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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법인의 변화는 마케팅, 컨설팅,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스카우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사진은 한영 회계법인의 회의 모습. |
회계법인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간 딱딱하고 폐쇄적인 이미지였던 이들 회계법인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또 채용 인원을 예년에 비해 크게 늘리고 있으며 대상도 회계사 중심에서 벗어나 마케팅이나 컨설팅, 언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모습은 업계의 동향을 좌지우지하는 삼일회계법인 안진회계법인 삼정회계법인 한영회계법인 등 ‘빅4’ 대형사들이 주도하며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국내에 2011년까지 전면 도입되는 ‘국제회계기준(IFRS)’이 있다. 실제로 빅4 업체들은 전담팀을 꾸리는 등 IFRS 도입 ‘특수’를 손에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삼일은 이미 2005년부터 IFRS 전담팀을 만들었고, 한영은 회계사들을 위한 관련 학습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삼정 역시 2006년부터 전담 조직을 운영해 오는 중이다.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도입하고 있는 IFRS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원칙주의’다. 한덕철 삼일회계법인 전무는 “그간 회계는 개별 사안에 따라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라고 명기돼 왔다”며 “세계 경제가 통합되는 추세에서 각 사안별로 대응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IFRS를 반대하던 미국도 대세에 수긍해 지난 8월 28일 2014년까지 이를 도입하기로 했다.
또 다른 골자는 연결기준 공시 체제로의 전환 등 공개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는 점이다. 그간 ‘기업 비밀’로 공개되지 않던 회계 정보의 많은 부분이 투자자들에게 오픈돼야 한다. 즉, 회계사의 판단이 더욱 중요해지고 각 분야에서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각 분야 인재들, 회계법인으로 ‘고고’이에 대한 대비로 빅4 업체들은 올해 채용 인원을 지난해보다 더 늘려 잡았다. 이미 삼일회계법인은 작년 회계사를 포함해 신입사원 400여 명을 선발했고 안진 삼정 한영 등도 200여 명의 신입사원을 선발했다. 이들 회계법인의 신입 회계사 채용 인원은 작년 전체 회계사 합격자 830명 중 98%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청년실업’은 회계사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다.
경력직도 대거 선발하고 있다. 한영은 작년 경력직 공인회계사와 컨설턴트를 400여 명 선발했다. 이 때문에 각사들은 사무실도 크게 넓히고 있다. 삼일의 경우 서울역 앞 국제빌딩 내 사옥과는 별도로 길 건너 STX빌딩에 새 사무실을 열었고 한영도 여의도의 새 사옥으로 확장 이전했다.
새로 회계법인에 입사하는 직원들은 비단 회계사들만이 아니다. 대기업의 마케팅 담당자, 정보기술(IT) 전문가, 경영학 석사(MBA) 출신 컨설턴트, 유력 언론사의 언론인 등 다양한 인재들이 회계법인에 스카우트되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해외 파트너사도 한국 회계법인의 기업 문화가 지나치게 폐쇄적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며 “인적 구성이 다양해지니 직장 분위기도 생기가 돌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러 분야의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는 이유는 회계법인의 업무 영역이 보다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회계법인의 역할이 전통적인 세무 감사 영역에 치우쳐 있었다면 최근 들어 컨설팅 부문 등 새 분야의 역할이 크게 강화되고 있는 것. 한영회계법인 관계자는 “회계법인은 기본적으로 고객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자주 만나게 된다”며 “이들의 고민과 이슈가 회계법인 컨설팅의 주요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즉, 리스크 관리, 관리 회계, 원가 혁신, IFRS 등에 대한 수요가 가장 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재무적 컨설팅을 넘어서 전략이나 인적 자원(HR), IT 컨설팅, 환경 등의 기업 전반을 아우르는 컨설팅을 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특히 국내의 경우 IFRS의 도입으로 인해 이를 처리하기 위한 기업의 IT 컨설팅 분야를 놓고 각 회계법인 간에 치열한 격전도 예상되고 있다.
