라는 말 때문이다.
‘雅’는 본래 맑다, 바르다, 온화하다, 고상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이다.
따라서, 첫 구절만 보자면 글자의 뜻을 그대로 적용하여
‘봄바람은 매우 온화하여 만물을 다 용납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해석을 하였을 경우 다음 구절의 ‘文章’이라는 단어와
전혀 대(對, 짝)를 이룰 수 없다. 앞 구의 ‘大雅’는 부사(大, 매우)+형용사(雅, 온화하다)의 구조인데 반해
뒷 구의 ‘文章’은 명사(文, 글)+명사(章, 글)로 이루러진 합의복사(合義複詞)이기 때문에
앞 뒤 구절이 對를 이루기 위해서는 對의 위치에 있는 글자의 품사가 같아야 한다는
이른 바 ‘사성상동(詞性相同)’의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春風大雅’를 ‘봄바람은 매우 온화하여’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까닭에 혹자는 ‘大雅’를 ‘시(詩)’나 ‘음악’의 의미로 풀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시가 총집인 <시경(詩經)>은 성격이 다른 네 종류의 시를 모아 놓은 것인데
그 중 하나가 ‘雅’라는 성격의 시이다. 雅는 다시 ‘大雅’와 ‘小雅’로 나누어지는데
대아든 소아든 雅는 당시의 표준어인 ‘바른 말(雅=正)’로 지은 노래로서
대아는 외국의 수장(首長)이나 사신이 왔을 때 의전과 연회에 주로 사용하던 음악이고,
소아는 국내의 정치행사에 주로 사용하던 음악이다. 이런 이유로,
‘大雅’를 시 혹은 음악의 의미로 풀이하며 ‘春風大雅’를 ‘大雅春風’의 도치(倒置)로 보고
“시(혹은 음악)는 봄바람과 같아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아든 소아든 <시경>안에 수록되어 있는 ‘雅’라는 성격의 시가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大雅’를 ‘정치’라는 뜻으로 풀어서
“정치는 봄바람과 같아서…”라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 일 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필자는 '大雅'를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서 상대방의 ‘인품(雅量)’을 칭송하는 말로 풀이하였다.
국어사전도 大雅를 “나이가 서로 비슷한 친구나 문인에 대하여 존경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아량(雅量)’을 ‘너그럽고 속이 깊은 마음씨’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 ‘春風大雅能容物’은 ‘봄바람처럼 온화한 인품(아량)은
만물을 다 용납할 수 있고’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뒷 구절 ‘秋水文章不染塵’은 ‘가을 물처럼 냉철한 문장은 먼지(세속)에 물들지 않네.’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대아’와 ‘문장’이 ‘인품(아량)’과 ‘문장’이라는
의미의 명사로서 對를 이루고 나머지 글자들도 빈틈없이 사성상동(詞性相同)의 對를 이루어
전후 문장이 완벽한 대구(對句)가 된다.
더욱이 추사와 같은 시기 청나라의 유명 서예가인 등석여(鄧石如)가 이미
이 대구를 작품으로 쓴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가 등석여(鄧石如)의 글을 인용하여
이 작품을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등석여의 원작에는
‘춘당대형아감(春塘大兄雅鑑, 춘당 큰 형께서 고아하게 감상하시기를 바라며)’라는
쌍낙관이 있다. 등석여는 ‘봄춘(春)’자가 들어 있는 ‘春塘(춘당)’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친구에게 ‘春’자로 시작하는 이 구절을 써줌으로써 친구에 대해
‘봄바람처럼 온화한 당신의 인품(아량)은 만물을 다 용납할 수 있을 것이고,
가을 물처럼 냉철한 당신의 문장은 결코 먼지(세속)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는 칭송을 한 것이다.
참 멋진 대구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정말 추사의 작품일까?
필자는 앞서 표제에서 “傳추사 김정희의 글씨(12)”라고 하여 ‘傳(전)’자를 붙였다.
추사 글씨로 전해 오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품을 추사의 진작으로 여기고 있지만
필자 생각에는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傳(전)’자를 붙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하기로 한다.
전북일보 최종수정 : 2011.08.23 20:05:49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7. 春風大雅, 秋水文章 대련 -추사의 글씨(13)
쌍낙관은 커녕 이름·호도 없어, 진품 의문
오늘은 추사의 작품과 함께 청나라 사람 등석여가 쓴 것도 게재하였다.
오늘은 필자가 지난 호의 말미에서 예고한 대로 어떤 이유로 추사의
이 작품을 확실한 진품으로 보기를 잠시 유보하고 ‘전(傳)’ 즉
‘추사의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는 작품’으로 보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작품의 對句 문장은 어떤 진리나 사실을 천명한 성격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大雅’를 시(詩)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글은 ‘시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문장은 가을 문장처럼 깔끔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이 말이 비록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래야하는 진리이거나 사실은 아니다.
가을 물처럼 시리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한 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봄바람처럼 훈훈한 문장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청치는 봄바람 같고 문장은 가을 물 같다’고 해석한다면 ‘大雅’를 정치로 본 자체가
비약일 뿐 아니라, 앞 구의 ‘정치’라는 단어와 뒷 구의 ‘文章’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지도 않으며
이 글을 어떤 진리나 사실을 천명한 성격의 글로 보는 것은 더욱 어색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는 이 대구는 진리나 사실을 천명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칭송하는 글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고서 지난 호에서
“봄바람처럼 온화한 인품(아량)은 만물을 다 용납할 수 있고,
가을 물처럼 냉철한 문장은 먼지(세속)에 물들지 않을 것일레라.”라는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원작자인 등석여가 ‘춘당대형아감(春塘大兄雅鑑)’이라는 쌍낙관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추사가 이 대구에 담긴 그런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추사도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서 썼을 테고,
주기 위해서 썼다면 받을 사람을 밝히는 쌍낙관을 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작품에 쌍낙관을 하기는커녕 이름이나 호도 쓰지 않고
달랑 도장만 두 개 찍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게다가 찍은 도장도 문제가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의 낙관 도장이
찍힌 자리 아래쪽에 원래 도장을 찍었다가 지운 자국이 불그레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점선 원 부분) 처음부터 추사가 쓴 작품이라면 도장을 찍었다가 지우고
그보다 위쪽에 다시 찍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설령 도장을 찍은 위치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찍은 도장을 애써 지우고 다시 찍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중국이나 한국 서예사를 돌아보면 시대에 따른 작품의 형식 변화도 다양하다.
對句의 문장을 쓰고 쌍낙관을 하는 형식의 대련 작품은
중국에서도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추사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한 새로운 형식의 대련작품을 추사가
조선 서단에 받아들여 선구적으로 선보인 것이다.
따라서 추사의 진품으로 확정할 수 있는 대련 작품에는 어김없이 쌍낙관이 있거나 협서(脅書)가 있다.
그런데 이작품은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쌍낙관이 있어야 할 글임에도
쌍낙관이 없는 데다가 도장을 찍었다가 지운 흔적이 너무 역력하기 때문에
필자는 추사의 작품이라고 확정하기를 보류하고 ‘전(傳)추사’ 작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전북일보 최종수정 : 2011.08.30 19:0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