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3: 30 흥하는 자와 쇠하는 자 - 요 3: 34 하나님이 보내신 자.
요 3: 30 흥하는 자와 쇠하는 자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세례 요한은 또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이며 자신은 사명을 다했으므로 쇠해지고 사라져야 할 자임을 고백한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직분자와 봉사자에게 본이 된다.
직분자는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하며 또 다른 이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아 그를 격려하며 그의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1]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 막 1: 14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눅 3: 18-20 – 18 또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인식한 선지자 였다. 그러므로 자기의 제자까지도 예수에게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지 말고 그에게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시기와 교만, 미움과 다툼은 무서운 악이다.
5. 하나님의 아들 예수 ( 3: 31 – 36 )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앞의 3: 1-21절까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번 요약되어 나타난다. 3장은 2장에 대한 해설이다. 2장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 즉 청결의 예의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성전을 청결하게 함의 사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표적이다.
이 두 개의 표적성을 해설한 것이 3장이다. 청결의 예의 물과 성전은 유대교이다. 이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니고데모도 포도주 떨어진 잔치와 같다.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다. 기쁨이 없다. 타락한 성전에서의 예배 등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주신 성령 윗세상의 힘에 의해서 유대교도 가장 고상한 유대교의 대표도 새로 나야 한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 축복 새 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예수가 이것을 가능케 하느냐? 하늘에서 온 자이기에 하늘의 것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서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해설이 계속된다. 3장은 가장 고상한 유대교 우리 인간 지성의 가장 고상함, 우리 인간 종교성의 가장 고상함 등으로 인간 가능성의 최대한 발휘로는 신적인 삶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요 3: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 -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라고 증언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은 땅이나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신적 인격이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미 증언했었다(요 1: 34).
예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다. 그는 그 근원과 본질,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다. 그는 단순히 땅 위에 사신 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단순히 한 훌륭한 인간 선생이 아니시고 위로부터 오신 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이, 만물 위에 계신 이이시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 요 20: 31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관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 눅 7: 28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러나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 되는 것이다.
2]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1) '땅에서 난 이'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
* 창 2: 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 땅에 속한 것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3]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
* 요 1: 30 -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마 11: 3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눅 7: 19 -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요 3: 32 보고 들은 것 -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가 보시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하신 내용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들, 그 어떤 인간 스승의 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1]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 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 요일 1: 3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2]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요 3: 33 증언을 받는 자 -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
* 요 12: 44-50 – 마지막 날과 심판 –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 요일 5: 10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언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2]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언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요 3: 34 하나님이 보내신 자 -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
1]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는 친히 하나님 아버지를 보시고 그의 뜻을 들으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간은 온 세상에 아무도 없고 인류 역사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증언하신 내용을 받는 자들이 없었다. 그것이 어두운 세상의 현실이었다.
2]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실상,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
* 골 2: 9 -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또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시는 영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하였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