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산행 안내
o 일 시 : 2024년 3월 9일(토) 10시30분
o 산행지 : 남산 순환도로 둘레길
o 출발대기 : 충무로역 3번 출구(4호선) 대합실
o 점 심(장소 / 시간) : '평안도 족발'(T02 2279 9759) / 12시 30분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3번 출구 → 70m
★ 찬조 : 김경인, 이영애 여사
o 참가비 : 10,000원
★ 회장 특별회비(발전기금) : 김노성 회장 200만원
★ 연회비 계좌 : 우리은행 1002- 364-780706
※ 충무로 역에서 출발, 남산 한옥마을 경유, 잠시 한옥마을 관람 후 남산순환도로 둘레길
진입 코스로서 2시간 정도 소요.
※ 남산 한옥마을은 옛 수도경비사가 위치한 곳에 구한말 문화재로 등록된 고관들 한옥
5개동을 옮겨온 것으로 1998년 공식 개장하였으며, 후면에는 서울 천년 타임캡슐 광장과
남산 국악당 등이 있음.
* 남산골 한옥마을(클릭)
* 음식점 안내지도
'안개낀 장충단 공원'
이 노래를 들으면 가사가 그림, 시 같아 차분하고 적막감 있는 자욱한 공원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번 토요일(9일) 남산길 돌고, 혼자가 아닌 어럿이 장충단 공원 길을 따라 내려와 장충동 족발집
에서 옛날을 이야기 하며 즐겁게 식사합시다.
배호~안개낀 장충단공원 (67)(클릭)
진해성 - 안개낀 장충단공원 (클릭)
나운도 - 안개낀 장충단공원(클릭)
장충단의 굴곡진 역사(요약)
장충단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어떤 이에게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는 옛 노래가, 또 어떤 이에게는 배구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이,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장충동 족발 골목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서울시 중구의 장충단 공원은 남산 동북쪽에 자리한 시민공원이다. 이곳이 공원으로 조성된 시점은 일제강점기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대한제국 시절에 만든 국가 시설, 제단(祭壇)이었다.
‘충성을 장려하기 위한 제단’이라는 뜻을 가진 장충단은 1900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한양도성의 남쪽을 방비하는 남소영(南小營) 근처에 조성한 장충단은 순국한 군인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현충원이었다.
장충단 공원은 현재 동국대와 신라호텔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조성 당시 장충단 부지는 남산 동북쪽 자락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지금의 장충단 공원뿐만 아니라 국립극장, 반얀트리 호텔(옛 타워호텔), 남산 자유센터, 그리고 신라호텔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옛 장충단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는 현재 비석만 남아 있다. 비석 전면의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뒷면의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썼다.
1900년에 완공된 장충단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909년 가을 제사를 끝으로 더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1910년부터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이 자기 나라에 맞서다 전사한 식민지 군인들을 위한 제사 시설을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충단 시설들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비석은 뽑히는 등 수난을 겪는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며 순국한 조선군을 제사 지내던 장충단은 훼손된다. 그 시작은 1909년 11월에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이었다. 그 후로 일제는 장충단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사장으로 쓴다.
기록을 보면 1910년대에 장충단 터에서 일본군의 기마 훈련과 사격 훈련이 이뤄졌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과 일본 군대를 위한 대규모 종교 행사들과 조선 시대 과거를 본뜬 백일장이 열리기도 했다고.
군사 훈련이든 종교 행사든 장충단 영역이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이벤트에 걸맞은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만든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4월에 경성부는 장충단과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던 훈련원을 공원으로 조성한다고 발표한다. 삼일운동 직후라 식민지 시민들을 위무하고 국가 정신의 상징이었던 곳을 파괴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연구자들은 해석한다.
남산 자락이라 수목이 울창했던 장충단에는 1920년대 초부터 공원 시설이 들어서며 훼손되기 시작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새로 닦은 산책로가 15리, 운동장이 2곳, 활쏘기 터가 1곳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공중화장실도 설치했다고.
