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대한제국을 건설한 이유
김문식(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1755년에 안정복은 스승 이익에게 일본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무렵 그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동사강목』을 편찬하고 있었다. 다음은 안정복의 말이다. 병자호란 이후 일본의 국서(國書)에서는 자국의 연호를 썼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명이 망하고 조선은 청을 섬기는 상황에서 없어진 명나라의 연호를 쓸 수도 없고 야만족인 청의 연호를 쓸 수도 없으므로 부득이 일본의 연호를 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국서에는 왜황(倭皇)의 연호를 쓰는데, 이는 관백(關白, 쇼군)이 현실 정치를 지배하더라도 엄연히 왜황의 신하임을 의미했다. 그런데 조선의 국왕은 관백과 대등한 의례를 거행하므로, 만일 왜황이 권력을 회복하거나 관백이 스스로 황제가 된다면 장차 조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세력균형 틈타 중국, 일본과 대등한 지위를
스승이 답장을 썼다. 관백은 조선의 국서에 ‘국왕(國王)’이라 쓰면 접수하지 않으니, 이는 자기 위에 천황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인 이맹휴(李孟休)는 일본의 관백이 국왕이 아닌 것을 알고 관백이 보낸 국서에 답장할 때에는 국왕이 아니라 대신(大臣)이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방문한 김성일(金誠一)은 관백을 만날 때 뜰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의례를 끝까지 거부했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의 지위를 대등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김성일이 지금 살아있다면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이익과 안정복이 우려했던 일은 1868년에 현실로 나타났다.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집권하면서 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조선의 지위를 낮추고 자신들을 높이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은 명확했다. 지금까지의 교류는 막부(幕府)가 주도했으므로 양국 간에 대등한 지위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천황이 직접 교류하므로 조선은 천황에 복속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에서는 당연히 이 문서를 접수하지 않았고, 일본은 무력시위를 통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것은 청 황제와 일본의 천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1882년에 조미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 국가들과 차례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수교할 때에는 고종의 지위가 국왕이든 황제든 별 차이가 없었다. 수교하는 당사국이 대등한 관계에 있고, 고종이 최고 지도자임을 인정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 황제와 조선 국왕은 전통적으로 군신(君臣) 관계에 있었고, 일본 천황과 조선 국왕을 대등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을 건설한 것은 강대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상황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위세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삼국간섭이라 불리는 강대국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강대국의 하나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경운궁으로 복귀하여 대한제국을 건설했는데, 자국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조치였다. 1899년에 대한제국은 청과 수교했는데, 이때부터 한국과 중국은 대등한 지위에 있게 되었다.
1910년 이후 대한제국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
대한제국이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이었음은 한일합방 때의 조치를 보면 알 수 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천황이 조령(詔令)과 칙령(勅令)을 내렸는데, 한국의 국호는 ‘조선’, 한국의 황제는 ‘왕’, 황태자는 ‘왕세자’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순종은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지위가 격하되었고, 일본 황실의 통제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제실도서(帝室圖書)는 규장각도서가 되었고, 제실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되었으며,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을 『고종태왕실록』으로 만들려는 일본인의 시도가 있었다.
최근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를 훈련시켜 황실을 재건하려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중이다. 필자는 황실의 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제국의 의미를 제대로 따져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는 자주독립국으로 국기, 국가, 국화와 같은 국가상징을 처음으로 만든 국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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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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