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과 정주영은 한국 경제에 근간이 되는 사업을 구축하여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서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탁월한 사업 수완은 성공의 정상에 차별이 없음을 보여 주었다. 격변의 시기에 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이들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그 앞에서 이들은 오히려더 크게 일어나 굴지의 기업을 일구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과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병철. 촌구석에서는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 봐야 별 볼일 없다는 걸 깨달은 정주영은 몇 차례의 가출을 감행하며 다른 길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에 비하면 이병철에게는 유학의 기회도 있었고, 귀국했을 때에도 요정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시작부터가 달랐던 셈이다. 시골에 처박혀 있던 정주영은 그저 맨주먹이었던 데 비해,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을 다니며 국제 정황을 살필 수 있었고, 일단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사업 자금을 물려받고 있었다. 이병철은 처음부터 투자라는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정주영으로서는 뭐든지 일단 부딪혀 배우면서 일을 벌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생존 방식이었다.
■ 실패 앞에서 더 크게 일어선다
정주영은 사람이나 화물을 운송하는 차와 배, 그리고 이것들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항구와 도로를 만들었다. 이병철은 사람이 입는 것, 먹는 것, 그리고 생활의 편의를 위한 가전 제품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정주영이 뭘 지어 놓으면 이병철은 그 안에서 쓸 것을 만든 격이다.
정주영은 감각적인 판단에 따라 새로운 일을 만드는 스타일이고, 이병철은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여 신규 사업에 착수하곤 했다. 정주영이 자동차 수리소를 시작하게 된 것은 쌀가게 단골 손님의 추천 때문이었고, 자동차 수리 대금을 받으려고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훨씬 많은 돈을 받는 것을 보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소를 시작할 때도 그저 큰 철판을 구부려 배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배를 움직이는 기계를 넣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누가 안 된다고 하면 “해보기나 했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하면 이병철은 설탕·의류·비료·반도체 사업 등을 계획하면서 온갖 정보를 다 수집하고, 각계 각층의 사람을 만나 자문을 구했으며, 또 숙고를 거듭했다. 어느 시점에 어느 사업이 가장 타당하고 수익성이 있으며 적절한 것인지 깊이 고려했다. 가장 나중에 뛰어든 반도체 사업은 무려 10여 년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 반면 일단 일을 시작하면 탄력을 받아 거침없이 진행해 나갔다.
정주영과 이병철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 그 스토리의 흥미진진함만 본다면 정주영이 이병철보다 많은 굴곡을 겪었다. 워낙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한 터라 정주영이 벌이는 사업은 하나 하나가 모두 드라마틱하다. 임기응변의 대가인 정주영은 유엔군측에서 유엔군 묘지 참배 행사를 할 때, 한겨울에 묘지에 파란 잔디를 깔아 달라고 하자 낙동강 근처의 보리밭을 퍼다 심어 주었다. 포드가 한국에 합작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을 때, 현대는 처음에 그 면담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결국 합작 상대로 선택되었고, 사상 최대의 공사라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에도 마지막 경합 상대로 간신히 끼어들어 결국 공사를 따냈다. 조선소를 건립할 때는 조선소를 지을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 한 장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배를 주문 받았다. 서산 방조제 물막이 공사를 할 때는 아무리 돌을 쓸어 넣어도 급류를 막을 수가 없자, 고철로 팔려고 사다 놓은 고철선(船)을 물막이 구간에 가라앉혀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에 비해 이병철은 단단하게 사업을 굳히는 스타일이다. 일단 벌여놓고 굳히는 정주영과는 달리, 굳힐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으면 뛰어들지 않았다. 물론 이병철이 하는 사업도 워낙 큰 투자 규모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저게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이병철은 사업 자금을 유치하고 공장을 세워 제품을 양산하여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입하기까지, 정주영처럼 무리한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정주영은 일단 사업을 벌이는 스타일 때문에 큰 적자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자동차 정비 공장이 잿더미가 되기도 하고, 큰 공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에 비하면 이병철이 겪은 실패는 전쟁이나 정치적 문제로 인한 것으로, 중일 전쟁이나 박정희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업상 큰 손해를 보았다. 실패의 양상은 서로 달랐지만, 실패 앞에서 이들은 결코 주저앉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실패를 거울 삼아 더 크게 일어나곤 했다.
