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역사자료관 인천향토사 강의 노트 2017.6.5.
인천의 근 ․ 현대 인물 50인
이 원 규
1.독립지사 우국지사
*유완무-1861년 서구 시천동. 백범의 인천감옥 탈출 도움. 백범보다 15세 연상. 백범의 본명 김창수를 김구로 개명해 줌. 을사년 만주 망명, 미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중심, 이회영 이상설과 해외독립기지론 전개, 용정 서전서숙 창립 등 활동. 1909년 만주 훈춘역 피살. 진실위원회 이범윤과의 알력으로 분석-이범윤은 복벽주의, 유완무는 공산주의.
*정재홍-1866 추정 서울 출생. 객주단체인 인천 신상협회회원. 1903년 우각리에 인명의숙(뒤에 천기의숙) 설립. 1907년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 일진회와 싸움. 6월 30이 서울 박영효 귀국 환영회 고관대작 1천여 명 . 암살하려다가 실패. <사상팔변가> 남기고 자결. 차남 종원(예명 정암) 중국인에게 이끌려 영어 배우고 일본 유학. 연극영화계 선구자가 됨. 1926년 진우촌, 원우전 등과 인천에서 연극운동
*심혁성-1888년 인천 계양 오류리 출생. 천도교 교인. 1919.3.24 황어장터 만세 시위 주도. 문학동 남동 월미도 시위로 확산됨. 복역 후에 비밀요원으로 임정 군자금 모금. 광복 후 풍산심씨 집성촌인 서구 백석동 이주 1958년 별세. 아들 한의사.
*윤웅념-1896년 황해도 재령 출생. 기독교인. 김마리아 탈출시키고 1919 상해 망명. 임정 교통부 참사관. 1923년 9월 18일 동아일보 경성 법원 재판 기사-윤웅념 27세. 인천 영종 대부 장봉 신불도 신출귀몰 군자금 모집. 12년 형 선고. 1926년 결핵 병보석 출감 만주망명.
2.정치가 행정가 법조인
*곽상훈-1896년 부산 출생. 조부와 부친 고관대작. 인천 이주, 경성고공 재학 중 부산 동래읍 3.1만세 시위 투옥. 경인기차통학생회 간부. 통학생회 야구단 한용단 창단. 1920년 신간회. 중국 망명. 광복 후 한민당 공천 탈락 무소속 출마 당선. 반민특위 검찰관. 2대의원까지는 이승만 지지.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후 대립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 1960년 4.19혁명 이후 개헌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 5.16정변 후 민주당 탈당 군사정부 지지.
*조봉암-1899년 강화 선원면 금월리 출생. 강화보통학교 농업보습학교 졸업. 3.1만세 시위 투옥. YMCA 중학부 인천 출신 박남칠 교유. 대동단 사건 다시 투옥. 강화 친구 유찬식 안내 게이오대학 전문부 유학. 자취생 김찬과 교유. 청년운동 지도자. 이후 공산주의 거물로 성장.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모스크바 공산대학. 공산당 만주총국. 상해에서 체포 복역. 광복 후 인천에서 활동. 건준 조직. 전향.
*장면-1899년 인천 화수동 출생. 답동성당 부설 박문학교를 거쳐 미국 유학 맨하탄대학 등 수학 법학박사. 1931년 서울동성상업학교 교장. 1946년 입법의원 정계 입문. 1948년 유엔총회 한국승인. 1965년 조병옥 등과 민주당 창당. 1957년 부통령. 1960년 내각책임제 국무총리. 1961년 군사정변으로 실각. 1966년 타계.
*김정렬-1907년 경기도 소래 출생. 보성전문 졸업. 1945년 판사 임용. 청렴한 법관. 1954년 제2대 민선 인천시장 당선 3대 무투표 당선. 도원교, 인천교, 인천역사,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조직.
*조진만-1903년 인천 출생. 경성법전 졸업. 1925 조선인 최초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1951년 법무장관. 1961년 대법원장 연임 4년간.
