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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El-Kerak
모압 석비
모압 석비의 발견 과정
1868년 여름, 독일인 의료선교사 클라인(F A Klein)은 사해 동편지역을 여행하던 중 '디본'을 지나게 되었다. 디본에서 그는 고대 석비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랍인의 안내를 받아 그 석비를 보게 되었다. 선교사 클라인은 성경 고고학 자료 중 매우 가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석비를 직접 보았던 최초의 서구인자,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석비를 본 유일한 서구인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주재하고 있던 독일 영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은 곧 독일로 전달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중동 지역의 역사적 유물을 수집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까닭에, 독일이 석비 구입에 큰 관심을 보이자, 디본의 주민들은 엄청난 값을 요구했다. 오랜 흥정 끝에 값이 결정되어 막상 석비를 이동하려고 했을 때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디본 주변지역 아랍인들이 자기 마을로 석비가 지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은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독일측은 일단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에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청년 클레르몽 갸노(Clermont - Ganneau)라는 프랑스인이 있었는데, 그는 고대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디본에서 발견된 석비 소식을 듣고 아랍인 친구를 그곳에 보내어 석비의 탁본을 만들었다. 한편 독일 영사는 석비 운반이 어렵게 되자, 그 지역을 관할하던 오토만 터키 총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총독은 군대를 동원해 석비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디본의 아랍인 주민들은 석비의 가치를 알지 못해 단순히 돈벌이 감으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돈벌이가 될 석비를 총독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했다. 그들은 석비를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달궈진 석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해서 소중한 고고학 자료가 되는 석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석비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측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인 클레르몽 갸노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구입해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57개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성공, 이것들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가 모은 조각은 전체의 약 3분의2 분량이다. 나머지는 찾지 못해 영원히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이 석비가 파괴되기 직전 탁본을 뜬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프랑스는 57개의 조각을 맞춘 다음 탁본을 근거로 나머지 부분을 복원했다. 지금 이 석비는 루브르 박물관이 귀중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요르단의 몇몇 박물관에 그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모압 지역의 중심도시 디본에서 발견된 석비는 '모압석비(Moabite Stone)' 라고 부른다. 또 석비의 내용이 모압의 왕 메사의 전승 업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메사 왕 석비(Mesha Stele)' 라고도 부른다. 이 석비는 기원전 840년경에 만든 것으로, 높이 115cm, 폭이 68cm의 검은 현무암에 34줄로 고대 히브리 문자(Paleo-Hebrew) 1천자를 새겨 놓았다. 이 석비가 발견된 후, 오늘까지 1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에서 발견된 구약시대의 문자기록으로서는 최장이어서 고대언어와 문자 연구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다.
석비의 주요 내용은 기원전 853-830년경 모압의 메사 왕이 당시 모압을 지배했던 북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모압의 메사 왕과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에 관하여는 구약성경 열왕기 하권 3장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사 석비와 구약의 기록은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압 석비는 구약의 기록을 보충-보완해 주는 자료로,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다.
메사 비문(모압 비문)
나는 그모스의 아들, 모압의 왕, 디본 사람 메사이다. 내 아버지는 30년 이상 모압을 치리 하였으며, 나는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나는 카르호에 그모스를 위한 산당을 마련하였다. 내가 이 성소를 세운 것은 그모스가 나를 모든 왕들에게서 구원해주고, 또 나로 하여금 그들을 이기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모스가 그의 땅에 대해 진노를 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오랬동안 지배하였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었으며, 그도 역시 "내가 모압을 지배하리라"장담하였다. 나의 임기 중에 그가 그처럼 호언했으나 나는 그와 그의 집안을 무찔렀으며, 이스라엘은 영원히 멸망하였다. 전에는 오므리가 마다바(메드바) 땅을 차지하여 그와 그의 아들의 임기 절반인 40년간을 그곳에 머물렀으나, 이제는 그모스가 그 곳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바알 므온을 건설하여 그 곳에 저수지를 두었으며, 카르야텐도 건설하였다. 가드 사람들이 아타롯 땅에 오래 거하였는데, 아타롯은 이스라엘 왕이 자신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나는 그 성읍과 싸워 이겼으며, 그 성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모스와 모압을 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우두머리 우리엘을 케리요스에 있는 그모스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샤론과 마카롯의 주민들을 그 성읍에 이주시켰다. 그모스는 나에게 "이스라엘이 가진 느보를 쳐셔 빼앗으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나는 야간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싸웠다. 드디어 그 성읍을 탈취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장정 7천 명과 부녀자까지 모두 아스달 - 그모스에게 예물로 바쳤다. 나는 그곳에서 야훼의 ...을 취하여 그모스 앞에 끌고 왔다. 이스라엘의 왕은 나와 싸우는 동안 야하스 성읍을 건설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모스가 그를 내 앞에서 쫓아내 버렸다. 나는 모압의 용사 200명을 거느리고 올라가 야하스를 쳐서 그 곳을 디본 지역에 예속시켰다.