■ 성공의 정상에는 차별이 없다
사업 스타일에서 보면 이병철은 치밀한 만전지계의 사업가였고, 정주영은 어떤 일이든 해낸다는 신뢰를 심어 주는 사업가였다. 연초만 되면 도쿄로 건너가 이른바 ‘도쿄 구상’을 하곤 했던 이병철은 일본에서 여러 방송 매체들이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 특히 그 전 한해의 경제 동향에 대한 총 결산과 신년 전망에 대해 일본의 저명한 석학이나 저널리스트들이 출연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 업계에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경제 담당 기자들을 식사에 초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흥미 있는 분야를 골라 대학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재계의 이름난 사업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신규 사업에 대해 구상하고,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를 몇 차례나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삼성의 심사숙고 스타일은 정주영도 인정한 바 있다. 한번은 반도체 라인 증설에 대해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정주영은 올라온 사업 계획서는 보지도 않고 이렇게 물었다.
“삼성은 어떻게 한대?”
“삼성은 설비를 늘리기로 했습니다.”
“그럼 됐어. 삼성이 오죽 잘 검토해서 투자하기로 결정했겠나. 우리도 설비를 늘려. 내일 당장 확장 공사를 착수해.”
정주영은 무엇보다 신뢰를 중시했다. 맨 처음 쌀가게에 취직해서 나중에 결국 그 가게를 물려받은 것은, 주인에게 보여 준 성실함 때문이었다. 이병철처럼 공장을 세워 뭘 만들어 팔기보다는 큰 공사 건을 따내고 처리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서비스 개념이 많이 포함되었기에, 일을 맡기는 상대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낸 적자는 무려 20여 년에 걸쳐 상환해야 했을 정도로 큰 것이었지만, 그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일을 마쳤다. 이로써 정부에게 큰 신뢰를 얻어 다른 공사를 유리하게 수주하게 되었다.
유엔군측의 참배 묘지를 보리밭으로 푸르게 만들어 준 일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문할 숙소에 수세식 화장실과 난방 공사를 신속하게 처리해 준 일로 미군의 신뢰를 얻어 미군의 많은 공사가 정주영에게 넘어왔다. “당신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신용만 얻어 놓으면 돈은 어디든지 있다”고 그는 말했다.정주영과 이병철은 판이한 환경에서 자라나 한국 최고의 두 기업을 일구어, 성공은 특정한 장소에서 싹을 틔우는 어떤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그들은 도전·열정·꿈을 거름 삼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갔고, 그 결과 그 누구도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큰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 이병철(1910~1987)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일제당·제일모직·삼성전자 등 서른 일곱 개의 기업을 세우거나 인수했다. 쌀 300석 규모의 유산으로 시작한 그의 사업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어져, 100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한 기업 왕국으로 거듭났다.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운(運), 둔(鈍), 근(根)이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어 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 정주영(1915~2001)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 굴지의 대그룹을 일으켰다. 현대 그룹의 총수로 여든 세 개 기업을 일으켜 세계적인 회사로 키웠다. 소 판 돈으로 가출했던 그는 500마리 소떼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어 대북 교류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주인의 신뢰를 얻어 쌀가게를 물려받았고, 믿을 만한 청년이라는 신용 하나로 자금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으며, 상품에 있어서의 신뢰, 모든 금융 거래에 있어서의 신뢰, 공급 계약에 있어서의 신뢰, 공기 약속 이행에 있어서의 신뢰, 공사의 질에 있어서의 신뢰, 그 밖의 모든 부문에 걸친 신뢰의 총합으로 오늘날의 ‘현대’를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