3.사회주의, 노동운동가
*이승엽-1905년 제부도 출생.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학교) 졸업(고유섭과 동기동창). 1919년 인상의 3․1만세 운동 주도 퇴학. 도쿄 세이코쿠(正則)영어학교, 경성 보성법률학교 수학. 1923년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 1925년 제물포청년회 집행위원장, 인천의 청년운동을 주도. 제1차 조선공산당 입당,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인천청년연맹, 인천무산청년동맹, 인천노동총동맹 조직. 1926년 '제2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복역. 석방된 뒤 활발하게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 조공의 거물로 커 갔으며 1932년, 1937년 검거되어 복역했다. 광복 후 재건파 조공 정치국원에 선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대리.『해방신문』주필. 1948년 월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사법상 역임. 1953년 8월 숙청.
*박남칠-1902 용동 출생.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고유섭․ 이승엽 동기동창). YMCA 중학(죽산 조봉암 동기생).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 특히 신흥우 목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접함. 내리교회에서 엡웟청년회를 이끌며 청년운동과 인천의 노동운동에도 참여. 부친 박삼홍의 정미업을 물려받아 크게 성장시키며 인천정미업계의 거물로 성장. 상공회의소 평의원과 인천미곡상조합장. 광복 직후 죽산 조봉암과 인천자치회를 결성. 건준(建準) 인천지부 결성을 주도.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은신해 있다가 우익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월미도에서 처형.
*김용규-강화 출생. 학력 불명. 미곡상과 객주업. 1926년 장석우와 함께 객주업체 내선상사(內鮮商事)의 이사로 참여, 1928년에는 정미업 회사인 강화흥업주식회사 이사. 인천식산사(仁川殖産社)의 회원, 해동사(海東社) 창립. 1927년 신간회 위원. 1929년 인천상공회의소 상무위원. 1943년 제4대 인천부회의원에 선출. 1945년 박남칠, 이보운, 권충일 등과 건준 인천지부 조직. 인천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9년 보도연맹 인천지부 간사장을 맡음.
*유두희-1901년 강화 출생. 영화학교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 않음. 동경에서 고학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역시 불명. 한용청년회, 제물포청년회 등에 참가. 인천무산청년동맹, 인천청년노동조합, 인천노동연맹,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 등을 주도. 인천 최초의 공산당 및 공산청년 동맹원으로 활동. 1930년 제4차조선 공산당으로 불리는 고려공산당청년회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 등 인천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서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활동.
*이보운- 배재고보 출신. 1925년 내리예배당 엡웟청년회가 창설한 내리소년척후대에 박남칠과 함께 지도자로 참여. 1945년 8월 18일 건준 인천지부 조직 참여. 인천시인민위원회 총무부장.
인천시 초대 시의원 선거 당선. 이후 경기민전 부의장, 1남로당 인천시위원장, 보도연맹 인천지부 조직부장. 한국전쟁 중 월북.
*권평근-1900년 강화 출생. 노동운동가이며 항일운동가. 강화 합일초등교와 배재학당 수학. 일인들이 작성한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926년 11월, 중국 광동 중산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기록. 1919년 강화에서 3․1 만세 시위, 1921년에는 고향 양도면 조산교회에 조산엡웟청년회를 조직해 의사부장을 맡아보며 청년 활동.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 환영하던 중 일본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보안대원 이근우(李錫雨)와 함께 사망.
4.교육자 학자
*강화석- 1845년 평남 중화 출신. 황해도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불란서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교인이 됨. 이듬해 병인박해 때 체포. 1870년 중국행. 중국어와 외국어를 공부, 불란서인 리델 주교와 함께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보통학교언문철자법을 정할 때 현린, 어윤적, 유길준 등과 함께 한국인 학자로 참석.
1882년 조선 총해관(總海關) 창설, 1887년 3월 인천해관 방판(幇辦)이 되어 인천에 근무, 11월에는 인천항서기관. 계속 인천과 인연 1897년 9월 인천항 감리 겸 부윤. 1898년 관립인천일어학교 교장, 독립협회의 사법위원.
*강준- 강화석의 아들. 출생 학력 미상. 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천주학방(天主學房)을 발전시켜 1900년 9월 1일 중구 답동 3번지 현 가톨릭회관 자리에 인천항사립박문학교를 설립.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천주교 인천본당에 운영권을 넘김.
부친처럼 인천해관 방판(幇辦)을 지냈는데, 1903년에 신상회사(紳商會社) 사장 서상빈이 개교한 인천사립제령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침. 1910년 경술국치 후 사임, 영국인 경영 수안광산 총지배인 겸 영어 통역관으로 말년을 보냄.
