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효실이 남편인 배우 최무룡(35)과 배우 김지미(23)를 간통혐의로 고소해 연행되는 과정에서 각각 한쪽씩 수갑을 차고 웃고 있는 사진
강효실은 아들 최민수를 출산한지 10일 밖에 안된 상태
십오년동안 나는 삶보다 죽음의 길을 더 많이 생각했다. 남들이 한창 살아야지 할 때 살때 나는 왜 죽지도 못하나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아니 무대에 서 있는 한 순간만 빼곤 죽어 있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당할게다. 연극을 하는 그때 이외엔 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잃었을때 난 나도 잃어버렸다. 내가 잃어버리지 않은 건 연극 뿐이었다.
연극 만이 나를 버리지 않고 내 목숨을 잡아 주었다. 그 기간은 내게 있어서 사는 것과 연극 2가지 모두 수련 시대였다.
나는 연극을 하던 아버지 강홍식 과 눈물의 여왕이라 불리는 어머니 전옥 사이에서 맏딸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 뒤로 나와 남동생은 셋을 나온 후 두분이 이혼 하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헤어져 아버지하고 하고만 살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 재주를 인정, 후계자로 키워주기 시작했던 아버지 밑에서 내 어린시절은 신나고 행복하게만 했다. 우린 집에서 가정극을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특별 수련을 받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아역 때부터 평양에 있는 국립극장에 서는 행운도 만끽했다. 이렇게 어려움이라고 없이 연기 생활을 시작했던 내가 아역이 아닌 정식 배우로써 첫 데뷔를 한것은 번역극 '외과의 크레췌트' 에서였다.
1950년 625는 내게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남겨둔채 어머니를 찾아 남하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때는 월남했지만 아버지와 동생들은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
남으로 내려오자 어머니 인기는 이북에서 듣던대로 완전히 정상이었다.그때 어머니 전옥 여사는 백조라는 악극단을 이끌고 있었다.
난 얼마간 백조의 속해 있었으나 곧 극단 신협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협으로 옮긴 후에는 나는 단원들과 함께 피난 중에도 공연을 계속했다. 당시 우리가 공연하는 작품은 맥베드였는데 맥베드 부인 역에 황정순씨가 열연 했고 나는 거기서 맥베드 부인의 시녀역을 맡았었다. 영화가 생기기 전에 연극의 인기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래도 연극인들은 모두가 가난했지만 모두들 정말 열심히 했고 관객들도 연극 단원들 존경 했었다.
모두들 가난한 가운데 유독 나만 넉넉했었다. 엄마 덕분이었다. 난 지방 공연할때마다 트렁크 밑바닥에 돈을 잔뜩 가지고 가서 말단 단원인 주제에 동료 단원들의 물주노릇을 톡톡히 하곤 했다.
극단 신협 당시 신협의 멤버는 이해랑 박암 김동원 장민호 황정순 백성희 박상호 당당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국내 연극계에서 단역 탑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나를 십오년동안 죽음보다 더 심한 증오와 저주의 고통 속에서 살게 했던 사람을 만났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습고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에 내 나이 겨우 21 살이었다. 사랑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주위에 반대 같은 건 도무지 문제 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같은 신협의 단원이었던 최무룡씨와 결혼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들의 결혼 기념으로 어머니는 공연 극장 이라는 극단을 만들어줘서 주셨다. 하지만 몇 작품을 못하고 망해버렸다. 사람을 다를 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21살 최무룡씨가 25 살이었으니 두 사람 다 단원을 이끌고 나가긴 너무나 나이 어렸던 것이다.
결혼을 한 후에 난 연극을 못하게 되었다. 남편은 만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더 중요한 일이 눈앞에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만은 않았다.
남편은 4대 독자 였다. 내게 있어 아들은 낳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수행 해야 할 의무였다. 아니 의무였다기보다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 나서 첫번째는 아들을 낳고 다음엔 딸을 낳고 그렇게 아기는 둘만 낳으라라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첫 아이는 딸이었다. 걔다가 며칠 있다가 죽고 말았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아이를 가졌고 또 딸을 낳았다. 세번째도 네번째도 계속 딸만 내리셋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난 굉장히 난산을 하는 편이여서 아이를 나올 때마다 죽음을 각오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생명은 하늘의 내 맡긴 채 아이 낳는 일을 계속 했던 것이다. 결혼후 10년간 계속 배만불러 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아이를 낳는 일이 뜻대로 안됐다. 당시 한창 붐이 일었던 영화 제작에 손을 됐던 남편은 계속 실패 만 했다. 유전의 애수, 잃어버린 청춘.. 제작한 작품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 우린 커다란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었다.
