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물론 강진제자들과의 집체(集體)작업의 결과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초당은 조선의 학술 사상사의 기념비적 공간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곳 풍광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ㆍ[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다산십이승첩(茶山十二勝帖)] 등이다.
이들 작품을 보면 다산초당의 풍광이나 공간배치 변화과정도 알 수가 있는데
초의가 그린 〈다산도(茶山圖)>와 비교하면 흥미가 배가된다.
[다산사경첩]의 〈석병(石屛)〉에서 “죽각(竹閣) 서편 머리에 바위가 병풍되니(竹閣西頭石作屛)”이라거나
〈다조(茶竈)〉에서 “차 끓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烹茶小竈艸堂前)”,
“다조는 지정(池亭) 앞에 있다.(茶竈在池亭之前)”고 하여 초당과 지정을 동일 공간으로 설명한 것이 그 예다.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목민관 그런데 문예가 증언하는 인간 다산은
그냥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즐겁게 놂)만을 일삼는 시인이나 문인서화가, 조경전문가 이상의 지점에 있다.
요컨대 다산초당은 다산이 꿈꾼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낡은 조선을 새롭게 한다)의 설계사무소인 셈인데
’다조‘의 솔바람소리(松風)는 그냥 선정(禪定)으로 들어가는 찻물 끓는 소리가 아니라
다산에게는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민중의 울부짖음(天鼓, 천둥소리)인 것이다.
다산이 강진들판에서 자행되는 탐학(貪虐)의 현장을
“...내 살가죽 네가 벗기고 /내 뼈까지 부순 네놈...”
([전가기사])으로 고발하는 지점은
감사, 수령, 아전과 같은 목민관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백성을 하늘로 여긴’ 유교정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산 시의 이런 현실참여는 앞서 본대로 그림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문인(文人)의 여기로 그려진 그의 그림에서 풍자나 고발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고 여느 문인들의 그림과 같이 취급하는 것도 온당치가 못하다.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매우 현실적인데,
앞서 본 [매조도]는 열다섯 나이 때 시집온 부인이 입고 온 빛바랜 분홍치마가 캔버스가 될 뿐만 아니라
이를 마름질하여 적중(謫中: 귀양지)에서 딸에게 남겼다.
매화나 새를 그리는 기법도 사실적이다.
매화라고 하면 은연중에 사군자(四君子)와 바로 통하지만
채색과 흰색호분으로 새의 부리와 꽃송이를 선명하게 담아내는 [매조도]의 묘사기법에서 다산의 그림은
실학적(實學的)인 사실주의(寫實主義) 화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요컨대 다산의 매화는 더 이상 퇴계가 형님으로 불렀던 군자(君子)가 아니라 그냥 뜰의 나무다.
이것은 동시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 난(蘭)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유(儒)ㆍ 불(佛)의 불이선(不二禪)과 성중천(性中天)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도의 관념(觀念)세계로 노래한 것과도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 다 같은 경학자의 시와 글씨 그림이라도 동시대의 다산과 추사는 물론,
조선중기 퇴계와 후기의 다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문예로 보는 다산의 인간상은 이지(理智)와 감성(感性)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 그려진다고 하겠다. |