*권필수-1864년 계양 출신. 대한제국 말기 원산과 해주 재판소 판사, 검사, 변호사로 일함. 1910년 한일합병 후 충남 공주에 은둔하며 30년간 문자학(文字學) 연구에 몰두해 『육서심원록(六書尋源錄)』 30권을 완성. 육당 최남선의 칭송, 중동학교 교장 최규동의 도움으로 발간. 정인보가 서문, 타이완(臺灣)대학 총장 둥쩌빈(董作賓)에 의해 『대륙잡지(大陸雜紙)』에 크게 소개.
*박창례-1910년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서울 정신여학교, 와세다대학 2년 과. 고향 인천에서 성냥공장과 선미공장 여공들을 모아 야학을 열고 동명학원을 세움.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송림동으로 이전하고 정규 사립 초등학교로 인가를 받아 명문학교로 키움.
*장광순-1907년 강화출생. 거부 장석우의 3남. 부친 장석우에게 권유하여 1940년 부평(경찰종합학교 자리)에 인천소화고등여학교를 설립, 부친과 함께 재단이사에 취임. 광복 직후 사회 혼란 속에 학교를 천주교서울교구 재단에 기증. 그 후신이 박문여중고이다. 교육사업 외에 실업가로 활동, 지역 사회 유지로서 1935년 제2대부터 1939년 제3대, 1943년 제4대 부회의원. 1945년 8월 16일 김용규, 김태훈, 주정기, 전두영과 치안관리위원회를 조직. 같은 해 10월, 미군정의 인천시장 선출 간접선거에 7명의 시장 후보 중 한 명으로 선출.
*김활란-1899년 금곡리(배다리) 출생, 영화여학교를 나옴. 1919년 이화여전을 마치고 동교 예과 및 고등과 교수로 있다가, 1924년 미국에 유학,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이화여전 교장, 재단이사장을 역임했고,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 총장 겸 재단이사장에 취임. 대한적십자 부총재를 지냈으며 막사이사이상 수상.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장을 지내는 등 일제에 협력한 일 때문에 친일인물로 평가됨.
5.종교지도자
*존스(G. H.Jones 한국명 조원시趙元時)-1867년 미국 뉴욕 주 출생. 1888년 선교사로 파견. 1892년 인천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부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와 교육활동을 전개. 1892년 한국 최초의 미션스쿨인 영화학교를 내리교회 구내에 설립, 1897년에는 우각리에 선교사 주택을 세웠으며, 3년 뒤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를 설립. 존스 부인은 1897년 남녀 학생들을 분리하기 위해 영화여학교를 별도로 설립.
*김기범-1868년 황해도 연안 출생. 1901년 목사 안수. 1903년~1905년 존스의 뒤를 이어 내리교회 담임목사. 1904년 영화학교 설립인가 교사 신축. 1907~1910 내리교회 담임목사. 1920년 타계.
*김기선-1885년 서구 연희동 출생. 부친 김윤화가 인천해관의 직원이 되면서 율목동 211번지로 이주. 1902년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하와이 이민을 주선할 때, 그의 부친이 이 이민회사를 이용해 외아들 기선과 처남 박제원을 하와이로 데려가 거기서 본토로 유학시킴. 시카고 링컨고등학교-프린스턴 대학에 진학. 192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선거본부에 발탁, 하딩의 선거운동을 도와 당선시키는 데 한몫. 유학중이던 1908년 친일 괴뢰였던 구한국 외무고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총살한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의 장거를 도움.질병으로 귀국, 정치에 관여 않고 연희동에 여생 보냄.
*김영식 베드로-1909년 충남 예산 출생, 1937년 신부 서품을 받았다. 1947년 부평본당 전임신부 부임. 부평 2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1954년 9월 건평 198평 2층 규모로 부평성모자애병원을 개원. 1957년 성당을 건축하고 주임신부. 같은 해 서곶 공소를 열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부평동 665의 8번지 박문여중 기숙사 수리 증축 연백성모원을 개설.
*최분도 Benedict Zweber-1932년 미국 출생. 1959년 외방선교회 사제서품. 1962년 연평도 부임. 1967년 덕적도 부임. 병원선 바다의 별 진수. 복자 유베드로병원 설립. 1967년 송림동 성당 부임. 덕적도에 최분도 신부 공덕비 세워짐. 1990년 귀국 2001년 타계.