그 난리통에서 난 마침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그런 아들을 낳은 기쁨은 아랑곳도 없이 난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휘말리게 되었다.
이혼이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병석에 누워 남편과 여배우 K 모씨를 고소 할 때까지만 해도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어쩌면 고소도 내 뜻이 아니었다. 남편이 그 여자가 가까이 지낸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일로 인해 이혼을 한다니 지금도 난 그때 우리 두 사람이 만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중간에 중재하는 사람들을 놓았던 일을 후회한다. 남녀간의 애정문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걸 뒤에 절실히 깨달았지만 그땐 일이 이미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는 연일 매스컴과 주간지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는 철창에 보냈다는 이유로 내뜻과는 전혀 다르게 이혼이라는 막다른 길까지 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나는 완전히 사는 것 하고는 멀어져 보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아들에게 젖을 물려 보지도 못한 채 난 병원에서 들어와 죽는 일만 생각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까지 뺐긴 내가 살아서 무엇하랴 그런 생각에서 얼음 먹고 벽에다가 머리를 깨어지라며 부딪히고 몸부림을 쳤다. 난 삶이 나를 저주 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이혼은 곧 죽음이라고 여겨졌다. 어려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었던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맹세했었다. 그런데...게다가 난 늘 누군가의 보호 아래 살아왔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살 자신 없었다.
이 때부터는 오직 연극과 죽으려 매달렸다 동맥을 끊으려 했던 게 세번 약은 수도 없이 먹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엉뚱한 사람 의 도움으로 죽지 못하고 다시 살아났다. 죽음까지도 나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내 이후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어머니가 결국 그일로 수년 동안 앓으시다가 69년 시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일을 이야기 하면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은 웃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15 년간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건 기도도 중에 일어난 일이있다.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이 심장병 위계양 신장염 간경화 등 병이란 병원 몽땅 앓고 있었던 내가 내가 기도 중에 갑자기 건강해진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길고도 긴 수련 시대를 거쳐 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KBS TV 의 일일 연속극 박달선생의 타이틀 롤과 유도 경식아 연출했던 연극 뭘로 네분의 회갑 기념 공연 유리 동물원에의 아만다 역을 맡아 연습중 쓰러진 것이다.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네 심장은 멎었고 주위 사람들은 장례준비를 했다 13년 동안 투병생활을 계속 해온 터라 나도 내 상태가 목숨이 위험한 정도임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 의식은 잃지 않았기 때문에 난 죽음앞에 앞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차츰 차츰 호흡이 정상으로 되면서 공처럼 부풀었던 몸이 서서히 가라는 게 아닌가. 완전히 새 몸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날아갈듯이 가벼워졌다. 난 이때 순교자의 마음을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 1년 나는 연극도 집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 했다.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외에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 또한 일종의 시련이었다. 내가 살아왔던 생활 그리고 또 앞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활이 전도 와 함께 연극이란 사실을 깨닫는데 1년의 진통을 겪었던 것이다. 1년 동안 싸움을 거쳐 내가 처한 자리에서 충성을 하라는 성경 말씀을 깨우쳤다.
하지만 이때까지 내 맘 속에 있는 옛 남편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욕구와 활기 , 의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암이었다. 그에 대한 증오는 여전히 문득 문득 내 맘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러던 중도 한번에 기적이 일어났다 철야 기도를 하던 중 그를 용서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그리곤 용서 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에 대한 질문과 사랑과 동정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 그를 불쌍히 여기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 하는 내 마음은 평화롭고 내 얼굴은 기쁨에 차게 되었다.
그래도 고2때 처음 만나서 돌아가실때까지 아들이랑 며느리랑 잘 지내신듯
최민수 주연 영화에 엄마역으로 특별출연도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