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해 임회(1562~1624)
임회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임만근林萬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준林晙(?~1548)이고 문천으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4남매 중 넷째인 아버지는 형조좌랑으로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이며 어머니는 이진남李震男의 딸이다. 둘째 숙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임정수의 형은 금호 임형수林亨秀(1514~1547)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체구가 크고 어려서는 총명하고 스스로 언어를 깨우치고 문자를 해독했었다. 자라서는 시문을 잘 짓고 가는 곳마다 이름을 날렸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일찍이 1582(선조15)년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선조26)년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는 평택 임씨 세거지.
[명칭 유래]
조선 시대 이 지역은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로 불렸다. 현재의 북구 화명동의 상징인 화산은 신선덤이라는 암봉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형상이 신선이 누워 있는 것같이 보여 와석(臥石)이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화산의 묏부리라는 뜻으로 화잠(華岑)이라 개칭하였다. 화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화잠 마을로 불렸다.
[형성 및 변천]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고려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중 화명동 와석리에 자리 잡은 평택 임씨 문중의 입향조는 임회(林檜)로, 17세기 초반인 1613년(광해군 5) 당파 싸움으로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양산[현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유배되어 10년간 지내면서였다. 임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 인물 편에 보면 임회와 함께 6세손인 임경택(林景澤)이 나온다. 낙동강변의 적석(赤石) 암벽에는 ‘조대 주인 임경택(釣臺主人林景澤)’이란 글자를 새긴 조대(釣臺) 유적이 전승되어 임씨 문중의 발자취를 증명하여 준다. 이 문중 인물로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임봉래(林奉來) 등이 있다.
[자연 환경]
북구 화명동 화잠 마을은 주산인 화산 아래 자리 잡은 자연 마을이다. 화산의 동쪽 파류봉을 거쳐 금정산성으로 가는 옛길이 남아 있고, 북쪽으로 용동골을 끼고 대천리와 접경하며, 서쪽 낙동강변 쪽은 전답이 펼쳐져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북구 화명동 화잠 마을에는 평택 임씨 광해공파 화명 문중 재실인 관해재(觀海齋)가 있으며, 평택 임씨 20가구가 살고 있다.
1) 임회 연보 (1562∽1624)
1562(명종 17년) 전라도 나주 송형 출생 아버지는 형조좌랑으로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이며 어머니는 이진남(李震男)의 딸이다. 둘째 숙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1567(6세) 글을 배움
1569(8세) 백형 송파공(松波公)을 따라 학문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났고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는 평을 들음
1582(선조 15년) 성균관 입학 뒤 생모 이씨, 생모 이부인 상을 당함
1584 생부 승지공 상을 당하였고 탈상 시 부친 좌랑공 상을 당함
1589 7년간 거상(居喪) 상례를 치름
1590(선조 23년)29세 송강 정철의 따님과 혼인. 영일정씨 사남삼녀 막내 딸(생부 승지공과 8년전 언약 약혼을 맺음)
1592 매헌공(겸익)겸복兄과 금성(나주) 임회를 찾아 배움을 청함
1593(선조26)년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1609 송강 둘째 아들 송강 선생 관작 복직 상소
1611(광해군 3년) 50세 대과에 급제 성균관전적으로 제수
1612 황해도 옛집으로 돌아가 관해(觀海)라는 자호로 자연 벗삼아 세월
1613(광해군 5년) 다시 전적으로 임명 치제관(致祭官)으로 장연에 갔으나 이듬해 이이첨, 정인홍의 무고로 양산에 유배하자 매헌공이 임회를 찾아 유배생활 보필하면서 학문 정진함.(子임득붕은 곤양에 유배)
1623(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해배(解配)된 후 예조좌랑에 제수되고 다시 군기시 첨정으로 전직.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 수축
1624(인조 2년) 63세 이괄의 난이 일어나 민병 수백 명을 데리고 싸우다 붙잡혀 전사하자 임금이 정려를 내리고 순천 모후산에 장례를 치르고 광주 등림사에 제향되었다.
1611년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옛집에 돌아와 스스로 호를 관해라 하였다.
161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제관으로 장연(長淵)에 갔었는데 이듬해 이이첨, 정인홍의 모함으로 임서,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양산에 유배되고 아들 임득붕林得朋은 곤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정랑에 복직되었으며 군기시첨정을 거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을 독려하였다.
1624(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 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반군에 잡혔다.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이괄을 꾸짖다가 혀를 잘려 전사하였다.
임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68년(고종 5) 나라에서 내린 정려가 있다. 정면·측면 각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정자로, 1939년 중수되었다. 관련자료로는 1939년 기록된 '관해선생 정려 중수기'가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송현마을에 있다.
저서로는 관해집觀海集 1권이 전해지며 사후에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