6. 문화 예술 체육인
*김은호-1892년 관교동 출생. 1912년 서화미술회 편입. 1915년 어용화사로 채용 고종황제 어진 그림. 1925년 일본 유학. 1928년 순종황제 어진 그림. 1937년 금차봉납도 그림. 1948년 대한민국미전 초대작가. 1979년 타계
*장발-1901년 인천에서 장기빈의 둘째 아들로 출생. 192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 순교한 한국 복자와 성인을 그린 성화(聖畵)를 교황청에.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한 작가들의 모임인 목일회(牧日會) 창립전과 1937년 목시회(牧時會) 회원전에 참여. 광복 후 한국사실작가회원전 ․ 한국현대서양화대전 등에 출품,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서울대 미대 학장. 예술원상․서울시문화상 수상. 만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생활. 동양적 비구상화 계열의 작품들을 남김. 대표작으로「12사도상」,「성 김대건 신부상」,「작품 A」,「작품 3」 등.
*진우촌-1904년 출생. 본명 진종혁. 배재학당 졸업 강화 하별학교 교사. 1923년 동아일보에 희곡 <개혁>당선. 인천에 이주 인배회, 제물포청년회, 한용단, 유성회등에 참여. 1926년 정암, 고일, 원우전 등과 칠면구락부 결성. 1927년 동인지 『습작시대』 창간. 1945년 『신문예』에 <두뇌수술> 발표. 한국전쟁 중 월북. 1953년 타계.
*조규봉-1917년 화수동 출생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이후 1937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 1942년 8월 만주국 제5회 미술전람회 조소부(彫塑部) 특선상, 일본의 관전(官展)인 문부성전람회(文部省展覽會)에서 한국인 최초 특선. 1944년 귀국그해 제23회 선전(鮮展)에서 <부인입상(婦人立像)>으로 조선총독상 명성을 떨침. 1945년 8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 1946년 1월 조선미술가협회, 조선조형예술동맹에도 참여해 활동하다가 월북. 북한에서 김일성 동상 등 많은 정치, 체제 주제 작품 활동. 1951년 소련에 유학, 1956년 평양미술대학 조각과 강좌장, 1965년부터는 조각학부 부장을 지냄.
*류희강-1911년 서구 시천동 출생. 명륜전문학원 수학. 1938년 북경에서 금석학 서화 연구. 무한과 남창에서 기자생활. 1945년 광복군 참모부 참가. 19465년 귀국 .해성중 교사, 시립박물관장, 시립도서관장. 1953년 국전에서 서양화 서예 입선. 1961년 검여서원 설립.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수서 시작.
*김석영-1919년 인천 출생. 대지주 김윤복의 아들. 1933년 인상입학. 수영선수로 활약. 전국대회 자유형 400,800미터 우승. 조선인 학생 괴롭히는 일본인 학생 구타하여 퇴학, 일본 간사이중학 거쳐 메이지대학 입학 레슬링 입문. 전일본 레슬링선수권대회우승. 광복 직후 부친이 인천경찰서장, 그 아래서 인천신사에 레슬링도장 만들어 지도-임배영 장창선 발굴. 1948년 런던올림픽 출전 3회전 탈락. 1950년 인공치하 피난 못가고 의용군에 징발, 1.4후퇴시에 경찰이 처형.
*박창하-1894년 인천 외리(용동) 출생. 1908년 대한제국무관학교 입학, 이듬해 폐교칙령으로 마지막무관생도 44명과 일본유학, 육군유년학교-육사 기병과 1917.2.12 매일신보 금의환향 기사 실림. 대위 때 전역, 배재 중앙 교원. 체조, 축구, 야구, 육상, 씨름 등 체육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 조선체육회장, 연희전문 교수 지냄.
7.문인
*현덕-1909년 서울 삼청동 출생. 본명은 현경윤(玄敬允). 어린 시절 대부도 당숙의 집에 보내져 대부도와 인천을 오가며 성장. 대부공립보통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올라가 중등학교 속성과 1년을 거쳐 제일고보 입학 1년여 만에 자퇴. 공사판 인부로, 부두 막노동자로 전전하다 일본행, 교토, 오사카 등지에서 품팔이 노동.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가작, 소설가 김유정과 교유하며 소설에 전념,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 당선. 본격 소설가와 동화작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나, 등단 2년에 걸쳐 발표한 8편의 단편소설과 40여 편의 ‘노마’ 연작 동화, 그리고 10여 편의 소년소설을 제외하고는 1940년 이후 거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음. 1945년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 한국전쟁 중 월북해 종군작가단에 참여, 북한에서 단편소설집 『수확의 날』출간.
