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스프링스’ 골프웨어 의류업체
협력업체에 100% 현금결제
성동구 성수동 코오롱디지털타워 ㈜네오피에스 ‘팜스프링스’사무실. 안복희대표이사는 최우수사원인 냥 분주하다. 방문객들에게 상품을 홍보하고 제품의 품질을 체크하느라 직원보다도 더 바쁘게 움직인다.
안복희대표이사는 “고객에게 신뢰를 주기위해서는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면서도 값이 저렴해야한다”면서 “고품질의 제품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협력업체에 어음결제가 아닌 현금결제로 물품대금을 지급해야한다”며 제조업체의 고충을 먼저 헤아린다. 또한 “팜스프링스는 골프웨어사업에서 얻은 수익을 타 업종에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골프웨어사업에 재투자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고락(苦樂)을 함께한 협력업체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며 고품질, 중저가 골프웨어 탄생과정을 피력(披瀝)한다. 회사가 성장하기위한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직원들의 행복과 건강, 화목을 손꼽았다. 팜스프링스에 장기 근로자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는 현실도 안 대표이사의 경영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회사 직원들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고자 8명의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안복희대표이사는 유명의류브랜드 협력업체 출신이다. 다년간, 의류를 제조, 납품해오면서 가장 큰 불만이 어음결제였다.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고서도 길게는 6~8개월짜리 어음을 받고는 전전긍긍했었다. 납품했던 대형업체가 혹여 무너질까봐 매일같이 연쇄부도우려에 시달렸었기 때문이다.
안 대표이사는 1995년부터 팜스프링스에 의류를 납품해오다 부도난 어음으로 인해 돌연 채권자 신세로 전락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팜스프링스를 폐업시키긴 아깝다’는 채권단회의에서 의류업계의 경험이 풍부하고 리더쉽이 탁월한 안 대표이사를 채권단 회장으로 추대하고 회생을 결정했다.
팜스프링스는 1989년 미국에서 로열티를 주고 들여온 골프의류업체다. 당시 점퍼가 100 만원, 티셔츠가 30만원의 고가(高價)제품으로, 서울 강남중심에서 활발하게 판매된 인기품목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려 고가의 브랜드는 1999년 법정관리에 이르렀다.
채권단 회장인 안복희대표이사는 팜스프링스의 회생을 위해서 처절한 개혁을 단행했다. 부족한 자금난을 해소하기위해 바지, 티셔츠, 재킷 등 각 분야별로 7명의 소사장제도로 회사를 운영했다. 유통과정을 간소화하고 고가의 의류를 지양(止揚)했다. 아웃렛과 대형마트 등에서 판매하는 실속의류를 제조, 판매하는 전략으로 시장을 차근차근 점유해나갔다. 회사가 정상화돼가자 안 대표이사는 이때부터 어음을 쓰지 않고 현금결제를 시작했다. 기존의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가격을 낮추고 전국의 상가시장까지 진출했다. 공격적인 판매 전략에 따른 팜스프링스 웨어의 점유율이 높아지자 매출이 뚜렷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 7억 원의 매출액이 2003년 15억 원에 이어 2005년 50억 원에 이르렀다.
안복희대표이사는 2006년 채권단체제를 극복하고 회사를 직접 인수하고 판매업분야에 심혈을 기울였다. “잘나가던 팜스프링스가 외환위기 이후 부도나고 회생과정을 거치면서 ‘착한 의류업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솟구쳐 회사를 창업하게 됐다”면서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직원과 협력업체,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회사로 성장시키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팜스링스의 기사회생(起死回生)에 따른 매출액은 꾸준하게 늘어 작년에는 300억 원을 달성했다. 2015년 팜스프링스는 안정적으로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기존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매장 등 110곳의 상가점포수를 150곳으로 확장한다. 국내시장과 더불어 해외시장도 개척한다. 한류 골퍼들의 활약에 힘입어 중국시장 진출에 이어 일본시장도 타진하며 글로벌 골프웨어 업체로 발돋움할 계획이다. 오직 한 우물만 판, 안복희대표이사의 30여 년의 사업경륜과 일에 대한 열정은 골프웨어사업으로 녹아 스며든다. ㈜네오피에스의 ‘팜스프링스’와 ‘네오팜스프링스’ 두 브랜드는 치열한 국내외 골프웨어시장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박종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