나는 또 까로호(Qarhoh)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성읍 성벽을 쌓았다. 성문을 닫고 탑을 쌓았다. 그리고 그 곳에 궁전을 지었다. 성읍 안에는 저수지도 만들었다. 전에는 까로호 성읍 내에 물 저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주민들에게 말하였다. "각 사람은 자기 집에 물 저장소를 만들어라." 그리고는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시켜 까로호 성읍 내에 관개수로를 팠다. 나는 아로엘(Aroer)을 건설하고, 아르논 골짜기에 큰길을 내었다. 나는 황폐된 베제르…(Bezer…)를 다시 세웠다.
나는 모압에 예속시킨 백여 개의 성읍들을 다스렸다. 나는 ...와 마다바, 벧디블라덴(Beth-diblathen), 벧바알므온(Beth-baal -meon) 등을 세웠고, 그 땅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곳에 보냈다. 하우로넨(Hauronen)에는 … 이 살고 있었는데, 그모스가 내게 이같이 말하였다. "가서 하우로넨과 싸우라." 나는 내려가 내 임기 중에는 그모스가 ….
An Ancient Canaanite Tablet from Ugarit
우가리트 [Ugarit]
1929년 이래 프랑스 고고학자 C.F.A.셰페르 등이 발굴하여 5개 문화층(文化層)을 밝혔다. 그 결과 BC 4000년 이전으로 소급하나, 중요성을 띠게 된 시기는 BC 2100년경 청동기시대 중기부터이다. 즉, 청동의 정련(精鍊)과 해상무역을 통한 도시국가로 발달한 시기이다.
민족은 서(西)셈계(系) 아무르인(人)의 한 파인 가나안인이며, 정치적으로는 이집트 제12왕조 세력하에 있었다. 이집트 제18∼19왕조시대 페니키아에는 이집트 ·히타이트 ·미타니 ·아시리아 등 여러 세력이 미쳐서 국제관계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BC 15∼BC 14세기는 이곳이 가장 번영하였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쌓였고 신전 ·왕궁을 중심으로 밀집된 시가지로 만들어졌으며, 상공업이 발달하여 물자가 풍부하였다. 그러나 BC 1365년경 갑작스런 지진 ·화재로 파괴되었으며, BC 1200년경 ‘바다의 민족’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문화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집트 ·에게 ·서아시아 등의 문화가 교류하고, 금 ·은 ·청동 ·상아의 훌륭한 제품이 만들어졌다.
특히 많이 출토된 점토판문서(粘土板文書)는 중요한 구실을 하며, 수메르어 ·아카드어 ·후르리어 ·히타이트어 ·이집트어 ·우가리트어 등을 사용하였다. 왕궁문서고(王宮文書庫)는 설형문자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오리엔트 국가들 간의 정치 ·외교를 파악하게 한다. 또 신전지(神殿址) 출토품은 바알신(神) ·아나토여신(女神)에 관한 종교적인 서사시와, 왕 케레토와 아쿠하토의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설형문자 28문자로 된 최고(最古)의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전착하기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우가리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숭배하지 않은 많은 신과 여신들을 숭배했는데. 엘.바알.아세라.Anat그리고 아스타르테 로서 그중 바알과 아세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숭배했던 신이었다.
특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하므로 히브리 선지자들의 지탄을 받았다.아모스와 예레미아 선지자 (아모스6:7,예레미야서16:5)
Cuneiform Tablet쐐기 석판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으로 되어 설형문자라고 하며 쐐기문자라고도 한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人)이며, 수메르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우루크의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 발견된 회화문자였다. 발견된 문자의 수도 많은데, 현재 알려진 문자의 수는 약 1,000자에 달한다. 그 다음의 제므데드 나스르기(期)에서는 회화문자에서 설형문자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시에 표음화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 왕조시대에 이르면 설형문자는 일반화되고, 표의 · 표음문자가병용되었다. 바빌로니아 남부를 통일한 셈계의 아카드인들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아카드어語)를 표기하였다. 그로부터 표음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커지고, 표의문자의수는 줄어들었다. 아카드어는 제국 멸망 후에도 국제어로서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 등 셈계의 여러 민족들뿐만 아니라, 비(非)셈계의 ·후르리인 히타이트인 ·페르시아인들도 사용하였다(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 이들 중에서 페르시아의 설형문자는 자획(字畵)이 간략해지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되었다.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왕국의 설형문자는 자수도 30자에 불과하고, 완전히 알파벳화하였다.