*함세덕-1915년 화평동 태생. 유년기에 전남 목포로 이주해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고 인천상업학교를 나옴. 1936년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했으며, 193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승(童僧)> 당선. 이후 활발한 극작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으나 1947년 월북했다.
*배인철-1920년 인천 출생. 니혼대학 영문과를 나옴. 인천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 통역관으로 있었고, 후에 인천중학교 영어 교사와 해양대학교 영어 교수를 지냄. 1945년 10월 신포동에 있는 유명한 술집 ‘긴스이(銀水)’를 접수해 ‘예술가의 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천과 서울의 예술가들을 초치하는 한편, 신예술가협회라는 문학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신예술』을 발간. 미군부대 통역관 시절 모티브를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 루이스에게>등의 일련의 ‘흑인시’ 작품을 발표하여 당시 문단 일각에서 눈길을 끌었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이유가 분명치 않은 총격을 받고 요절. 인천의 향토 기업인 우련통운의 설립자 배인복, 배인흥 등과 형제간. <노예해안> <흑인녀> 등 5편의 시를 남김.
*김동석-1913년 인천 출생. 부친은 포목잡화점 경영. 인천공립보통학교 나와 1928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인 1930년 광주학생의거 1주년 기념식을 주도해 퇴학당한 뒤 서울 중앙고보에 편입학.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졸업. 대학 재학중이던 1937년 동아일보에 평론 <조선 시의 편영>연재, 평론가로서 주목받는 계기.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잡지 『상아탑』을 발간하고, 진정한 조선 문학의 건설을 위해서는 좌우 이념 대립을 넘어 지식인의 사명과 역할의 중요함을 강조. 1947년 대표적인 우익 논객인 김동리와의 <순수의 정체―김동리론>을 통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순수 논쟁을 불러일으킴. 1948년 서울타임스의 특파원으로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 1949년경 월북한 것으로 추, 6․25 전쟁 중 인민군 소좌 신분으로 남행. 시집 『해변의 시』 『길』 등이 있고, 평론집 『예술과 생활』, 『부르조아의 인간상.
*김차영-1922년 강화 길상면 출생.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영문과. 일제 말에 히다치(日立)제작소와 다나카(田中)공업주식회사라는 좋은 직장에 다녔으며 당대 문명을 떨치고 있던 임화 ․ 오장환 ․ 현덕 ․ 배인철 등과 교유하며 문학적 자양을 쌓음. 문단에는 1941년 문예지 『신시대』에 '야영(夜詠)'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문예탑』 동인이 된 직후인 1945년 10월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 기자가 됨. 1951년 1․ 4 후퇴 때 인천을 떠났으며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씀. 문학가동맹 핵심 멤버였음에도 월북하거나 투옥되지 않고 동양통신사 기자, 대한상공회의소 출판부장 등을 역임.
*한남철-1937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가문의 근거지는 인천과 강화.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인천 창영동에 삶. 인천중학을 나왔으며 서울대 철학과 중퇴. 1958년 약관의 나이에『사상계』에 단편소설 <실의(失意)>가 당선되어 등단, 그 인연으로 다음해 사상계사에 입사. 그 후 <강설>, <바닷가 소년>, <별장이 있는 풍경> 등을 내놓아 문단의 주목. 인간이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의 심리와 죽음의식, 한국적인 정한의 세계를 자신의 전기적 사실에 반영시켜 형상화했다. 본명은 한남규(韓南圭).
*이화자-1916년 부평에서 출생. 13세 전후 인천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고 술집에서 작부로 일하며 노래를 부름. 1935년 포리돌레코드의 김용환이 발굴하여 데뷔시킴. 크게 성공. 1936년 2월 음반 녹음,「초립동」,「새봄맞이」, 「섬시악시」 「평양은 좋은 곳」, 「월미도」 를 취입 발매. 1938년 오케레코드로 옮기면서 최고 인기의 가수에 반열에 오름. 「꼴망태 목동」, 「님 전 화풀이」크게 히트. 1940년대 아편에 중독 결혼 생활 실패. 폐인으러 살다가 사망.