안진의 컨설팅사인 딜로이트컨설팅 이재술 대표는 “HR 분야에선 타워스페린, IT 분야에선 IBM, 전략 컨설팅에선 맥킨지 등과 경쟁하는 종합 컨설팅사로 성장하고 있다”며 “현재 딜로이트의 글로벌 규모 컨설팅 매출액은 6조 원으로 국내서도 앞으로 몇 년 안에 컨설팅 업무가 회계법인 내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50%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세봉 삼정 상무 또한 “전략 컨설팅을 담당하는 SCG(Strategic Consulting Group), 운영 전략을 담당하는 BPS(Business Performance Service)를 운영하고 있어 회계나 세무, IT, 부동산 등 기업 전체의 밸류 체인을 커버할 수 역량을 갖췄다”며 “매출의 50%까지 컨설팅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화 첨병’ 자부심 넘쳐이들의 주수익원 중 하나인 인수·합병(M&A)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추세도 컨설팅 분야의 성장 요인 중 하나다. 이재술 대표는 “글로벌 M&A의 경향이 대형사끼리의 M&A는 투자은행이(IB)이 주관하고 중규모 이하 M&A는 회계법인들이 처리하는 것”이라며 “글로벌 체인망을 갖춘 국내 회계법인들은 해외 네트워크를 통한 M&A 노하우도 쉽게 전수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회계법인 관계자들 사이에선 자신들이 ‘글로벌화’의 첨병에 서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유는 이미 1960~70년대부터 국내 회계법인과 외국계 회계법인들 간에는 끈끈한 관계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현재도 삼일은 PwC, 삼정은 KPMG, 안진은 딜로이트, 한영은 어니스트&영 등 세계시장의 빅4 업체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또 각사들의 해외 파견 인원은 각각 20~30여 개국 100여 명 이나 된다. 한국 기업이 나가 있는 곳은 대부분 국내 회계사들이 파견돼 있다는 설명이다.
한덕철 삼일회계법인 전무는 “예전 선진국들이 한국에 차관을 공여하면서 외국계 회계법인들이 처음 국내에 들어왔다”며 “국내 기업은 이들의 노하우가 필요했고 외국 기업은 국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기업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전무는 또 회사의 글로벌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현재 2.5% 수준인 외국계 직원을 3년 안에 5%까지 늘릴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컨설팅 사업의 비중에 따라 각사들은 조직 구성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대다수의 회계법인들이 M&A되면서 각 조직별로 모든 업무를 수행하는 수직적 조직이었다면 각각의 서비스별로 조직을 분화하는 수평적 조직으로 구성해 ‘규모의 경제’와 ‘시너지’를 꾀하고 있는 것. 가장 최근에는 삼일이 지난 7월 그동안 네 개의 큰 유닛으로 구성돼 있던 조직을 감사, 세무, 자문 등 서비스별 조직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각 회계법인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2007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몇몇 회사는 전체 수입에서 외부 감사를 제외한 세무와 컨설팅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삼일회계법인은 작년 전체 수입 3595억4900만 원 중 세무와 컨설팅 등에서 64.14%(2306억2100만 원)를 벌어들였다. 안진도 전체 수입 1873억 원 중 회계감사와 세무·컨설팅의 비중이 각각 47%(889억3300만 원)와 53% (983억6700만 원)였다
하지만 IFRS 도입 ‘특수’와 컨설팅 분야의 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치는 국내 회계법인들이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해외 회계법인의 국내 시장 직접 진출 가능성 때문이다. 또 신입 회계사들을 싹쓸이하는 등 지나치게 빅4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업계의 불만이다. 하지만 IFRS 시스템 도입 과정에서 회계법인들이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기업들의 불만도 속속 들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간 해외 회계법인의 국내 진출은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제한돼 왔다”며 “‘세계 공용어’인 국제회계기준이 도입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시장이 개방된 이후엔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판단되면 해외 회계법인들이 파트너 관계를 청산하고 직진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