설형문자는 BC 1세기경까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문자나 아람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중근동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고대 유적에 남아 있는 설형문자의 각명(刻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전반, 독일의 그로테펜트와 베히스툰의 3국어 병용비문(倂用碑文)을 단서로 한 영국 롤린슨의 연구로 먼저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계속하여 해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의 독에도 성공하였다. 설형문자의 연구는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와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각지의 박물관이나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점토판 문서들이 정리 ·해독(解讀) ·출판되고 있다. 문서 내용은 경제관계를 중심으로 정치 ·종교 ·문학 ·외교 ·천문학 ·수학 ·연대기 등 각 방면에 미치고 있다. 또한 함무라비법전을 비롯한 설형문자법의 연구도 추진되고 있다.
쐐기 문자의 석판은 고대 근동지역 전역에 걸쳐 퍼져 있는데.에블라어(북부 수리아로부터 셈어)엘람(이란지역)힛타이트(터기,인도,유럽어 족)등이다.위의 석판은 사업 문서인데 인감으로서 대용이다.인영각은 그들의 상거래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서명과 같았고 여기에서 발견된 석판들은 상거래에서 판매 수령수.무게,부피,등이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문학에서는 길가메쉬의 서사시와 하무라미 법전과 같은 대다수 석판들이 발견되었다.
Amman Citadel 암만요세
암만(암몬)은 현대 도시 요단의 옛날 Rabbath-ammon(암몬의 영토의 수도)사해의 북동에 위치하고 있다 아르논과 얍복강 사이에, 고대 이스라엘의 이웃들 중의 하나이었고 그들의 적들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신명기 23:3-6 과 민수기 22-24에 쓰여진 계정이 암몬족들의 관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유태인을 저주하기 위하여 발람을 고용하였기 때문에, 모압인은 주님의 회중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위의 석판은 Milkom 신(암몬족들의 신)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은사원의 주술문이다.
모압족과 암몬족의 유래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아내를 두고 두 딸과 함께 소알로 피신한 롯은 그 고장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이 무서워서 산으로 들어가 딸들과 함께 굴속에서 살았다. 하루는 롯의 큰 딸이 동생에게 말했다. (19:31-34)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그날 밤 롯은 딸들이 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언니가 먼저 아버지와 동침했다.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왔다 나갔는지도 몰랐다. 이튿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씨를 받자)”그날 밤에도 롯은 딸들이 준비한 술에 취했고 이번에는 동생이 아버지와 동침했다. 역시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왔다 나갔는지 몰랐다.
이리하여 롯의 두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큰 딸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모압(Moab)이라 했는데 모압이란 “아버지로부터 얻은 From Father”이란 뜻이다.
모압의 후손이 오늘날 모압족(Moabites)이다. 둘째 딸도 아들을 낳고 이름을 벤암미(Ben-ammi)라고 했는데 “나의 혈족의 아들 Son of My Kinsman”이란 뜻이다. 벤암미의 후손이 오늘날 암몬족(Ammonites)이다.여러분은 롯의 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당혹해 할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은 자기의 종족보존과 혼혈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이런 방법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일부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유대인들이 늘 미워하는 모압과 암몬족을 조롱하기 위해서 꾸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The Heshbon Ostraca 하스본 파편
고대 근동과 애굽 에서는 글을 남기거나 쓰기 위해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들을 만들어져 썼지만 비쌌다. 파피루스는 오직 애굽에서만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입해 써야했다.아주 중요한 서류들은 파피루스를 사용해 작성했다.종교적인과 문학작품과 중요한 계약서 중요한 서류.편지들이다.그러나 값이 비싸서 대중적이지 못했다.그래서 일반화 된 것이 값싸고 재료가 많았던 집필 재료를 사용하기 위하여 보다 일반화 된것이 점토판 이었다.처음에는 토기 석판에 잉크로 씌여졌지만 학교 수업들,편지 문서들.수령할 수 있는 문서들.행정 관리 문서들은 쐐기 문자로 씌여졌다.
이스라엘 요단에서 고고학 발굴로 성경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이번 사마리아(이스라엘 고대 왕국)
B.C8세기경 페니키아 사람이 헤브라이 사람에게 직접 쓴 서신이다.
B.C6세기경에 암몬족 사람에 의해 초서체로 씌여진 아람어다.
이 영수증에는 무거운 세금이 부가된(밀가루와 곡식) 영수필증이다.헤스본에 언급된
아모리 왕의 시혼(민21:16) 르우벤(민수기 32 : 37),(여호수아 21: 39)이스라엘의 자손과 지파, 그리고 모압(이사야 15 : 4 ; 예레미야 48 : 2) 그리고 성경과 관련이 있는 굴착한 저수지들, 수로들, 물탱크들, 그리고 많은 토기 파편을 포함하여 철기 시대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The Incirli Stela 석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