이때부터 장충단은 순국한 군인을 기리는 현충원에서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장충단 공원'으로 정체성이 바뀌게 된다.
공원으로 바뀌며 훼손되기 시작한 장충단은 한 사찰이 들어서며 원래의 목적은 물론 모습까지 크게 달라진다.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불교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 영역에 세운 것이다.
사찰 이름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즉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일자와 같다. 자료에 따르면 낙성식에 일본 측 인사는 물론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친일 인사 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박문사의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정신적 결합’을 이상한 방법으로 실천했다.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다. 그리고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총독부가 의도한 ‘결합’은 식민지 시민의 저항심을 억누르고 과거 흔적을 파괴하는 거였다.
해방 후 박문사 건물은 철거된다. 6·25 전쟁으로 부속 건물도 파괴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자리에 해외 국빈을 위한 숙소인 ‘영빈관’을 세우기로 한다. 최초 계획은 1958년에 마련했고, 실제 건축은 1964년에 시작해 1967년에 완공한다. 전통 한옥 양식의 고급 호텔이었다.
하지만 국가 기관이 운영하던 영빈관은 운영이 힘들었고 결국 민간 기업에 넘기게 된다. 1973년 국세청은 영빈관과 인근 국유림을 공매에 내놓는다. 공매 대상은 모두 국유 재산으로 연건평 1,097평의 영빈관 건물과 중구 장충동2가 임야 27,600평, 집기와 비품류는 물론 관상수 4만여 본으로 구성되었다.
장충동2가는 장충단 공원과 한양도성 구간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결국 공매 물건은 공개입찰을 통해서 삼성그룹이 낙찰받는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다른 기업도 입찰에 참여했지만 형식에 불과했다고 한다. 삼성그룹과 정부 간 조율이 있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인 신라호텔이다. 다시 말해 신라호텔은 대한제국 시절 현충원이었던 장충단 부지 안에 들어선 것이다. 신라호텔 또한 경희궁에서 옮겨온 흥화문, 박문사가 정문으로 사용했던 조선 시대의 유적을 호텔 정문으로 사용한다. 흥화문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는 1974년이고, 경희궁의 현재 자리로 옮겨간 해는 1988년이다.
그 후 신라호텔은 흥화문을 본뜬 문을 만들어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판에는 ‘영빈관’이라 쓰여 있다.
현재 장충단 공원에 남아 있는 옛 장충단의 흔적은 비석뿐이다. 1900년에 장충단 비석을 처음 세울 때는 장충단 동편 언덕, 즉 지금의 신라호텔 부지 안에 있었지만 고초를 겪게 된다. 한일합병 후 일제가 장충단 비석을 뽑아 버렸고, 해방 후에야 비석을 찾아 원래 자리에 다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장충단 비석 근처가 호텔로 개발되자 1969년에 또 다시 뽑혀 장충단 공원 안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이렇듯 장충단 일대는 처음의 설립 취지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 되었다. 해방 후 장충단 일대는 미 군정 귀속 재산, 즉 적산이 될 뻔했지만 시민공원이었던 이유로 국유지로 남게 되었다. 만약 적산이 되었다면 권리를 주장하는 민간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장충단 일부 영역을 공원 부지에서 해제한다. 그리고 호텔과 자유센터 등을 건축해 국가가 직접 운영한다. 결국 그 시설들은 민간 기업으로 넘어간다. 이렇듯 장충단 영역은 쪼개져 국립극장과 자유센터가, 그리고 타워호텔(지금의 반얀트리 호텔)과 신라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신라호텔 바로 옆으로는 한양도성이 지난다. 그 순성길 초입에 들어서면 작은 글씨로 쓰인 작은 표지판이 있다. 산책로에서는 읽기 어려운 글자 크기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 서울클럽, 민주평통 부지를 지나는 길이므로 조용히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한때 국가 시설이었고 시민이 공유하던 공간이 누군가의 재산이 되어버린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원전(原典) : [도시탐구] 장충단의 굴곡진 역사, 박문사 그리고 최고급 호텔
- 작성자 :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