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게 읽은 시]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마광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ㅡ마광수.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시집『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민족과 문학사, 1991)
■ 브레히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의 각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시인이 1977년 국내 상영된 <바람과 라이온>이란 영화의 한 장면에 시선이 꽂히고 영감이 가지를 뻗어 얻은 작품이다. 20세기 초 모로코 왕이 노예들을 의자 대신 깔고 앉는 영화장면에서 시인의 마음속에 잠재된 권력욕구와 그것을 부정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민주주의 의식이 양가감정으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한 마광수 교수의 리버럴한 솔직함과 삐딱하게 훑어나가는 독특한 비판의식이 더해져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 묻고 자괴감에 빠진다.
마광수 교수가 시에서 말한 갈등과 고뇌는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머리로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권과 평등을 주장해도 가슴 한쪽에 똬리를 틀고 있는 얄궂은 성욕과 얄미운 욕정과 이상한 쾌감과 서글픈 동경이 뒤엉켜 꿈틀댈 때가 있다. 위선과 허위라 해도 사실상 보통사람들에겐 그 심사를 간섭하거나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윤리의식은 좀 달라야 한다. 지성의 균형이 허물어지면 자칫 여러 사람이 눈물 흘리고 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지체 높은 사람에게 언동의 조심과 겸손을 요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백여 년 전 북아프리카 모로코 주재 미영사관에 말을 탄 현지 부족전사들이 기습해 영사관직원을 마구 찔러죽이고 영사를 납치했다. 이들은 미국정부를 향해 자국 내 모든 미국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당시 미 대통령은 이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모로코 연안으로 함정을 파견하는 등 강경 대처하여 마침내 영사가 풀려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영사 대신 미모의 영사부인을 납치한 것으로 스토리를 바꾸어 부족장과 영사부인 사이의 로맨스를 엮어 영화화한 것이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이 주연한 <바람과 라이언>이다.
나도 군 생활할 때 마지막 휴가를 나와 본 영화라 아직도 몇 장면은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부대장 따까리(공관사병)를 하던 후배사병이 모처럼 휴가를 얻어 함께 고향인 대구로 와서 자투리 시간에 같이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영화관람 후 그에게서 따까리 생활의 이런저런 고충을 들었음에도 그땐 솔직히 그의 ‘민간 생활’이 부러웠고 그를 최고의 보직이라고 추켜세웠다. 아이들의 과외를 맡아 가르치고 ‘사모님’을 대신해 시장을 봐주고 김장을 돕고 과일을 깎은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대생활에 비해 덜 괴로웠고 책 읽을 시간도 있고 해서 좋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당시 부대장은 박찬주 보다는 나았던 모양이다.
훗날 내 두 번째 직장에서 근무할 때 조중훈 회장의 부암동 사저에서 일하던 집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선물로 들어온 세계도처의 진귀한 과일들이 창고에서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그 과일들을 나무 밑에 파묻으란 지시를 받았다. 머슴들로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사는 조심스럽게 사모님께 여쭈었다. “버리시기 전에 저희들께 나눠주시면 고맙게 얻어먹을 텐데요...” 사모님이 말씀하시기를 “집안으로 들어온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주는 법이 아니라네, 더구나 아랫사람들에게 돌리다니 무슨 그런 당치않은...” 지청구를 듣고서야 자신의 신분과 분수를 얼른 자각했다고 한다.
인류역사는 끝없는 권력투쟁의 역사다. 부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가진 자들 간의 다툼으로 민초들은 편할 날이 없었다. 인간은 본디 불평등에서 오는 비굴함을 참지 못하는 성정이 있다. 역사에서 민중들은 늘 ‘평등’을 위해 싸워왔고 지금도 싸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그들의 겸손이고 박애정신인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 혁명에서 민주주의 대원칙으로 내세운 정신이기도 하다. 장발장의 도둑질에 뺨을 후려치지 않고 선으로 갚은 신부님의 행동은 그를 감동적인 박애주의자로 거듭나게 한 계기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와 영화제목을 설정케 한 마지막 장면이자 영화의 핵심 언어라 할 수 있는 이런 대사가 생각난다. 우방 미국을 보는 우리의 상념일 수도 있다. "당신은 스쳐가는 바람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자 같은 존재다. 당신들은 목적을 이루면 떠나가겠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이 땅을 지키다 죽는다." 그리고 바람이 모든 걸 휩쓸고 가버린 뒤 바다를 향한 호탕한 웃음이 오랫동안 가슴에서 메아리로 퍼졌고 머리에서 공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