8.언론인
*이길용-1899년 경남 마산 출생, 출생 직후 인천으로 이사 와서 우각리에 살았음. 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입학,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멤버로 활동. 철도국 역무원으로 일하다가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철도편으로 탁송한 일로 옥고.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으며, 1936년 8월 25일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선수 기사를 실으면서 손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 한국전쟁 중 납북.
*임영균-1903년 인천에서 출생해 3․1만세 시위에 참가해 옥고. 경성치과전문학교 졸업.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멤버였으며 정노풍․고유섭․조진만 등과 문학동인 활동. 배다리에 인천 최초의 치과병원 개원. 치과 개원의이면서 병원 옆에 인천양조장을 세워 사업. 언론인으로도 활동해『경기매일신문』과『주간인천』을 창간.
*이벽-1926년 인천 출생. 대중일보 창간에 인쇄인으로 참가했던, 인천 언론의 개척자 이종윤(李種潤)의 장남. 선린상고를 나와 1947년 대중일보에 입사, 이어 인천신보 경제부장, 취재부장을 거쳐 1955년 동양통신 인천특파원으로 근무. 1966년 2월 창간된 경기일보 편집부국장, 편집국장을 지냄. 이 신문은 1973년 유신정권의 언론 통폐합에 따라 종간, 이때 언론계를 떠남.
*고일-1903년 서울 출생이나 부친의 고향 인천으로 옴.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양정고보에 진학. 3․1 만세운동에 참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총무 겸 문예부장. 공립보통학교 교원, 인천부청 직원 등을 거쳐 『조선일보』인천 주재 기자, 『시대일보』인천 주재 기자를 지냄. 그 후 사회운동, 민족운동에 투신하고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투옥과 망명을 겪음. 8ㆍ15 광복 후 인천시립도서관장, 『대중일보』편집국장을 지냄. 인천향토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며 유명한『인천석금』을 남김.
9.기타 인물
*신순성-1878년 경남 출생. 1895년 관비유학생 도일 근대식 기선 교육. 1903년 대한제국 최초 군함 양무호 함장. 1904년 광제호 함장. 1917년 인천 이주 해원양성소 실습선이 된 광제호 함장 겸 교관. 194년 타계.
*신태범-1912년 서울 출생. 1918년 인천 이주. 경성제대 의학부 졸, 의학박사. 1942년~79년 중앙동에 신외과 개업. 인천의사회장. 인천의 중망 받는 지도자로 살아옴. 『인천 한세기』 출간. 2001년 타계.
*장기빈-1878년 평남 중화 출생, 1894년에 인천으로 이주. 이후 다시 서울로 옮겨가 1897년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인천해관 방판(幇辦)이 되어 인천에 재차 이주. 1911년 스탠다드 오일회사 인천지점을 거쳐 1918년 송학동의 타운센드상회 지배인이 됨. 1886년 천주교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 부인 황루시아와 사이에 3남 3녀, 아들들은 부통령과 내각수반을 지낸 장면 , 화가 장발, 그리고 항공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장극 박사이다.
*고유섭-1905년 인천 출생. 경성제대 법문학부 입학. 미학연구실 조수 근무 미술사연구시작. 1932년 ‘조선탑파개관’ 발표. 1933년 개성박물관장. 1943년 일본어학연구대회 ‘조선탑파의 양식 변천’ 발표. 1944년 타계.
*김찬삼-1926년 황해도 신천 김세완의 아들로 출생. 1939년 창영보통학교 졸업. 인천중,서울사대 지리교육과 졸업 인천고 교사. 1959년 도미 유학. 1962년 세계여행 하고 귀국 강연. 이후 여행가로 변신. 세종대 교수. 동산육영회 이사장.
*이명수-1919년 황해도 출생. 1959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학교법인 봉덕학원 설립. 그해 2월 봉영여중, 여상을 운영. 난민구호사업도 펼침. 청라도로 눈을 돌림. 자조근로사업장인 청라도 앞바다 매립사업에 발을 담금. 1964년 천해개발공사(대표 김옥창)이 신청한 청라도 매립사업권을 놓고 동업계약을 맺고 회사대표. 경서동의 금산-장도-일도-청라도-문점도-장금도-소도를 잇는 7,800미터의 방조제를 쌓는 공사에 착수. 뒷날 매립권을 동아건설에 넘겨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